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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조선 전기 차문화사 〈上〉

浮萍草 2013. 7. 9. 07:00
    억불에 따라 사원 차문화 위축
    선의 차문화계에는 선비들의 진출이 현저하다. 
    억불책이 사원의 차문화를 위축시킨 원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유교와 불교 양측에서 상호 보완의 형태로 차문화가 발전되었다. 
    조선은 상대 교역국이 주로 명나라였기 때문에 차 역시 고려의 연고차 형태에서 산차(散茶)로 옮겨갔다. 
    류건집 원광대 석좌교수는“조선 초기는 고려의 제도나 다풍을 이어받아 사헌부에서 다시(茶時)를 행하는 제도도 있었고 다모(茶母)
    라는 직책도 생겨났다”며“궁내의 제례는 물론 사가(私家)에서도 제사 때 차를 올렸고 분청사기라는 새로운 형태의 다기(茶器)들이 
    생산됐다”고 했다. 
    류 교수는 <한국차문화사>에서 국가의 근간이 유교사상으로 정립된 조선은 불교가 배척의 대상이 되면서 차문화계에 불행을 야기
    시켰다고 밝혔다. 
    그는 “전대에 차의 중심에 서 있던 선가(禪家)가 그 재력과 인력을 잃어버리고 차의 생산과 보급은 물론 깊은 정신문화의 보급에 
    차질을 주는 위기를 맞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려의 차 행사가 주로 사찰을 중심으로 이뤄진 반면 조선은 서서히 왕실의 종묘나 봉선다례를 위주로 변모됐다. 
    찻일이 사찰보다는 왕실 제례나 사신맞이 행사에서 자주 나타났다. 
    조선시대 제도적 다례의 가장 중요한 몫을 담당했던 사신영접 다례는 사신이 오는 길목에서 행해진 원접다례가 있고,수도에 들어온 
    후에는 왕이 직접 사신을 접대하는 다례로 태평관에서 행한 친림다례와 인정전에서 행한 접견다례 등을 들 수 있다. 
    의식규범은 다음과 같다. 
    ‘북쪽 벽에는 중국의 정사(正使)와 부사(副使)가 붉은 의자에 앉고 서쪽 벽에는 조선의 원접사와 영위사가 검은 의자에 앉게 된다. 
    대청의 기둥 밖 가까운 곳에 남북향으로 찻상을 놓고 주석으로 만든 차병을 만든 집사 한 명과 각기 찻종을 받는 네 명이 동서의 기둥
    으로부터 들어와서 찻상 앞에 선다. 
    찻종을 받는 사람은 각기 찻종으로 차를 받고 잠시 꿇어 앉았다가 올리면 사신들은 모두 내려와 선 채로 찻종을 잡는다. 
    사신들이 차 마시기를 끝내면 집사는 꿇어앉아서 찻종을 받는다.’ 
    이외에도 왕이 인정전에서 사신을 맞이하던 접견다례는 더욱 엄격하고 복잡한 절차로 진행됐다.
     접견다례에서는 인정전의 대궐마당을 깨끗이 치우고 왕과 왕세자,신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중국의 정.부 칙사에게 차를 접대하며 
    손님을 맞이하는 예를 나누었다.
    왕실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차와 관련된 일뿐만 아니라 술,채소,과일,약 등의 일을 주관하던 관청을 ‘다방(茶房)’이라 칭했다. 
    이 제도는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어 다방은 이조의 내시부에 소속되면서 차의 공급과 외국 사신의 접대를 맡았다. 
    조선시대에는 특히 유학자들이 차를 많이 즐겼다. 
    선비다풍이 심오한 정신세계에 영향을 주어 그들의 도학정신과 안빈낙도의 사상이 차의 정신과 결부됐다. 
    이 때에 김시습,남효온,정희량 등의 차인들이 나와 노장사상에 심취해서 도학과 차,현묘한 선사상을 조화시켜 새로운 정신세계를 
    창출했다.
    
    불교신문 Vol 2463         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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