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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통일신라의 차문화〈下〉

浮萍草 2013. 6. 11. 07:00
    가 ‘제망매가’로 유명한 월명스님과 ‘찬기파랑가’ ‘안민가’로 잘 알려진 충담스님은 통일신라 차문화사에도 빼놓을 수 없는 ‘다인
    (茶人)’이다. 
    월명스님은 경덕왕 19년 4월에 두 해가 열흘간 없어지지 않자,왕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도솔가’를 지어 괴변을 없앴다. 
    다음은 류건집 원광대 석좌교수의‘한국차문화사’에서 발췌한 ‘삼국유사’의 내용이다. 
    ‘월명이 임금께 아뢰기를 “빈도는 국선의 무리에 속해서 향가만 알 뿐 불가의 노래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인연이 있는 스님으로 뽑혔으니 향가라도 좋다.” 
    이에 월명은 도솔가를 지어 노래로 만들었다.
    (중략) 
    조금 후에 일괴(日怪)가 사라졌다.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차의 도구 한 벌과 수정염주 108개를 주었다.’ 
    이같은 내용을 보면 당시 스님들이 다구 몇 벌씩은 가지고 차를 마실 정도로 음다문화가 횡행했음을 알 수 있다. 
    충담스님의 ‘안민가’에 얽힌 차 이야기 역시 다음과 같은 ‘삼국유사’에 전한다. 
    3월 삼짇날 왕이 귀정문의 누각 위에 나가서 옆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누가 길에서 위엄과 풍모가 있는 스님 한 사람을 데려 올 수 
    있는가?”라고 했다. 
    이 때 마침 위엄과 풍모를 갖춘 깨끗한 스님이 한가로이 걸어가고 있었다. 
    신하들이 그를 데리고 가서 뵙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말한 위의를 갖춘 스님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돌려보냈다. 
    
    ㆍ월명ㆍ충담스님은 걸출한 차인 
    왕과 교류하며 노래 만들기도
    다시 한 스님이 가사를 걸치고 앵통을 메고 남쪽으로 오고 있었다. 임금이 그를 보고 기뻐하며 누각에 오르도록 했다. 통안을 살펴보니 다구가 가득 들어 있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는 누구인가?” 스님이 아뢰기를, “소승은 충담이라 합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소승은 매년 중삼일(重三日)과 중구일(重九日)에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차를 달여 올리는데 지금도 차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 입니다.” 임금이 말하기를“나에게도 차 한잔을 나누어 줄 수 있는가?” 스님은 이에 차를 끓여 올렸는데, 잔에서 향기가 풍겼다. 임금이 이르기를, “짐은 일찍이 대사가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의 뜻이 매우 높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런가?” “그렇습니다.” 임금은 “그러면 짐을 위해 ‘안민가’를 지어보라.” 충담은 바로 왕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올렸다. 왕이 아름답게 여겨 왕사로 봉했으니 그는 삼가 재배하고 간곡히 사양해 받지 않았다. 그 유명한 ‘안민가’가 탄생한 순간이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 주는 어머니며, 백성은 어린아이라고 여기면 모든 백성들이 사랑을 알 것입니다. 꾸물거리며 살아가는 중생 이들을 먹여 다스려서 그들이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랴하면 나라가 잘 보전될 것입니다.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하면 나라가 태평해질 것입니다.’ 류건집 교수는“충담스님의 이같이 다성(茶性)을 터득하여 실생활에 반영하고 휴대용 다구로 부처님께 차를 올릴 뿐만 아니라,언제 어디서나 차를 마시는 정도면 당시의 차는 궁궐이나 승려 및 귀족들에게 그야말로 항다반사(恒茶飯事)가 아닐 수 없다”고 평했다.
    불교신문 Vol 2456         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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