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12. 안시성 전투

浮萍草 2013. 6. 15. 07:00
    불세출의 황제 당태종을 무릎 꿇린 고구려의 기상 
    당태종, 대제국건설 위해 수양제 이어 고구려 침략 안시성서 양만춘과 격전 50만으로 토성 쌓아 공격
    고구려 양만춘이 당태종에 맞서 싸웠던 안시성으로 추정되는 요녕성 해성시 영성자산성. 윤명철 동국대 교수 제공.
    구려와 당의 관계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당 태종의 즉위 이후다. 631년(영류왕 14) 당의 사신 장손사(長孫師)가 고구려가 수와 전쟁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경관(京觀)을 헐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고구려에서는 당의 침략에 대비하여 동북쪽의 부여성으로부터 발해만의 비사성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16년에 걸쳐 쌓았다. 640년 서역의 고창국(高昌國)을 정복한 당은 고구려로 관심을 돌렸다. 641년 고구려에 파견되었던 당 사신 진대덕(陳大德)은 고구려 지리와 풍속 등을 염탐하여‘봉사고려기(奉使高麗記)’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642년 10월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권력을 장악하고 무단적인 독재정치를 시작했다. 연개소문의 대외정책은 강경했다.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고구려를 방문한 김춘추에게 신라가 점령한 한강 유역의 반환을 요구하며 그를 투옥했다. 644년 당의 사신 상리현장(相里玄獎)의 신라 침략 중지 요구 또한 단호히 거절했다. 당 태종은 고구려 침공 계획을 세웠다. 연개소문의 시역(弑逆)을 구실로 내세웠지만 천하 사방의 평정이라는 야망 때문이었다. 644년 7월20일 고구려를 정복하려고 염입덕 등에게 칙령을 내려 배 400척을 만들어 군량을 실어놓게 하였다. 이와 동시에 사신 장엄(蔣儼)을 고구려에 보내 연개소문에게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9월 연개소문은 당 태종에게 백금을 예물로 보냈지만 거부당했다. 그리고 태종은 막리지가 관원 50명을 보내어 숙위(宿衛)하게 하려 한다는 고구려 사신 일행을 감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접한 연개소문은 당의 사신 장엄을 굴속에 가두었다. 11월24일 당에서는 고구려 원정군을 편성했다. 장량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4만3000명의 군사와 전함 500척으로 평양으로 향하게 하고,이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만으로 요동으로 향하게 한 것이다. 645년 정월 12일 태종은 제장을 거느리고 낙양을 출발했다. 3월19일 태종이 시중드는 신하들에게 말했다. “짐이 지금 동방을 정벌하는 것은 중국을 위하여 자제들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것이며,고구려를 위하여 군부(君父)의 치욕을 갚으려는 것뿐이다. 또 사방이 평정되었는데 오직 이곳만 평정되지 않았다.” 이처럼 당 태종의 고구려 침략은 사방의 평정을 통한 대제국의 건설이라는 그의 야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4월1일 이세적이 요수를 건너 현토에 이르자 고구려는 성문을 닫고 지켰다. 4월26일 무순의 개모성(蓋牟城)이 함락됨에 고구려의 남녀 2만 명과 양곡 10여만섬이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5월2일 대련만의 비사성(卑沙城)도 당의 수군에 함락되어 남녀 8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5월17일 19일간의 집요한 공격을 받은 요동성도 함락됨에 1만 명이 전사하고 1만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민간인 포로가 4만명,양곡 50만섬을 빼앗겼다. 백암성의 성주 손대음(孫代音)은 몰래 심복을 보내 항복을 청하여 6월10일에 함락되고 남녀 1만명과 병사 2400명이 포로가 되었다. 6월20일 태종이 안시성(安市城)에 도착했다. 안시성은 지금 해성(海城) 동남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이다. 6월21일. 북부욕살(褥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이 고구려 군사와 말갈 군사 15만명을 거느리고 구원하였다.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는 경험이 많은 노장군으로 고연수에게 말했다. “싸우지 않고 시간을 보내며 오래 버티면서 기습병으로 군량 길을 끊는 것이 낫다. 군량이 떨어지면 우리가 이길 수 있다.” 고연수는 이를 듣지 않고 곧바로 안시성으로 향했다. 이들은 안시성 동남쪽 8리에 이르러 진을 쳤다. 진의 길이가 40리나 되었다. 고연수가 이끄는 고구려군은 당의 기습 공격을 받아 3만여 명이 죽었다. 6월23일 고연수와 고혜진은 3만6800명을 거느리고 항복했다. 장교 3500명을 내지로 옮기고 말갈인 3만3300명은 모두 파묻었다. 말 5만 필과 소 5만 두, 그리고 광명개(光明鎧) 1만 벌을 당군에게 넘겨주었다. 고립무원의 상태에서도 안시성은 성주 이하 모든 사람들이 완강하게 저항했다. 안시성은 험하고 군사가 날래며 그 성주는 재능과 용기가 있어서 연개소문의 난에도 성을 지켜 굴복하지 않았고, 연개소문이 공격 하였으나 함락시킬 수 없어서 성주를 그대로 유임시켰던 곳이었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들의 집안을 돌보고 아껴서 사람마다 자진해 싸움으로서 쉽게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당 태종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오골성을 먼저 공격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안시성을 계속 공격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당군은 안시성의 성곽 옆에 이와 비슷한 토산(土山)을 쌓기 시작했다. 강하왕 도종이 군사를 독려하여 안시성 동남쪽에 토산을 쌓았다. 고구려에서도 또한 성의 담장을 높게 증축하여 높이가 같게 하였다. 사졸을 교대로 나누어 교전하였는데, 하루에 6~7번씩이나 싸웠다. 