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9. 신라 대야성이 무너지다

浮萍草 2013. 5. 25. 06:00
    도독에 아내 뺏긴 검일 신라 식량창고 불태우다
    원한으로 백제와 내통…김춘추 딸·사위도 사망 신라는 대야성 패배로 국경지역 대부분 상실
    대야성 인근에 위치한 합천 연호사와 함벽루. 연호사는 642년 와우선사가 대야성 싸움에서 숨진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과 장렬
    하게 전사한 장병 2000여의 영가를 위로하기 위한 사찰로 전해진다. 합천군 제공
    제 법왕이 즉위한 이듬해인 600년에 죽자 그 아들 장이 왕위를 이었는데 곧 무왕이다. 그는 풍채와 거동이 빼어났고 뜻과 기개가 호방하고 걸출했다. 그는 재위 42년 동안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춘 적이 없다. 그는 602년 8월 신라 아막성을 공격한 후 636년 5월까지 10회를 선제공격했다. 신라는 605년과 618년 두 차례 백제를 공격하는데 618년의 공격은 가잠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백제 무왕의 침공이 압도적이었던 셈이다. 611년(진평왕 33) 10월 백제군사가 가잠성을 포위하니,이 성의 현령 찬덕(讚德)은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100일 동안이나 굳건히 지켰다. 양식과 물이 다하자 시신을 먹고 오줌을 마시기까지 하면서 성이 함락되기 직전 찬덕은 외쳤다.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이 성을 되찾겠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찬덕의 아들 해론(奚論)은 618년(진평 40)에 금산(金山) 당주(幢主)가 되어 한산주 도독 변품(邊品)과 함께 가잠성을 수복하기 위해 백제와 싸웠다. 그는 여러 장수에게 말했다. “전일 나의 아버지가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오늘은 내가 죽을 날이다.” 그는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다가 죽었다. 사람들은 슬퍼하면서 장가(長歌)를 지어 조문했다. 616년 10월 백제가 신라 모산성을 공격했고 623년 가을에는 백제가 신라 늑도현을 공격했다. 624년(진평왕 46) 10월에 백제군사가 속함,앵잠,기잠,봉잠,기현,혈책 등 6성을 포위했다. 3성은 함락되거나 항복했지만,눌최는 봉잠,앵잠,기현 등 세 성의 군사를 합해서 굳게 지켰다. 구원병까지 돌아가 버린 상황에서도 성이 함락되는 순간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 626년 8월 백제, 신라 주재성 공격. 627년 7월 백제,신라의 서쪽 변방 2성 함락. 628년 2월 신라 가잠성 포위. 633년 8월 신라의 서쪽 변경 침략. 이처럼 백제 무왕은 신라를 자주 공격했다. 636년 5월 백제는 신라의 독산성을 공격하기 위해 장군 우소가 이끄는 군사 500명이 경주에 가까운 여근곡(女根谷)에까지 진출하여 매복했다. 642년은 신라 선덕여왕 11년이자 백제 의자왕이 즉위한 이듬해다. 이해 7월과 8월,백제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신라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백제의 의자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 온 7월에는 미후성(獼猴城) 등 서쪽의 40여 성을 함께 빼앗겼다. 8월에는 다시 장군 윤충(允忠)이 이끄는 1만의 백제군이 대야성을 공격해 왔다. 지금의 합천에 있던 대야성은 김춘추의 사위인 도독(都督) 김품석(金品釋)이 지키고 있었다. 성문을 굳게 지키며 결사 항전을 독려하고 있을 때, 성중의 식량창고에서 불길이 솟았다. 식량창고가 불타버리자 성안의 민심은 일변했고 신라군의 사기는 순식간에 꺾였다. 이 때였다. 품석의 보좌관 서천(西川)이 성에 올라가 소리쳤다. “만약 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면 성을 들어 항복하겠다.” 윤충이 큰 소리로 말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대와 우호를 함께 하겠다. 밝은 해를 두고 맹서하겠다.” 서천이 품석과 여러 장수에게 권하여 성을 나서려 했다. 이때 품석의 휘하에서 보좌역을 맡고 있던 죽죽(竹竹)이 말리며 말했다. “백제는 자주 번복을 잘 하는 나라임에 믿을 수 없습니다. 윤충의 말이 달콤한 것은 반드시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성을 나가면 반드시 적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쥐처럼 엎드려 삶을 구하기보다는 호랑이처럼 싸우다가 죽는 것이 낫습니다.” 신라 압도하게 된 백제 자만심에 빠지는 계기 궁지에 내몰린 신라는 당과 곧 군사동맹 체결
    대야성 전투성에서 순국한 신라충신 죽죽비. 합천군 제공

    품석이 죽죽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문을 열어 병졸을 먼저 내보내 보았다. 백제의 복병이 나타나 모두 죽였다. 먼저 나간 장수와 병졸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품석은 처자를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기록은 조금씩 달라, 검일이 품석 부부를 윽박질러 죽였다고도 하고,성을 나와 항복하는 품석과 그 처자를 윤충이 죽여 그 머리를 잘라 왕도(王都) 부여에 전했다고도 한다. 아무튼, 품석과 그의 처자의 목은 부여로 보내져 옥중에 묻히는 수모를 당했다. 마치 백제 성왕(聖王)을 참수하여 머리를 돌려주지 않았던 신라의 백 년 전 만행에 대한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죽죽은 남은 병사를 모아 성문을 닫고 대항했다. 사지 용석(龍石)이 죽죽에게 말했다. “지금 군대의 형세가 이러한데 반드시 온전할 수 없다. 항복하여 살아서 후일을 도모함만 같지 못하다.” 