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5. 대장부의 길

浮萍草 2013. 4. 27. 06:00
    “충도〈忠道〉로써 나라와 세상의 어지러움 건지겠노라”
    진흥왕 화랑제도 설립 인재 발굴의 새 창구
    젊은 화랑과 낭도들 나라 위해 충성 다짐

    1934년 경주시 금장리 석장사 터 부근에서
    발견된 임신서기석. 신라의 두 화랑이 학문에
    전념하고 국가에 충성할 것을 맹세한 내용으로
    총 74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다.
    라는 진흥왕 때 크게 발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진흥왕과 여러 신하들은 인물을 알아보기 어려움을 근심했다.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고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인재의 발굴이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던 것이다. 이에 진흥왕은 화랑제도를 설립했다. 미모의 남자를 골라 그를 단장시켜 화랑이라 했는데 수많은 낭도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서로 도의(道義)를 닦고, 혹은 가악(歌樂)으로 즐기며 혹은 산수(山水)에 유오(遊娛)하며 유취군유(類聚群遊)했다. 화랑과 낭도가 수행하던 도를 풍류도(風流道)라고 했다. 화랑도는 산수 사이에 노닐고 노래와 음악으로 즐기면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웠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 행과 의(義)를 관찰하여 뛰어난 인물은 조정에서 뽑아 쓰고자 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좋았다. 8세기 초 김대문(金大問)은‘화랑세기(花郞世記)’에서“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빠져 나오고 뛰어난 장사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인하여 생겨났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7세기 화랑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라 청소년들은 군자(君子) 혹은 대장부(大丈夫)를 그들의 이상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스스로 대장부로 자부했고, 그 장부의 길을 갔다. 사량부의 귀산과 추항은 친구였다. 601년 무렵 어느 날 두 사람은 그들의 미래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우리들이 사군자(士君子)와 교유하기를 기약하면서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수행하지(正心修身) 않는다면 치욕을 면치 못할까 두렵다. 어찌 어진 사람을 찾아서 도(道)를 묻지 않겠는가.” 젊은 그들의 희망은 군자와 교유하는 것이었다. 군자는 그들의 희망이자 그들 자신의 꿈이었다. 군자는 학문이 있고 덕이 높은 사람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로해서 원광법사를 찾아가 세속오계를 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세속오계는 귀산과 추항이 구해서 얻은 교훈이었다. 612년(진평왕 34)으로 추정되는 임신년 어느 여름 날,이름을 알 수 없는 신라의 두 청년이 그들의 희망과 굳은 맹서를 단단한 돌에 새겨 두었다.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서하고 기록한다. 하느님 앞에 맹서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 충도(忠道)를 지켜 과실이 없기를 맹서한다. 만약에 맹서를 저버리면 하늘의 큰 벌을 받을 것을 맹서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우면 가히 행할 것을 맹서한다. 또 따로 신미년 7월 22일에 맹서했다. 시경·상서·예기·춘추·좌전 등을 차례로 3년에 습득할 것을 맹서했다.” 지금도 국립경주박물관에 전하는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의 내용이다. 유가의 중요 경서를 배워 익히고, 충도(忠道)를 지켜 잘못이 없고 국가와 세상의 어려움을 건지겠다는 맹서다. 이러한 맹서를 화랑집단 특유의 서약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타율적 서약이나 맹서가 아니다. 자기 스스로 다짐하고, 친구와 더불어 약속하고, 하늘에 맹서하고, 돌에까지 새기는 맹서이기에. 특히 이들은 충도를 지켜 잘못이 없도록 하겠다고 맹서한다.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행할 것이라는 충도는 국가에 대한 충성이다. 이 무렵 김유신도 스스로 다짐하고 기약했다. 평생 충효(忠孝)로 살 것이라고. 김유신은 15세 때인 609년(진평왕 31년)에 화랑이 되었다. 그는 혼자서 중악(中嶽) 석굴로 들어가 하늘을 우러러 맹서하고 기도했다. “적국이 침략하여 평안한 해가 없습니다. 저는 한낱 미약한 몸이지만 난을 평정하고자 하오니 하늘은 저에게 힘을 빌려 주소서.” 이렇게 기도하기 4일이 되던 날 문득 한 노인이 와서 말했다. “여기는 독한 벌레와 사나운 짐승들이 많아 두려워할 곳인데 귀한 소년이 홀로 온 것은 무슨 까닭인가?” 유신은 대답했다. “어른께서는 어디서 오셨고 존함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노인은 말했다. “나는 일정하게 머무는 곳이 없고 가고 오는 것은 인연에 따라 한다. 이름은 난승(難勝)이다.” 유신은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두 번 절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말하였다. “저는 신라 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고 마음이 아프고 근심이 되어 이곳에 와서 만나는 바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엎드려 비오니, 어른께서는 저의 정성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방술(方術)을 가르쳐 주십시오.” 노인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유신이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청원하기를 6~7차에 이르자 노인은 말했다. “너는 어린 나이에 삼국 병합(倂合)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장하다.” 이에 비법(秘法)을 가르쳐 주면서 말했다. “이 비법은 삼가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약 이를 불의(不義)에 쓰게 되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다.” 말을 마치고 작별하였는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다만 산 위에 오색찬란한 빛이 보일 뿐이었다. 설화적 윤색이 보이는 기록이지만,화랑 김유신의 맹서와 기도까지도 허구라고 보기는 어렵다. 중악은 경주시 서면 단석산(斷石山)에 비정된다. 이 산에는 김유신이 신검을 얻고 칼을 단련하기 위해 시험 삼아 큰 바위를 끊어서 산처럼 쌓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ㆍ대장부는 화랑의 목표 신라 삼국통일의 초석
    비녕자 등 젊은이들 전쟁터서 목숨 바쳐

