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우리 茶 이야기

5 백제의 차문화 (上)

浮萍草 2013. 4. 30. 07:00
    ㆍ544년 화엄사 장죽전 뒤에
    차나무 심은 기록 전해져
    제의 시조로 알려진 구이(仇台)는 고이(古爾)를 지칭한다. 고이왕(재위 234~286)은 백제의 발전을 주도한 명군이다. 
    내부적인 지배체제를 정비하고 법령을 제정하고 전제왕권을 확립했다. 
    280년 이후 수차례에 걸친 서진(西晉)에 사신을 파견,중국문물을 적극 받아들였다. 
    근초고왕(재위 346~375) 때는 국토확장과 함께 동진과 왜 등과 교류하면서 백제인의 해외진출이 활발했다. 
    중국의 <송서>나 <양서>에는 이 당시 백제가 요서지방을 점유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해양국가 백가제해(百家制海)의 뜻이 담겼으며 중국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백제의 영역 아래 두었다는 의미로 해석
    된다.
     침류왕 원년(384)에는 동진으로부터 인도의 스님 마라난타가 들어와 불교를 전했다. 
    침류왕이 마라난타 스님을 궁 안에 머물게 하고 이듬해 한산에 절을 세우고 10여 명의 스님과 함께 머물게 했다. 
    당시 불교는 국가통치의 일원적인 사상의 지주로 호국신앙의 성격을 띠게 됐다. 
    이처럼 백제의 중국과의 잦은 교류는 중국문화와 소통하면서 중국문화를 적극 수용했음을 시사한다. 
    관직의 이름이나 복식들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불교의 전래와 다례의 관계가 불가분의 관계인 만큼,백제의 차문화 수용은 불교를 중심으로 한 중국문화 전래에 적잖은 부분을 차지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왕들이 매년 대대적으로 동명묘와 구이묘에 친제(親祭)를 올려왔으니 제사에서 헌다(獻茶)는 주요한 의식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면 당시 중국의 차문화 경향은 어떠했을까. 류건집 원광디지털대 교수에 따르면 차의 장려책을 공표하고 다법(茶法)이 제정되는 
    등 차문화가 정립되는 중요한 시기다. 
    특히 서진 시기에 안평 출신의 장재(張載)가 사천성의 수도인 서오에 위치한 백토루에서 지었다고 알려진 ‘등성도백토루시
    (登城都白樓詩)’가 나왔던 시기다. 
    ‘등성도백토루시’는 차를 주제로 하는 최초의 시로 전해진다. 
    백제에는 현존하는 고찰들이 대거 창건되는데 이 역시 차문화와 연관이 깊다. 
    426년에 정관대사가 대흥사를 창건했고 527년에는 대통사와 대조사가, 이어서 선암사가 개산했다. 
    544년에 화엄사가 창건됐는데, 이 때 연기조사가 화엄사 뒤 장죽전에 차를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화엄사 주지를 지낸 만우 정병현 스님이 편찬한 <해동호남도지이산화암사사적(海東湖南道智異山華嚴寺事蹟>
    에 실려 있다. 
    이어서 581년 선운사, 597년 무위사, 599년에 금산사와 수덕사가 계속해서 창건됐다. 
    당시 사찰이나 토굴과 같은 수도장에서는 음다문화가 보편화돼 있었다. 
    불교관계 문장가들이 엮은 시문집 <속동문선> 66권에 이규보가 쓴 ‘남행월일기’에도 원효스님의 차이야기가 실려 있다. 
    ‘원효스님이 기거하니 사포성인이 와서 모셨는데 원효스님께 차를 드리려 했으나 샘물이 없어 난감하던 중 갑자기 물이 바위틈에서 
    솟아나 그 맛이 달고 젖 같아서 늘 그 물로 차를 끓였다고 한다’는 구절이다. 
    이처럼 승가에서는 보편적으로 차를 마셔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원효스님이 참선에 필수적인 차를 상음(常飮)했듯 그 시절 대다수의 사찰에서 스님들이 음다문화를 향유하고 전파했으리라.
    
    불교신문 Vol 2441        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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