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11. 사랑의 불길

浮萍草 2013. 6. 8. 07:00
    공든 탑도 무너뜨린 지귀의 애절한 짝사랑
    늙고 가난한 연인의 아버지 대신해 종군 주변 유혹 뿌리치고 약속 지켜 백년해로
    1980년대에 새로 지은 경주 흥륜사. 이곳에서 ‘영묘사’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영묘사터로 보기도
    한다. 문화재청 제공.
    7 세기 신라에 있었던 사랑 이야기 두 토막. 하나는 진평왕 때 가실과 설씨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선덕여왕을 짝사랑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지귀라는 청년의 이야기다. 진평왕(579~632) 때 경주 율리에 설씨녀(薛氏女)가 살았다. 그는 가난하고 외로운 평민 집안의 딸이었지만 용모가 단정하고 품행이 얌전했다. 그를 본 사람은 모두 그의 아름다움을 흠모하였지만 감히 가까이하지는 못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정곡(正谷)으로 나라를 지키는 당번이 되어 가야 했다. 딸은 고민만 하고 있었다. 노쇠하고 병든 아버지를 멀리 보낼 수도 없고 자신은 여자의 몸이라 아버지를 대신해서 갈 수도 없었기에. 사량부 소년 가실(嘉實)은 비록 가난하고 궁핍했으나 의지를 곧게 기른 남아였다. 그는 일찍부터 설씨를 좋아하면서도 감히 말을 못하고 있었다. 늙은 아버지가 종군하게 된 일로 설씨가 걱정한다는 말을 들은 가실은 마침내 설씨에게 말했다. “나는 비록 나약한 사람이지만 일찍이 의지와 기개로 자부하였습니다. 원컨대, 엄친의 일을 이 몸이 대신하게 하여 주시오.” 설씨가 매우 기뻐하며 아버지에게 들어가 이 말을 고하였다. 아버지가 가실을 불러서 보고 말하였다. “그대가 이 늙은이의 일을 대신해 주겠다니 기쁘고도 송구스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소. 보답을 하고 싶은데, 만약 그대가 우리 딸을 어리석고 가난하다 하여 버리지 않는다면 어린 딸을 주어 그대를 받들게 하고 싶소.” 가실이 두 번 절하고 말했다. “감히 바랄 수는 없지만, 이는 저의 소원입니다.” 가실이 물러나 혼인날을 청하였다. 이에 설씨가 말했다. “혼인은 인간의 큰일, 함부로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이미 마음을 허락하였으니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대가 방위에 나갔다가 교대하여 돌아온 뒤에 날을 받아 예를 올려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거울을 절반으로 나누어 각각 한 쪽씩 지니며 말했다. “이것을 신표로 삼아 뒷날 맞추어 봅시다.” 가실에게는 말이 한 필 있었다. 그는 설씨에게 말했다. “이것은 천하의 좋은 말이라 훗날 반드시 쓸 데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떠나면 기를 사람이 없으니 여기에 두었다가 쓰기 바랍니다.” 그는 드디어 작별하고 떠났다. 나라에 일이 있어서 기한 내에 교대를 시켜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가실은 6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딸에게 말했다. “처음에 3년을 기한으로 하였다. 지금 이미 기한이 지났으니 다른 집으로 시집을 가야겠다.” 설씨가 말했다. “지난번에 아버지를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가실과 굳게 약속하였습니다. 가실이 그것을 믿었기에 여러 해 동안 군무에 종사하여 춥고 배고픔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적지에 가까이 근무함에 손에서 무기를 놓지 못하여,마치 호랑이 입에 가까이 있는 것과 같아서 항상 물릴까봐 염려되는데, 신의를 버리고 약속을 어기는 것이 어찌 사람의 정리이겠습니까? 