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우리 茶 이야기

7 신라의 차문화

浮萍草 2013. 5. 14. 07:00
    라의 화랑들은 차를 즐기며 심신을 단련했다. 
    사료에 따르면 화랑은 호방한 기개로 자연속에 노닐며 드높은 이상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바치는 풍류도다. 
    세속을 초탈한 초연한 마음도 깔려 있다. 
    화랑들이 음다문화가 활발한 이유도 가는 곳마다 차를 마시고 서로 권면하며 덕목을 쌓았기 때문이다. 
    차를 마시면서 마음공부를 하고 군자행, 곧 정행검덕(精行儉德)을 수행했다. 
    조선시대 홍만종이 인물들의 사적(事蹟)을 엮은 <해동이적(海東異蹟)>에는 화랑들의 행적이 상세하게 실려 있다. 
    이 책에 따르면 화랑들은 동해안 최남단 언양을 시작으로 경주 남산을 거쳐 북쪽으로 금강산에 이르고 서쪽으로 바다에 접하고 내륙
    으로 태백산맥의 깊은 곳까지 다니면서 심신을 단련했다. 
    묘련사의 석지조나 한송정의 다천(茶泉), 석구(石臼) 등으로 미뤄어 볼 때 차를 일상에서 즐겨 마셨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 고려의 문인 이곡이 지은 동유기에는 ‘화랑들은 차를 나누어 마시며 서로 강하게 결속하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예로써 화합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화랑들이 사용하던 차도구가 동해 바닷가 여러 곳에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도 실려 있다. 
    신라에는 화랑 뿐만아니라 불교의 헌다의식이 성행하면서 차문화가 보편화됐다. 
    불교의 융성과 귀족사회의 발전으로 사회 전반에 차문화가 보급됐다. 
    연등제 등 국가행사에 헌다의식이 널리 행해졌고 귀족이나 관리,문인들의 생활과 스님들의 수행생활에도 차문화가 자리잡고 있었다. 
    원효스님과 사포성인의 차생활에 관한 일화는 유명하다. 
    
    ㆍ화랑들, 차 즐기며 ‘심신단련’ 
    연등제 등 국가행사에도 헌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의 ‘남행일월기’에 있는 원효방에 관한 대목을 소개한다. ‘경신년 8월20일…원효방에 이르렀다. 암자가 하나 있는데 세상에서 말하기를 사포성인이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 원효스님을 사포가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스님께 드리려 하였지만 샘물이 없어 안타까워할 때 물이 바위틈에서 갑자기 솟아 나왔다고 한다. 맛이 매우 달고 젖과 같아서 늘 차를 끓였다고 한다…’ 이외에 <삼국유사>에 따르면 화랑출신의 월명스님은 경덕왕 19년(760) 나라에 두 개의 해가 나타나는 괴변이 일어나자‘도솔가’ 를 불러 이를 물리치고 왕으로부터 ‘차 품평기구’ 한 벌과 수정 염주 108개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우리 차의 역사에서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중국의 명차라고 불리는 ‘구화산차’에 대한 것이다. 당시 신라에서는 많은 엘리트 스님들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신라왕자 출신인 지장왕보살이라 불리는 김교각(704~803) 스님이다. 교각스님은 신라를 떠날 때 신라의 차를 가져갔다. 당나라에서 공부를 끝낸 교각스님은 신라로 귀국하지 않고 중국의 구화산에서 많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했다. 그리고 그곳 구화산에 신라에서 가져간 차를 심어 보급했다. 중국의 팽정구가 쓴 <개옹다사(介翁茶史)>에는 “김지장이 신라차를 구화산에 심어 운경차(雲梗茶)를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역사 시간대별로 따진다면 교각스님이 중국에 신라차를 전한 것은 8세기이고 김대렴이 신라에 차를 가져와 심은 것은 9세기가 된다 는 점에서 약 100년이란 시간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차의 역사는 다양한 편차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신문 Vol 2445         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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