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10. 황룡사 구층탑 건립

浮萍草 2013. 6. 1. 07:00
    여왕 권위 회복과 호국 의지 투영한 신라인의 염원 
    자장, 왕실요청에 급히 귀국 중국서 만난 신인 거론하며 80m 규모 목탑 건립 제안 선덕여왕 적극 수용해 완성
    자장 스님의 건의로 1년 만에 건립된 황룡사 9층탑은 1238년 몽골 침략 때 불타 버렸다. 사진은 황룡사구층목탑 터. 문화제청
    제공
    642년 8월 백제는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했고 고구려와 모의하여 신라가 당나라로 통하는 길목인 당항성(黨項城)까지도 위협했다. 고립무원의 신라는 사직의 보전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신라 조정에서는 김춘추를 고구려로 보내 군사원조를 청했지만 실패한다. 이듬해인 643년 정월 신라에서는 사신을 당나라로 보내 유학하고 있던 자장(慈藏)을 귀국시켜 줄 것을 황제에게 요청했다. 자장은 이해 3월에 급히 돌아왔다. 입당 전에 재상에 취임하라는 왕명까지 거절하면서 수행에 전념하던 자장,그가 서둘러 귀국한 것은 신라의 위기 상황 때문이었다. 자장은 일찍부터 수행의 목적을 이익중생(利益衆生)에 두고 있었다. 그는 깊은 산 속에 숨어서 수행에 몰두하고 있을 때,홀연히 공중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자기 홀로 착하기보다 바다와 같이 많은 사람들을 두루 구제함이 낫다”는 것이었다. 자장은 이로부터 산에서 나왔다. “자기 홀로 착하기보다 많은 사람들을 두루 구제함이 낫다.” 이것은 자장의 분명한 자각이고 확신이었다. 그가 급히 귀국 길에 올랐던 것도 이러한 확신과 무관하지 않다. 자장이 귀국하자 온 나라가 그를 환영했다. 왕은 그를 대국통(大國統)에 임명하고, 분황사(芬皇寺)에 주석토록 했으며 별도의 조용한 집을 짓고 따로 10명을 득도(得度)시켜 언제나 흡족하게 공급하여 시봉하도록 했다. 위기의 신라를 어떻게 구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던 자장은 귀국 즉시 국왕에게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자고 건의했다. 그는 선덕여왕에게 자신이 오대산 태화지에서 만났던 신인(神人)의 이야기를 했다. 자장이 중국의 오대산 태화지(太和池) 곁을 지날 때 홀연히 신인(神人)이 출현하여 물었다. “어떻게 이곳에 왔습니까?” 자장이 대답했다. “보리(菩提)를 구하려는 때문입니다.” 신인이 절하고 또 물었다. “당신 나라에 어떤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자장이 답했다.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했고 남으로 왜인(倭人)과 접하는데 고구려 백제 두 나라가 변경을 침략하여 이웃의 적이 횡행하는데, 이것이 백성들의 화란(禍亂)이 됩니다.” 신인이 말했다. “지금 당신 나라는 여자로 임금을 삼았기에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 나라가 도모하려는 것이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장이 물었다. “고국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하면 이익이 되겠습니까?” 신인이 말했다. “황룡사(黃龍寺)의 호법룡(護法龍)은 나의 장자로써 범왕(梵王)의 명령을 받고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 그 절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王業)이 오래 태평할 것입니다. 탑을 세운 뒤에는 팔관회(八關會)를 설하고 죄인을 용서하면 외적이 해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경기 남쪽의 언덕에 한 정사(精舍)를 짓고 함께 나의 복을 빌면 나도 또한 은덕을 갚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옥(玉)을 바치고는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자장은 귀국하기 전부터 고민하고 있었다. 어떻게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할 것인지를.신라가 직면한 위기의 책임을 선덕여왕에게 돌리는 여론이 있었다. 여왕은 위엄이 없어서 이웃 나라가 업신여겨 침략한다는 것이었다. 선덕여왕 12년(643) 9월 신라가 사신을 당에 파견해 군사 원조를 청했다. 당나라 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세 가지 계책을 제시했다. 다음은 그 중의 하나였다. “그대 나라는 부인을 임금으로 삼아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게 되고 임금의 도리를 잃고 도적을 불러들이게 되어 편안할 때가 없다. 내가 나의 친척 한사람을 보내어 그대 나라 임금으로 삼되,자신이 홀로 임금이 되기 어려우니 마땅히 군사를 보내어 호위를 하겠다. 그대 나라가 안정되기를 기다려 그대들에게 맡겨 스스로 지키게 하겠다.” 태종의 계책이란 신라를 병탄(倂呑)하려는 흉계를 표현한 것에 불과하고 여왕이 다스리는 신라를 그 자신이 업신여기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선덕여왕을 실주(失主)라고 하면서 그를 퇴위(退位)시키고 당나라 왕족 중의 한 사람을 왕위에 추대하여 당나라 군사를 신라에 주둔시키자는 당 태종의 제안이 신라 조정에 전해졌을 때 그 충격은 컸다. 여왕패위론(女王廢位論)은 신라의 국가 존립과 관련된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신라 조정의 국론(國論)은 분열되었다. 여왕폐위론에 맞서서 현 체제를 유지하려 했던 세력이 있었는데 김춘추와 김유신과 자장 등의 경우다. 그러나 국왕폐위론에 동조하는 세력도 있었다.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자장은 선덕여왕에 대한 국내외의 여론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왕을 면대해서 이를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자장은 쓴 약에 당의정을 바르듯 신인의 입을 빌려서 자신의 생각을 말했던 것이다. “신라는 여자로 임금을 삼았기에 덕은 있지만 위엄이 없어서 이웃 나라가 도모하려는 것입니다.” 선덕여왕은 듣기 거북한 자장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여러 신하들과 이 일을 의논했다. 신하들은 말했다. “백제로부터 공장(工匠)을 청한 뒤에야 가능할 것입니다.” 당시 신라에는 구층목탑을 세울만한 기술이 부족했던 것이다. 보물과 비단을 선물하면서 백제에 기술자를 청했고 아비지(阿非知)가 명을 받고 왔다. 김춘추의 아버지 용춘(龍春)이 소장(小匠) 200명을 인솔하여 이 공사를 주관했다. 처음 탑의 기둥을 세우던 날이다. 장인 아비지는 본국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고 의심이 생겨 일손을 멈추었다. 홀연히 대지가 진동하고 컴컴한 속에서 한 노승과 한 장사가 금당(金堂)의 문으로부터 나와서 그 기둥을 세우고 그들은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아비지는 뉘우치고 그 탑을 완성했다. 선덕여왕 14년(645) 3월이었다. 웅장한 탑과 사리신앙으로 ‘여왕무위론’ 등 여론 무마 신라왕실의 나라수호 의지 신앙과 연결돼 더욱 굳건
    황룡사 복원도.