아무래도 아버지의 명령을 따를 수 없으니 다시는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늙은 아버지는 장성하도록 짝이 없는 딸을 억지로라도 시집보내려고 마을 사람과 몰래 혼인을 약속하였다. 정한 날이 되어 그 사람을 맞아들이니,설씨가 굳이 거절하고 몰래 도망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마구간에 가서 가실이 두고 간 말을 보며 한숨 쉬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때 가실이 돌아 왔다. 그의 초췌한 형상과 남루한 의복은 집안사람들조차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 그래서 다른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에 가실이 앞으로 나아가 깨어진 거울 한 쪽을 던졌다. 설씨가 이것을 주워들고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와 집안사람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마침내 다른 날로 결혼을 언약하여 해로하였다. 이상은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된 설씨녀전을 가감 없이 그대로 옮긴 것이다. 전쟁의 시대에 살았던 소년 가실의 순수한 사랑은 한 편의 단편소설처럼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 여왕 사모한 지귀는 죽어서 불귀신이 돼 역사적 사실과 괴리 경전 속 설화와 유사
    영묘사터에서 발견된 웃는 얼굴 기와. 문화재청 제공

    다음은 선덕여왕을 혼자서 사모하다가 불귀신이 되었다는 지귀의 짝사랑 이야기다. 신라 왕경에 영묘사(靈廟寺)가 창건된 것은 선덕여왕 즉위 4년(635)의 일이고, 여왕은 이 절에 행차하여 향을 피우곤 했다. 양지(良志) 스님이 정성을 기울여 영묘사의 장육삼존(丈六三尊)을 조성할 때 왕경의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이 서로 다투어 흙을 날랐던 것으로도 이 절은 유명했다. 그들은 불상을 조성할 흙을 나르며 노래를 불렀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슬픔 많아라. 슬픔 많은 우리 무리여, 공덕(功德) 닦으러 오다.” 풍진세상 사는 사람들, 그 누군들 서러움 없겠는가? 그래도 그 슬픔일랑 땀 흘려 일하며 잊어가는 것. 그러기에 공덕 닦으러 오라고 손짓했고, 많은 사람 모여 노래하며 흙 날랐던 것. 향가 풍요(風謠)를 노동요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불교의 노래다. 공덕 닦아 인간의 근원적 슬픔 극복하기를 원했던 노래이기에. 어느 날 당대의 고승으로 이름난 혜공(惠空)이 영묘사를 찾아왔다. 혜공은 평소에 삼태기를 지고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던, 그래서 ‘삼태기를 지고 다니는 승려’라는 의미의 부궤화상 (負簣和尙)으로 불리던 무애도인이었다. 혜공은 미리 준비해 온 새끼줄로 이 절의 금당(金堂)과 좌우의 경루(經樓)와 남문(南門)의 행랑을 둘러 금줄을 쳤다. 그리고 절의 일을 주관하는 승려에게 알렸다. “이 새끼줄은 사흘 후에 풀도록 하라.” 일을 주관하는 승려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무 설명도 없이 남의 절 중요 건물을 금줄로 둘러치고는 3일 동안 풀지 못하게 하는 그 이유를. 그러나 무애도인으로 이름난 고승의 말을 어기기도 어렵고, 또 이상한 생각도 들어서 승려는 그의 지시대로 했다. 과연 사흘 만에 영묘사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이 절의 목탑에서 불이 나더니 삽시간에 거대한 불길은 웅장한 이 절을 삼킬 듯이 덤볐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혜공 스님이 새끼로 금줄을 쳤던 법당과 경루 등으로는 불길이 번지지 않아서 화재를 면할 수 있었다. 혜공은 어떻게 영묘사에 불이 날 것을 미리 예견했을까? 아마도 선덕여왕을 짝사랑하던 지귀(志鬼)가 상사병을 앓고 있다는 소문은 혜공도 들었을 법하고 그래서 영묘사에 선덕여왕이 행차 하는 날,이 절이 사랑의 불길에 휩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예감했던 것일까? 