죽죽이 답했다. “그대의 말은 합당하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고 이름지어준 것은 나로 하여금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절조를 지켜서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말라고 한 것이니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살아서 항복하겠는가?” 드디어 힘써 싸워서 성이 함락되자 용석과 함께 죽었다. 사로잡힌 남녀 1천여명은 백제군에 의해 서쪽 주현(州縣)에 강제로 옮겨져 살게 되었다. 쉽게 대야성을 함락한 백제 장군 윤충은 그 공로로 말 20필과 곡식 1천섬을 받았다. 죽죽과 용석(龍石) 등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성이 함락되면서 전사했다. 왜 그랬을까? 왜 갑자기 대야성의 식량 창고에 불이 났을까? 그 불은 백제군과 내통한 검일과 모척이 일부러 지른 것이었다. 사지(舍知) 검일(黔日)은 본래 품석의 막료(幕僚)였다. 그런데 도독 김품석에게 그의 예쁜 아내를 빼앗겼다. 도독 품석을 향한 검일의 분노는 쌓여갔고 한으로 응축되고 있었다. 이럴 무렵 백제가 침략해 왔고 검일은 백제군과 몰래 내통하고 창고를 불태웠던 것이다. 그것도 식량 창고를.대야성에 치솟은 불길 그것은 분노의 불길이었다. 사무친 검일의 원한이 불길로 화한 것이었다. 사위 품석과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의 머리를 잘라 부여로 가져갔다는 그 참혹한 소식은 김춘추에게 크나큰 한을 안겨주었다.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서서 사람이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그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춘추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은 시작된다. 적지 고구려로 향하고 바다 건너 일본을 오갔던 외교적 노력은 실패했지만 당 태종을 만나 20만 구원군을 약속받는데 성공했다. 동분서주하기 6년만인 진덕여왕 2년(648)의 일이다. 대야성 전투의 패배로 궁지에 몰린 신라는 서부 국경지역의 대부분을 상실한 채 백제에 대한 방어선을 지금의 경산인 압량으로까지 후퇴해야 했다. 압량주(押梁州)를 새로 설치하고 김유신(金庾信)을 군주에 임명하여 전열을 가다듬게 했다. 648년 4월 김유신은 옥문곡(玉門谷)전투에서 크게 이겨 군사 1천 명을 베고 의직(義直) 등 백제 장군 8명을 사로잡았다. 이에 김유신은 사로잡은 백제 장군 8명과 품석 부부의 시신과의 교환을 제의했다. 백제에서는 품석 부부의 뼈를 파내어 관에 넣어 보냈고 유신은 8명의 백제 장수를 보내주었다. 대야성 전투의 패배로 인한 신라의 위기상황,이를 타개하는 과정에서 김춘추와 김유신은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부각되고 654년 3월 에는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 642년 8월의 대야성 전투,이 전투는 삼국항쟁의 여러 전투 중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신라를 압도하게 된 백제의 의자왕은 자만심에 빠지게 되었고,위기에 몰린 신라는 자구책(自救策)으로 당나라와의 군사동맹을 맺게 되었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활동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도 대야성의 함락이었다. 이 때문에 신라의 대야성이 백제에 함락된 642년을 삼국통일전쟁의 시발점으로 보려는 견해도 나타나게 되었다. 660년 7월13일 의자왕의 아들 융(隆)이 항복하자 신라의 태자 법민(法敏)은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말했다. “전날 너의 아버지가 나의 누이동생을 부당하게 죽여 감옥 안에 묻었다. 이 때문에 나는 20년 동안이나 마음이 아팠고 머리를 앓았다.” 이처럼 대야성의 함락은 김춘추 가문의 수치였고 신라의 치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야성 참패의 배경에는 막료의 아내를 빼앗은 도독 품석의 패륜과 예쁜 아내를 빼앗긴 검일의 분노가 엉켜있었다. 660년 8월2일. 백제 정벌을 기념하여 축하연을 버리던 바로 그날 백제로 도망쳤던 모척과 검일을 붙잡아 처형했다. 검일과 함께 대야성 함락에 일조를 했던 모척은 참수형(斬首刑)에 처했지만 주모자 검일은 더 참혹한 거열형(車裂刑)을 집행했다. 사지(四肢)를 네 수레에 각각 매달고 말을 달리게 하여 사지를 찢는 가장 잔혹한 형벌이 거열형이다. 검일에게는 형을 집행하기에 앞서 죄목을 하나하나 말하였다.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를 불 질러 없앰으로서 온 성안에 식량이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요,품석 부부를 윽박질러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며,백제와 더불어 본국을 공격하였으니 그것이 세 번 째 죄이다.” 마침내 검일의 사지를 찢어 강물에 던졌다. 검일과 미모의 아내.남의 아내를 탐낸 도독 품석.분노하는 검일.백제군의 대야성 공격.검일과 모척의 배신.목이 잘려 백제의 옥중에 묻힌 품석 부부.김춘추의 한이 된 딸 고타소랑의 참혹한 죽음.나당연합군의 백제 정복.모척을 참수하고 검일의 사지를 찢어 강물에 던짐.이 모두가 활활 타는 분노와 원한의 불길이었다. 그 불길은 전쟁이 되고 전쟁의 불길은 다시 사람들을 삼키고 있었다. “보라! 모든 것은 지금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눈이 타고 있다. 눈에 비치는 형상이 타고 있다. 그 형상을 인식하는 생각도 타고 있다. 눈으로 보아서 생기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모두 타고 있다. 그것은 무엇으로 인해 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 노여움의 불, 어리석음의 불로 인해 타고
    법보신문 Vol 1087         김상현 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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