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4. 수의 고구려 침략

浮萍草 2013. 4. 20. 06:00
    고구려, 수양제 백만대군 격퇴…수나라 멸망 자초
    수문제 이어 양제도 3차례에 걸쳐 침공 을지문덕 살수에서 30만 정예군 섬멸
    수나라는 대규모 군사력을 앞세워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을지문덕 등 고구려 명장들과의 싸움에서 대패했다.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 디오라마. 전쟁기념관 제공.
    7세기 초,고구려는 4차에 걸친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쳤다. 그러나 고구려의 기록은 거의 전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의 이 부분 서술도 대부분 ‘자치통감’ 등 중국 기록으로 재구성한 정도다. 을지문덕 관련 서술조차 마찬가지다. 고건무가 이끌었던 결사대 기록은 ‘수서’에만 전한다. 이처럼 중국 측의 일방적인 기록만으로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란 어렵다. 수나라의 장수와 전략과 패배 등은 알 수 있어도 고구려의 대응 전략이나 전과,혹은 고구려 백성들이 겪었을 고통이나 전쟁의 피해 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수나라 백만 대군을 격퇴한 역사 사실만은 잊을 수 없다. 수나라는 589년에 진나라를 정복하고 남북조를 통일했다. 이 소식에 긴장한 고구려는 군사를 훈련하고 군량을 비축하여 유사시를 대비했다. 590년 고구려에서는 평원왕을 이어 영양왕이 즉위했다. 598년 2월 영양왕은 말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요서지방의 영주를 선제공격하였다. 고구려군은 영주 총관에 의해 격퇴 당했으나 오히려 수를 자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수 문제는 2월에 고구려 원정군의 편성을 명했고 6월에는 수륙 30만 명이 원정길에 올랐다. 그러나 수군은 장마와 폭풍우, 그리고 굶주림과 전염병 등으로 물러났다고 한다. 8활 내지 9활의 병력을 손실한 채로. 30만 군사 대부분을 잃은 참담한 패배의 원인이 자연 재해 때문이라는 기록은 의문투성이다. 문제의 둘째 아들 양광은 병상의 아버지 황제를 시해하고 604년에 즉위했는데,곧 양제다. 백성을 혹독한 노역과 위험한 전쟁터로 내몰았던 폭군 양제는 612년부터 직접 고구려를 침공하기 시작 613년과 614년까지 무려 3차례나 계속했다. 양제는 돌궐 지역을 순행하던 607년 8월 추장 계민가한(啓民可汗)의 처소에서 고구려 사신과 만나게 되었다. 고구려는 비밀리에 동돌궐과 접촉하고 있었던 것. 양제는 이를 트집 잡아 고구려왕의 입조를 요구했고,고구려가 이에 응하지 않자 침공을 서둘렀다. 611년 2월 양제는 고구려 토벌을 선언하고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유주 총관 원홍사에게 배 300척을 만들게 했는데,물속에서 밤낮으로 일하던 사람 중에는 허리 아래로 구더기가 생겨 죽은 경우가 열에 서너 명이었다. 미곡을 실은 배가 천여리를 이었고 병기와 갑옷 등을 싣고 오가는 수십만 명이 밤낮으로 길을 메웠으며 작은 수레로 쌀을 운반하기 위해 동원된 인부만 60여만 명이었다. 군량미 비축에 동원된 수레와 소는 돌아오지 못했고, 죽은 사졸이 반을 넘었으며 길에는 죽은 시신의 악취가 진동했다. 밭 갈고 씨 뿌리는 때를 놓쳐 논밭은 황폐했다. 이렇게 1년 가까이 전쟁 준비를 했다. 백제와 신라는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소식을 반겼다. 백제에서는 사신을 보내 행군 기일을 알려달라고 요청했고 양제는 석률(席律)을 백제로 보내 왕과 모의하게 했다. 신라가 수나라에 군사를 청하는 걸사표를 보냈던 것도 바로 이 해였다. ㆍ고건무도 5백명으로 4만명과 싸워 대승 전국적인 반란으로 38년 만에 수 멸망
    대일통(大一統)이라는 허망으로 고구려를 침략해 두 나라 백성
    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양제, 그도 금군의 우둔위장군 우문화급
    에게 살해당했고, 통일 38년 만에 수나라도 망했다