이 절에 선덕여왕이 행차가 있었던 이 날의 불은 지귀(志鬼)의 심화(心火)로부터 발생하여 영묘사의 목탑을 맴돌았으나 금줄을 맨 곳만은 화재를 면했다는‘삼국유사’의 기록만으로는 지귀심화의 내용을 제대로 알기 어렵다. 다행스럽게도‘신라수이전’에 수록되었던 지귀설화가 권문해(權文海,1534~1591)가 편찬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심화 요탑(心火遶塔)이라는 제목으로 인용되어 전해지고 있어서 그 전후 사정을 알 수 있다. 신라 활리역(活里驛) 사람 지귀(志鬼)는 선덕여왕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여 근심하고 눈물 흘려 그 모습이 초췌했다. 왕이 절에 행차하여 행향(行香)하려던 차에 소식을 듣고 그를 불렀다. 지귀는 절에 가서 탑 아래에서 어가의 행차를 기다리다가 홀연히 잠이 들었다. 왕은 팔찌를 빼어 그의 가슴에 얹어 두고는 궁중으로 돌아갔다. 얼마 뒤 잠을 깬 지귀는 심하게 번민하다가 이윽고 마음의 불이 일어나서 그 탑을 돌다가 곧 불귀신으로 변했다. 왕은 술사(術士)에게 명하여 주사(呪詞)를 짓게 하였다. “지귀 마음속의 불길이 몸을 태워 불귀신이 되었네. 멀리 푸른 바다 밖으로 내쫓아 보지도 않고 친하지도 않으리.” 당시의 풍속에 이 주사를 문 벽에 붙여 화재를 막았다고 한다. 이상이 지귀설화다. 나라 사람들로부터 성조황고(聖祖皇姑)로 불리던 선덕여왕,그 성스러운 임금 큰할머니도 지귀의 눈에는 오직 아름다운 여인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러기에 혼자서 사모하여 눈물지었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했던 여왕은 그를 영묘사로 불러 한 번 보고자 했고 지귀는 아름다운 여왕 만날 생각에 몇 날 밤을 설쳤을 법도 하지. 그러기에 어가 기다리다 잠이 들었지. 팔찌를 빼어 곤히 잠던 지귀의 가슴 위에 올려놓으며 여왕은 무슨 생각했을까? 잠든 지귀의 모습을 보면서. 잠에서 깨어난 지귀, 이미 여왕은 가고 팔찌만 남아, 이를 본 지귀 마음의 불타올라,사랑의 불길은 공든 탑도 태웠다. 이와 비슷한 모티브를 가진 설화는 이미 불전(佛典)에도 있었다. 곧 ‘대지도론(大智度論)’에 전하는 술파가(術波加)설화가 그것이다.
    김상현 전 동국대
    사학과 교수
    왕녀 구모두(拘牟頭)를 짝사랑 하던 어부 술파가(術波加)가 상사병으로 음식을 전폐하기에 이르자, 그의 어머니는 계략으로 왕녀의 관심을 끌고 아들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애원했다. 이에 왕녀는 천사(天祠)의 천상(天像) 뒤에서 만나자고 했다. 약속한 날 어부는 천상 뒤에서 기다렸고, 왕녀는 혼자 천사에 들어갔다. 이때 천신(天神)은 왕의 딸이 소인에게 훼욕 당하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어부를 깊은 잠에 빠뜨렸다. 왕녀는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는 어부에게 구슬목걸이를 벗어놓고 갔다. 잠에서 깨어나 목걸이를 본 어부는 마음속에서 일어난 음화(淫火)로 타 죽고 말았다. 이상은 술파가설화의 줄거리다. 지귀설화의 근원이 술파가설화에 있다는 견해가 있을 정도로 두 설화는 비슷하다. 구중궁궐의 여왕을 혼자서 사모하던 지귀,자신의 팔찌를 잠든 지귀의 가슴에 올려놓고 갔다는 선덕여왕, 그러나 결국 지귀는 정염(情炎)으로 불귀신이 되었다는 이 설화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꾸며낸 이야기 였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여왕을 짝사랑하다가 심화(心火)로 죽었다는 지귀의 슬픈 사연은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법보신문 Vol 1089         김상현 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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