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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통일신라의 차문화 〈上〉

浮萍草 2013. 5. 28. 07:00
    일신라 당시 중국을 다녀온 스님들은 신라문화 특히 신라의 차문화에 이바지했다. 
    당시 당나라에는 무측천이 등장하여 용문석굴을 조성했고 백장회해의‘백장청규’가 나오고 조주종심이 선대행을 하는 등 불교가 크게 
    융성했다. 
    육우가 ‘다경’을 쓰고 노동이 ‘다시’를 썼으며 안진경, 백거이, 한유, 온정균, 피일휴 등의 차인들이 왕성하게 활동했다. 
    중국서 돌아온 선비와 학자들은 의식부터 생활까지 모두 차를 가까이 했다. 
    스님들은 구산선문을 열면서 사원의 생활을 곧 차생활로 연결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건축불사도 줄을 이었다. 
    676년 부석사 낙산사를 시작으로 해서 사천왕사, 감은사, 백율사, 감산사, 봉덕사, 불국사, 단속사, 봉은사, 해인사 범어사 등이 창건
    됐다. 
    잇따른 도량건립에 맞춰 차문화의 발전도 동반됐다. 원광디지털대학교 류건집 교수는 이같은 사실을 실례를 들어 밝힌 바 있다.
    “불국사 대웅전 뒤에 다당의 자리가 남아있고, 석굴암의 벽면에 부조된 보설의 손에 들고 있는 손지름 반 정도의 보발(寶鉢)이 있다. 
    부처님의 손에 들린 찻잔은 짧은 기간의 음다문화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신성한 신앙의 대상에 찻잔을 조각한다는 것은 오랜 세월동안 뿌리깊에 음다문화가 자리잡았음을 말해준다.”
    류 교수는“이같은 경로를 밟아 차문화는 장족의 발전을 했다”면서“설총의‘계왕서(戒王書),월명사의‘다습(茶襲)’,충담의‘다통(茶筒)’, 
    한송정의‘유적(遺蹟)’ 등의 기록이 남았고 거기에 진감국사나 최치원 등의 차인이 배출되었다”고 설명했다.
    
    ㆍ구산선문 열며 차생활 일조 
    茶僧 등장하고 茶所 생겨나
    통일신라는 차문화가 번성하면서 도기문화도 함께 발전됐다. 연질도기(土器)와 유약을 칠한 찻그릇도 이 당시 만들어졌다. 임해전지의 안압지에서 출토된 언정차영(言貞茶榮)의 찻잔 등은 한 예다. 통일신라는 이외에도 백제와 고구려의 음다풍습과 제반문물을 자연스럽게 계승했다. 선왕들의 제례에 차를 올리고 불사가 이어져 차는 여염으로까지 널리 퍼졌다. 왕궁과 사찰에서 차를 마시니 자연스럽게 백성들도 따르게 된 것이다. 또 불전과 조상신에게 차를 쓰니 다른 제사에도 차를 올렸고 차문화는 급속도로 대중화 물결을 탔다. 화랑들은 명산승지를 다니면서 음다풍류의 선적을 남겨 지금까지 전한다. 월명사나 진감국사와 같은 ‘다승(茶僧)’이 등장했고 ‘다연원(茶淵院)’이라 불리는 ‘다소(茶所)’까지 있었다. 물론 우리의 차문화가 중국의 영향을 일방적으로 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 차의 품종이나 다법도 중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천(四川)의 다사(茶史)에 큰 별로 남은 무상스님과 중국 지장신앙의 근간이 된 지장 김교각 스님 등은 모두 왕실의 신분으로 입당 해서 불교사는 물론 다사에도 빛나는 업적을 남긴 이들이다. 한중(韓中)간의 왕성한 문화교우가 이어지면서 당시는 차가 양국 모두에게 기호음료로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획을 긋는 시기가 됐다. 중국에서는 심지어 사상 최초로 다세가 부과됐고,다마무역(茶馬貿易)이 성행하여 차에 대한 경제적 비중이 크게 늘었다. 수많은 다시가 쓰여졌고 황실에서는 좋은 차맛을 겨루는 ‘명전(茗戰)’의식이 행해질 정도였다.
    불교신문 Vol 2452         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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