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우리 茶 이야기

18 조선 후기 차문화사 〈1〉

浮萍草 2013. 7. 30. 07:00
    ㆍ왜란.호란 겪으며 경작지 급감
    정선 김홍도는 많은 다화 남겨
    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양 난을 치르면서 경작면적은 급감했다. 기근과 질병까지 겹쳐 농민들이 삶은 피폐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토지개간 및 새로운 농기구의 발명과 이앙농법 개발 등으로 17세기 들어 농업에 활기가 띠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농(茶農)은 달랐다. 차 생산은 상당부분 전문영역이기에 어려움이 남달랐다. 류건집 원광대 교수는 ‘한국의 차문화사’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통문관지>에 따르면 사신들이 왕래에 의해 상당량의 차가 공식으로 오가고, 부족한 것은 수행하는 상인들에 의해 거래되어 다른 상품과 함께 들여오기도 했다. 중국에 들어간 우리 사행에 일정량의 차를 조참이나 하정 때 내렸는데 이 시기에 오면 중국의 차 인심도 각박해져 그 양이 줄었다.” 임진왜란 후 일본과 국교가 회복되면서 사신들이 오면 동래부에서 다례를 행하기도 했다. 또한 왕실이나 공식적 의례에서는 차의 수요가 줄지 않았지만 전란 전에 비해 민간의 차생활은 위축되었다. 고려 말부터 다농들이 어려워지고 이농현상이 많아지면서 차의 생산이 조금씩 위축되다 오랫동안 난리를 겪으면서 일반 다농들은 얼마 남지 않게 된다. 류 교수에 따르면 추사가 권돈인에게 보낸 글속에‘자신의 글씨를 좋아하는 남쪽 사람들에게 글씨를 써주면 차를 구할 수 있을 터 이니 심려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 이런 가운데 점차적으로 차 생산은 회복단계에 접어들었다. 국가의 의례나 개인의 제의에는 종전과 같이 차를 쓰게 됐다. 특히 일본과는 대마도를 통해서 교류가 잦아져서 차도구가 많이 거래됐다. 우리차의 품질이 좋아 외국인으로부터 그 향미를 높게 평가받기도 했다. 차의 품질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 이규보와 같은 차인을 통해 우수성이 입증되었다. 류 교수는“조선 후기 접어들면서 ‘다기(茶記)’에서 우리차의 좋은 점을 기록했고 초기의 ‘동다송(東茶頌)’에서 남쪽 스님들 사이에 차 마시는 일이 많고 그 질도 좋다고 나와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 차는 원래 중국과 같은 것. 색 향 미 다 갖추었네. 육안의 맛 몽산의 약효, 모두 겸했다 옛사람 일렀다네.’ ‘동다송’의 한 구절이다. 이는 지금도 남쪽의 일부 제다업자나 선가에서 전래해오는 우리 고유의 방식으로 정성들에 법제한 차를 마셔보면 외국의 어떤 차라도 가질 수 없는 방향(芳香)과 고아한 색,청순한 맛을 느낄 수 있으니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는 게 류 교수의 설명이다. 조선 후기부터는 실학파 학자들도 차를 즐기며 차에 관한 기록을 많이 남겼다.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등의 출중한 화가들이 실경산수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다화(茶畵)를 남겼다. 이들 화가가 지향하는 바가 관념적인 이념의 세계가 아니고 실제의 생활을 모델로 한 기록화이기 때문에 당시 선비사회에서 차가 얼마나 뿌리깊게 박혀 있는가를 보여준다. 18세기 들어가면서 다음 시대에 차문화를 꽃피울 인물들이 속속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불교신문 Vol 2469         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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