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우리 茶 이야기

22 조선 후기 차문화사 〈5〉

浮萍草 2013. 8. 27. 07:00
    범해스님 초의 茶風 이어
    차의 약리적 효능 ‘기록’
    해스님(梵海 : 1820~1896)은 초의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다풍을 이어받았다. 해남 대흥사에서 초의스님을 시봉하며 수행했고 당대 강백으로 잘 알려져 있다. 범해스님이 지은 다시(茶詩)는 차를 만드는 초의스님을 가장 근거리에서 지켜본 터라,상당히 세심한 면모가 담겼다. 범해스님의 시 ‘초의차’다. ‘곡우 초에 맑은 날 누른 싹잎은 아직 피지도 않았는데 빈 큰 솥에서 정성스레 덖어내어 밀실에서 알맞게 말린다네. 잣나무 상자에 네모와 둥근 도장 찍고 죽순껍질로 싸고 잘라서 바깥바람 엄하게 막아 간수하니 찻잔에는 가득한 향기가 감도네.’ 하동 쌍계사 조실 고산스님은 <다도의범>에서 범해스님의 시와 글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초의차’와 관련“스승이 차를 솥에다 덖어내고 말리는 모습,둥근 단차와 네모난 전차로 찍어내는 모습,죽순껍질로 잘 싸서 바람이 들지 않는 곳에 엄하게 간수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제자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며 이처럼 정성스럽게 만든 차이기에 마지막 구절에‘찻잔에 감도는 가득한 향기’의 소중함과 깊이를 더욱 실감나게 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범해스님의 글 가운데는 차의 약리적 효능을 세밀하게 기록한 ‘다약설(茶藥說)’이 있다. 스님 자신이 직접 이질에 걸려서 생사를 헤매다 차를 통해 치유한 이야기를 실감나게 실었다. ‘내가 임자년(1852) 가을 남암(南庵)에 주석할 때 이질로 인해 사지가 처지고 삼시 세끼를 잊음이 열흘을 끄니,스스로 반드시 죽을 줄 알았다. 하루는 같이 공부한 무위(無爲) 형이라 부르는 이가 양친을 모시다가 오고,같이 승려 일을 하는 당인(當仁)이라는 아우 역시 스승을 모시다가 둘이 같이 와서 머리를 좌우로 들어 목뼈의 혈을 분위해 짚어주니 스스로 반드시 살 것을 알았다. 조금 지나 무위 형이 말했다. “내가 냉차(冷茶)로 어머니가 위기에 처하셨을 때 구한 적이 있으니 급히 차를 다려 써야겠네.” 이 말을 들은 당인 아우가 말하였다. “내가 싹차(芽茶)를 가지고 다니면서 불시에 필요할 때 쓰려고 대비한 게 있으니 이걸 쓰시오.” 말과 같이 차를 다리고 쓰니 한 잔에 복심(腹心)이 조금 편하고 두 잔에 정신이 상쾌해지고,서너 잔에 온몸에 땀이 흘러 청풍(淸風)이 뼈에 불어오는 듯 시원하여 처음부터 병이 없는 것 같았다….’ 이처럼 단순히 맛을 음미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차의 약효를 강조하는 글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유용한 건강정보가 된다. 초의스님 역시 우리차의 맛이나 약효가 중국의 차에 뒤지지 않는다고 예찬했다. 스님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차도 그 근본은 중국차와 서로 같아서 빛깔이나 향,기운과 맛, 효능은 매한가지다. 육안차은 맛이 좋고 몽산차는 약효가 좋다고 했는데 우리차는 두가지를 겸비하였다”고 했다. 영험한 산인 지리산의 차가 가장 우수하다는 말도 자주 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천하의 좋은 차를 속된 솜씨로 버려놓았다”며 일부 스님들의 차 다루는 솜씨를 비판했다. 어떻게 하면 스님들에게 차를 만들고 마시는 법을 제대로 알려줄 수 있을까는 초의스님에겐 큰 화두였던 것 같다.
    불교신문 Vol 2477         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