    구층탑은 꼭 1년 만에 완공되었다. 국가 존망의 위기 상황 하에서 당시 해동 삼국에는 그 유래가 없던 거대한 9층 목탑을 그것도 백제 공장을 초청하면서까지 서둘러 세우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자장은 신인의 권위를 빌려서 선덕왕은 여자이기에 위엄이 없어서 이웃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고 한 태종의 말을 그대로 인용했다. 그리고 그는 여왕은 위엄이 없어서 그로 인해 초래된 난국을 구층탑의 건립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그가 역시 신인의 권위를 빌려서“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王業)이 오래 태평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 바로 그러한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 자장의 이와 같은 주장을 통해서 볼 때, 그가 비담의 경우와는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담은 여왕은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구실로 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자장은 그 누구보다도 선덕여왕의 편에 서서 그를 지지하고 옹호하려 했다. 이는 그의 귀국 후의 여러 활동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자장의 정치적 입장도 김춘추나 김유신 등과 같았다고 볼 수 있는데 구층탑의 건립 공사를 김춘추의 아버지 용춘(龍春)이 주관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장은 무엇 때문에 여왕의 권위와 구층탑의 건립을 관련지어서 생각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아마도 웅장한 탑의 모습이나 그 속에 봉안한 사리의 신성성에 의해서 왕실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려는 구상이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 탑은 높이가 225척(약 80m)이나 되는 거대한 9층 목탑이었고,계단을 따라서 9층까지 올라가서 사방을 조망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국가 존망의 위기 상황에서 이처럼 거대한 토목공사를 진행하게 된 데는 절실한 이유와 목적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당시에 대내외적으로 심각하게 문제되고 있던 여왕무위론(女王無威論),즉 여왕이기에 위엄이 없다는 여론을 구층탑의 건립을 통해서 해결해 보려는 의도였다.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거대한 목탑에 의지해서 다시 일으켜 세우고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9한이 와서 조공할 것,그리고 왕실의 태평 등 호국의 의지를 구층탑에 투영함으로써 당시 신라인의 염원까지도 이 탑의 건립을 통해서 표출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자장이 가지고 온 불사리의 일부를 봉안한 이 탑은 종교적인 신성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따라서 신라 불교신앙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신라에서의 불사리 신앙 사례는 일찍부터 있었다. 진흥왕 10년(549) 봄 양나라에서 신라의 유학승 각덕(覺德)과 사신 심호(沈湖) 편에 불사리를 보내주었다. 이 때 진흥왕은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興輪寺) 앞길에서 이를 맞이하도록 했을 정도로 불사리에 대한 신앙은 각별했던 것이다. 또 진흥왕 37년(576) 수나라로부터 귀국한 안홍(安弘)이 불사리를 가져왔고 자장이 가지고 온 불사리는 황룡사탑과 태화사탑, 그리고 통도사계단에 나누어 봉안했다. 황룡사 9층탑이 신라 불교신앙의 중요한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불사리의 봉안 때문이었다. 구층탑의 종교적 신성성은 찰리종(刹利種)으로 강조된 선덕여왕의 권위와도 곧 연결되는 것이었다. 자장은 탑을 세운 공덕을 호국적 기능으로 강조했다. 탑은 온갖 좋지 못한 일들을 없애고 그 나라를 외적으로부터 수호한다. 이것이 ‘무구정경(無垢淨經)’에서 설하고 있는 건탑의 공덕이다. 태화지변에서 만난 신인은 자장에게 황룡사에는 호법룡(護法龍)이 이 절을 수호하고 있다고 하면서 탑을 세워 나라의 안녕을 도모 하라고 했다. 신인의 이 말을 통해서 호국사상이 9층탑 건립의 불교사상적 배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불법을 수호하는 용이 지켜주고 있는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고 불사리를 봉안함으로 해서 나라를 수호하려는 의지를 신앙과 연결 지어 더욱 굳건히 했던 것이다.
    법보신문 Vol 1088         김상현 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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