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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조선 후기 차문화사 〈3〉

浮萍草 2013. 8. 13. 07:00
    선 후기는 ‘다도(茶道)의 황금기’라 불릴 만하다. 
    유배지에서 다도에 매료된 다산(茶山) 정약용,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금석학의 최고봉인 추사(秋史) 김정희 등은 조선 
    후기 차문화사의 주인공들이다. 
    이들 다인들의 삶의 자취와 문학의 흥취는 이후 다도사의 귀중한 자산으로 전해온다. 
    다산 정약용(1762~1836). 1801년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으로 강진으로 유배됐다. 
    18년간 강진서 유배생활을 하는 와중에 다산은 <목민심서><흠흠신서><경세유표> 등 500여권에 달하는 실학 명저를 남겼다. 
    다시집인 <다합시첩(茶盒試帖)> 역시 이 때 지어졌다. 
    다산이 차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유배생활 4년만에 만덕산 백련사의 혜장스님을 만나면서부터다. 
    유불(儒彿)의 만남을 통해 다산은 혜장스님에게 다도를 터득해 나갔다. 
    혜장은 다산에게 주역의 원리를 배우기도 했다. 
    차를 구걸하는 ‘걸명소’와 같은 재미난 시 작품도 이 시기에 다산이 혜장스님에게 보낸 것이다. 
    ‘
    다도의 황금시대’로 불릴 만 
    초의 정약용 등 차인들 나와 
    쌍계사 조실 고산스님이 저술한 <다도의범>에 따르면 1805년(순조 5) 다산이 차를 얻기 위해 임금에게 올리는 ‘소(疎)’자를 붙인 ‘걸명소’를 지어서 혜장스님에게 전했다. ‘걸명소’에서 다산은 “나는 요즘 차를 탐식하고 겸하여 약으로 마신다오. …나무도 하지 못할 깊은 병이 들어 애오라지 차를 구걸할 분이오. 듣건대 고해(苦海)를 건너려면 명산의 고액(膏液)이자 풀 중의 영약으로 으뜸인 차를 베풀어주는 것이 가장 큰 시주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뜻을 헤아려 달빛과 같은 은혜를 아끼지 말기 바라오…”라고 했다. 혜장스님으로부터 구걸한 차를 기증받고 소회를 노래한‘기증혜장상인걸명(寄贈惠藏上人乞茗)’이란 시는 다산 특유의 위트가 가미돼 있다. “…궁한 이는 채식이 버릇되어 노린내 나는 고기는 생각없고, 돼지고기 닭죽 같은 호사한 음식 먹기가 아득하다. …바라오니 스님 숨에 자란 차 육우의 차솥에 조금만 채워주소서. 베풀어주시면 내 병 고쳐주고 나룻배로 건너줌과 어찌 다르리.” 이 무렵에 다산은 혜장스님을 통해 해남 대흥사에 주석하던 초의스님을 알게 된다. 또한 초의스님은 다산의 아들을 통해 추사를 만나게 되어 세 사람은 다도사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다산은 초의스님이 백련사에 머물때부터 서로 왕래했고 초의스님이 대흥사로 처소를 옮긴 뒤에도 계속 왕래하며 다도의 정수를 습득하고 두터운 정을 쌓았다. 고산스님은 <다도의범>에서 초의스님의‘동다송(東茶頌)’에 현전하지 않는 다산의‘동다기(東茶記)’가 인용돼 있다고 소개했다. ‘동다기’에는“어떤 이는 의심하기를 우리나라 차의 효능이 중국보다 못하다고 하는데,내가 보기에는 색과 향과 맛이 조금도 차이가 없다”라고 기술돼 있다. 우리차의 우수성을 예찬한 다산의 심정이 담긴 구절이다. 이외에 다산은 동자승이 차를 끓이며 졸고 있는 차 부뚜막을 바라보며‘차는 끓고 산(山)의 동자승은 졸고 있는데 간들거리는 연기는 오히려 절로 푸르구나…’라는 시를 읊기도 했다. 하루하루 마음을 졸이면서 보내게 되는 유배생활. 불안초조한 나날들이 다산에게 있어서는 차의 맛과 향,멋과 정취에 빠져 되레 ‘극락’과 같은 귀양이 된 셈이다.
    불교신문 Vol 2473         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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