    진평왕 때의 검군(劍君)은 사량궁(沙梁宮)의 사인(舍人)이면서 동시에 풍류도(風流道)를 수행하던 낭도(郎徒)였다. 627년 8월에 서리가 내렸다. 때 이른 서리에 모든 농작물이 해를 입었다. 이듬 해(628) 봄이 되자 백성들은 심한 기근으로 고통 받았다. 아들까지 파는 참혹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궁중의 사인(舍人)들은 함께 모의하여 몰래 창고의 곡식을 훔쳐서 나눠 가졌다. 그러나 검군은 이를 받지 않았다. 동료 사인들은 말했다. “그대만 홀로 받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만약 적다면 더 주겠다.” 검군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근랑(近郞)의 낭도로 풍류도를 수행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의롭지 않는 일이라면 천금(千金)의 이로움이 있더라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검군은 그들과 헤어져 근랑의 집으로 갔다. 곡식을 훔친 사실이 누설될 것을 염려한 사인들은 검군을 죽이기로 모의하고 검군을 불렀다. 그들이 죽이려는 것을 눈치 챈 검군은 근랑에게 작별하며 말했다. “오늘 이후에는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근랑이 그 이유를 재삼 묻자 검군은 상황을 간단히 말했다. 근랑이 물었다. “어찌하여 이를 유사(有司)에게 말하지 않는가?” 검군은 말했다. “나의 죽음을 두려워하여 많은 사람들을 죄로 다스리게 하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할 수 없습니다.” 근랑이 물었다. “그렇다면 어찌 도망가지 않는가?” 검군이 말했다. “저들이 굽고 내가 곧은데 도리어 도망한다는 것은 장부의 할 일이 아닙니다.” 드디어 검군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여러 사인들은 술을 차려 놓고 사과하는 채하였지만 그들은 몰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 검군은 이를 알면서도 꿋꿋하게 먹고 죽었다. 의리를 지키고자 함은 풍류도를 수행하던 화랑도의 이상이자 자존심. 그래서 그는 말했다. “의리에 어긋나면 비록 천금의 이익이 있더라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풍류도를 수행하고 있기에.” 그리고 그는 죽음으로써 대장부의 이상과 자존심을 지켰다. 대장부의 길을 간 또 한사람 낭도가 있었다. 화랑 문노(文努)의 낭도 김흠운(金歆運)이 바로 그 사람이다. 655년 백제 조천성을 공격하던 김흠운은 어둠 속에서 전사하면 알아주는 사람조차 없을 것이라고 말리는 사람을 향해 말했다.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치기로 했으니,내가 죽은 것을 사람들이 알거나 알지 못하거나 그것은 같다. 구태여 명예만을 구하겠는가?” 이렇게 김흠운도 대장부의 길을 갔다. 나라에 몸을 바쳐서. 660년 7월 10일 황산벌전투,신라 병사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우장군 김흠춘(金欽春)이 아들 반굴을 불러서 말했다. “신하에게는 충성이 중하고, 자식에게는 효도가 중하다.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성과 효도를 온전히 하는 것이다.” 이에 반굴은 적진에 뛰어들어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김흠춘은 김유신의 동생, 그도 진평왕 때 화랑이었다. 화랑들에게는 타인과 구별되는 동류의식이 있었다. 진평왕대의 낭도였던 승려 혜숙(惠宿)이 사냥을 즐기던 국선(國仙) 구참(瞿)에게 말했다. “처음에 내가 생각하기로 공은 인인(仁人) 즉 어진 사람인지라 능히 자기를 미루어 동물에까지도 미칠 것이라 하여 따라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공이 좋아하는 것을 보니 오직 살육에 몰두하여 남을 해쳐서 자기를 살찌울 뿐이니 이것이 어찌 인인군자(仁人君子)가 할 일이겠습니까? 우리의 무리는 아닙니다.” 군자가 할 일이 못 되는 사냥,그 사냥을 즐기는 당신은 우리의 무리가 아니라는 혜숙의 말을 새겨보면,화랑도는 군자(君子)를 이상 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귀산과 혜숙이 희망하던 군자와 검군과 김흠운이 스스로 자부하던 대장부는 신라의 젊은 화랑들이 추구하던 목표였다.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된 인물 중에는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어간 신라인들이 유난히 많은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찬덕과 그 아들 해론 비녕자와 그 아들 거진,심나와 그 아들 소나,반굴과 그 아들 김영윤,이들은 모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국가에 충성을 다했던 경우고, 눌최,김흠운,필부 등도 전쟁에서 몸을 던져 용감히 싸웠던 인물이다.
    Beopbo Vol 1083         김상현 동국대 명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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