도종이 나뭇가지와 흙을 담은 부대로 토둔(土屯)을 만들어 산과 같이 쌓고 가운데에 다섯 갈래의 길을 만든 다음 그 위에 나무를 얽어놓고 흙을 입혔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60일 동안 쌓으면서 50만명을 동원하였다. 토산의 꼭대기가 성보다도 두어 길이나 높아서 성중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도종이 과의도의(果毅都尉) 부복애(傅伏愛)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토산 위에 진을 치고 적을 수비하게 하였는데 토산이 높은 곳에서 무너져 내려 성을 누르자, 성이 무너졌다. 그때 마침 부복애가 사사로이 자리를 비웠으므로 고구려 군사 100명이 성이 무너진 곳을 따라 나와 싸워 마침내 토산을 빼앗아 웅거 하였다. 그리고 참호를 파 길을 뚫은 다음 빙 둘러서 불을 놓고 막아 굳게 지켰다. 당군은 토성의 탈환을 위하여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3일 동안이나 격렬하게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당군의 작전은 타격을 입었다. 당, 총공세에도 함락 못해 88일간의 포위 풀고 철군 태종, 양만춘 충성심 칭송 고구려 정벌 중지 유언도
    날씨는 이미 추워지고 군량마저 떨어졌다. 당군은 88일간의 포위를 풀고 9월18일 서둘러 퇴각하기 시작했다. 안시성의 성주는 성에 올라 절하며 작별인사를 했고 이에 태종은 비단 100필을 주면서 임금 섬기는 것을 격려했다고 한다. 그리고 태종이 활과 옷을 연개소문에게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김부식은 평했다. “불세출의 당 태종도 안시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돌아갔으니 안시성의 성주야말로 비상한 호걸이라 하겠다.” 안시성의 성주는 양만춘(楊萬春)이었다. 양만춘이 당 태종의 눈을 쏘아 맞혔다는 이야기가 구전되었다. 목은 이색(1328~1396)의 정관음(貞觀吟)이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주머니 속의 물건이라 하더니(謂是囊中一物耳)/ 화살에 눈이 빠질 줄을 어찌 알았으랴(那知玄花落白羽)” 현화(玄花)는 눈을, 백우(白羽)는 화살에 단 새의 흰 깃으로 곧 화살을 의미한다. 태종은 고구려를 자기 주머니 속의 물건인양 아주 얕잡아 보았지만,정작 화살에 눈이 빠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태종은 퇴각하는 도중에 악성 종기를 앓았다. 즉 645년 12월7일 태종은 종기가 나서 가마에 올라서 잤다. 병주(幷州)에 도착한 14일에 태자가 종기를 입으로 빨았으며 보연을 부축하며 걸어 쫓기를 며칠 동안 했는데 17일에 병이 나았다. 태종의 종기는 10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안정복은 태종의 종기에 주목하여 이것이 곧 유시(流矢)에 상처 입은 것을 숨긴 것이라고 했다. 태종은 고구려 원정을 깊이 후회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만약에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행동을 하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포기하지 않았다. 647년 2월20일 조정에서 다시 고구려 정벌을 논의했는데,자주 일부의 군사를 침략케 하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3월에 이세적이 이끄는 육군과 우진달이 이끄는 수군이 고구려를 공격하게 한 것도 이와 같은 작전의 하나였다. 647년 9월15일에는 칙령을 내렸다. 강남에 있는 12개 주의 공인(工人)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어 고구려 정벌에 대비하게 했다. 648년 6월 태종은 30만 대군을 발동하여 고구려를 칠 계획을 세우고 검남도(劍南道:사천성 중남부와 운남성)에서 배를 만들게 하였다. 7월11일 방현령(房玄齡)은 위독한 중에도 태종에게 표문을 올려 간했다. “병기란 흉악한 도구이며 전쟁이란 위태로운 일로 부득이한 경우에만 써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고구려가 신하로서 절개를 잃어버렸다면 폐하께서 주벌해도 되고 백성들을 침략하여 소요시켰다면 폐하께서 섬멸해도 되며, 오래도록 중국의 걱정거리가 되었다면 폐하께서 제거해도 됩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해당된다면 비록 날마다 만명이 죽어나가도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조건 중에 해당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앉아서 중국을 번거롭게 하면서 안으로 연개소문에게 피살당한 과거 군주 고건무(高建武)의 원한을 씻어주기 위해서이고, 밖으로는 신라 침략에 대한 복수라고 하니,얻는 것은 너무 작고 잃는 것은 너무 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태종은 고구려 정복 야망을 끝내 포기하지 않다가 임종 시에 태자에게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수 양제와 당 태종의 고구려 친정 실패,이 역사적 사건은 중국의 수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1488년 2월 17일,명나라 소주(蘇州)의 한 관리가 조선의 최부(崔溥: 1454~1504)에게 물었다. “당신 나라는 무슨 비결로 수당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소?” 최부는 답했다. “지략 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수가 군사를 잘 지휘했으며,병졸들은 모두 충성스러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소. 그 때문에 고구려는 변방의 작은 나라였으나 족히 중국의 백만 군대를 두 번이나 물리칠 수 있었소.” 양제가 이끄는 수군과 태종이 거느린 당군을 격퇴한 고구려,이는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하는 자랑스러운 역사였다.
    법보신문 Vol 1090         김상현 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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