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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조선 후기 차문화사〈2〉

浮萍草 2013. 8. 6. 07:00
    선 후기 궁중의 차문화는 의식다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왜란과 호란으로 인해 중국 사신의 왕래가 잦았다. 
    특히 임난 때는 중국 사신 뿐만아니라 파견된 장군과 관리들의 내왕이 계속됐다. 
    이러한 만남 속에서 행해진 다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류건집 원광대 교수가 저술한 <한국의 차문화사>에 따르면 ‘선조실록’에 나오는 다례만도 200여회 이상 행했다. 
    종묘나 기타 제의에 수반되는 다례와 상례 때 행한 다례는 쉼없이 계속됐다. 
    혼전(魂殿)에 수시로 시행한 별다례(別茶禮)부터 가묘 친제의 다례에다가 궁중에 모신 영위에 올리는 주다례(晝茶禮)는 거의 일상적
    으로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조선 후기 궁중에서는 어떤 차를 주로 올렸을까. 
    17세기를 지나면서 궁중행사의 차는 인삼차로 자리잡았다. 
    선조 40년(1607) 4월에 각 관서의 인삼 공납문제를 말하면서 삼을 차로 쓰는 문제가 논의됐다. 
    또 인조 2년(1624) 5월에는 임금이 다삼(茶蔘)을 내렸다고 한다. 
    현종 원년(1659) 10월과 숙종 46년(1720) 6월에도 임금에게 황기인삼차와 다삼을 올렸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개인적인 차생활은 일상약용을 겸한 대용차를 만들어 마시면서 건강을 돌보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ㆍ왕실 중심으로 다례의식 발전 
    사헌부 茶時 행하며 업무논의
    전란으로 인해 차가 귀해지면서 한때 궁중에서도 대비전 이외에는 차를 올리지 못하게 저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기록에는 금나라에 천지차와 작설차를 50봉씩 보냈다는 기록도 전해져 차생산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었다. 궁중의 의례에서 차를 쓸때는 반드시 다명(茶名)을 기록하게 했고 궁중 혜민국 소속에 다모간(茶母間)이라는 공간도 존재했다. 한때 금주령이 내려져 궁중에서 유독 많은 차를 쓴 일도 있었다. 임금은 물론 세자나 왕손들의 교육에서도 차는 일상화됐다. 시문과 풍류를 곁들여서 다정(茶亭)을 짓고 차를 마시게 했다. 서울 창경궁 후원에 지금도 남아있는 옥류천과 그 위쪽의 청심정이 바로 다정이다. 주련은 다시(茶詩)로 꾸며지고 바로 앞에는 사방 넉자의 네모난 돌로 된 수조가 있는데 한면의 중앙에서 천숫물을 뿜게 만들었다. 이처럼 궁중에서의 차문화는 왕성하게 활기를 띠다가 어려움에 봉착하여 발전을 더디게 만들기도 했다. 류건집 교수에 따르면 고종 21년(1884)에 왕이“농상과 직조 도자기와 벽돌 굽는 일,목축,제지,제다는 모두 국가 경상비용에 관계가 있어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니 새로 담당하는 국(局)을 설치하여 관원을 두고 제반 조치를 하여 품처하라”고 했다. 이 사안은 결국 현실화되지 못했다. 류 교수는“만약 그 때라도 그런 제도가 잘 시행됐다면 우리 차문화는 좀더 뚜렷하게 발전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한편 사헌부에서는 거의 매일 벼슬아치들이 모여 앉아 차를 마시며 업무를 논의하는 다시(茶時)를 시행했다. ‘승정원일기’나 ‘일성록’에도 다시가 시행됐음이 기록돼 있다. 행여 대사간이 공석이거나 참석하지 못하면 감찰 주도하에 다시를 시행하겠다는 계를 올리고 다시를 행했다고 하니 다시 시행의 중요성을 짐작할 만하다. 다시의 시행을 감시하는 ‘감다(監茶)’라는 절차를 두어서 행함에 있어 잘못을 범하면 벌을 주기도 했다.
    불교신문 Vol 2471         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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