    612년 1월 2일. 양제는 진군 명령을 내렸다. 동원된 군대는 육군이 113만3800명, 말 10만 필, 군량미 등을 수송하는 치중병(輜重兵)은 그 두 배였다. 그리고 수군은 10만 명. 매일 1군씩 출발시켜 모두 출발하는데 40일이 걸렸고 깃발이 960리에 나부꼈으며 황제를 호위하는 군영만 80리에 걸쳤다. 어디 병사뿐이겠는가. 3백만 명의 군량과 10만 필의 말 먹이,개인 소지의 군장비,부교(浮橋)와 공성용 여러 장비 등 동원된 물자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이처럼 방대한 규모의 출정은 고금에 보기 드문 것이었다. 4월 하순부터 수나라 군사는 요동성을 포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버티었다. 6월 상순까지도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양제는 장수들을 질책했다. “그대들이 나의 친정(親征)을 원하지 않았던 것은 참패하는 그대들의 모습을 내가 보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구나. 그대들은 죽기가 두려워 힘을 다해 싸우지 않았다. 내가 진정으로 그대들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장수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내호아(來護兒)가 이끄는 수나라 수군의 배가 수백리에 연이어 패수로 들어갔다. 평양과 60리 떨어진 곳에서 고구려군과 만나 크게 승리하고 4만 정예군이 곧바로 평양성 아래로 진격했다. 고건무(高建武)가 결사대 500명으로 맞서 싸웠는데 그는 영양왕의 동생으로 훗날 즉위한 영류왕이다. 외성 안 빈 절에 군사를 숨겨놓은 결사대는 싸우다가 지는 척하고 도망함에 내호아가 성에 들어가 군사를 풀어 약탈케 하자 대오가 흩어졌다. 이때 매복하던 고구려 군사가 일제히 공격하여 격파했다. 내호아는 겨우 목숨을 건졌고, 수천 명이 살아서 도망했다.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500명 결사대로 4만 정예군을 격파했다는 사실은. 이에 양제는 30만5000명의 별동부대를 편성하여 평양성을 직접 공격토록 했다. 우문술 등의 군사들에게는 100일 분의 식량과 갑옷과 창,그리고 옷과 무기와 취사용 불과 장막을 지급했는데 무게가 3석 이상이나 되었다. 군량을 버리는 사졸은 목을 벨 것이라는 명령에도 군사들은 모두 장막 아래에 땅을 파고 묻고 떠났다. 이 때문에 중도에 양식이 궁핍했다. 별동부대가 압록강에 이르자 고구려 장군 을지문덕이 진영으로 나가 거짓 항복했다. 군사의 허실을 엿보기 위함이었는데 그는 그들의 굶주린 기색을 알아챘다. 을지문덕을 돌려보내고 불안해하던 우중문 등은 압록강을 건너 추격했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사를 피로하게 하기 위해서 싸움마다 패하니 우문술 등은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서 모두 이겼다. 이에 수군은 살수를 건너 평양성 북쪽 30리까지 진군했을 때 이미 지치고 굶주려 있었다. 이때 을지문덕은 우중문을 희롱하여 시를 지어 보냈다. “신통한 계책은 천문(天文)을 뚫었고 묘한 계산은 지리를 다했도다.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한 줄 알아서 그만두시오.” 을지문덕은 영양왕의 친조를 조건으로 수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물론 거짓이었다. 이를 핑계로 우문술은 회군을 시작했다. 7월24일 을지문덕은 사면에서 공격했고, 살수를 건널 때 후미를 공격하여 주력을 섬멸했다. 30만5000명 중 살아서 요동으로 돌아간 자는 겨우 2700명뿐이었다. 양제는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어서 돌아갔다. 개선한 군사와 더불어 낙양 궁궐에서 잔치하리라던 요동에서의 호언장담이 무색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백제는 말로는 수나라를 돕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양다리를 걸치고 고구려와 몰래 통했다. 신라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는 틈을 노려 고구려 땅 500리를 빼앗았다. 613년 정월 2일, 양제는 천하의 군사를 탁군에 집결토록 명했다. 2월 8일 양제는 신하들에게 말했다. “고구려는 작은 오랑캐로 상국(上國)을 능멸하였지만 지금은 바다를 뽑아 산으로 옮기는 것이라도 결단할 수 있는데,하물며 이런 오랑캐쯤이야.” 수나라 군사는 4월27일 요하를 건넜고 5월 중순에는 요동성을 포위 공격했다. 비루(飛樓)·당거(撞車)·운제(雲梯)·지도(地道) 등의 무기를 동원하여 사방에서 공격했다. 그러나 20일을 공격해도 소용이 없자 수군은 임시 성루를 만들기 시작했다. 1만여 장의 포대에 흙을 넣어 이것을 쌓아 올려 어량대도(魚梁大道)를 만들었다. 그 폭은 30보(步)며 높이는 성곽과 같았다. 어량대도에 팔륜누거(八輪樓車)를 배치했다. 8개의 바퀴를 단 이동식 고가사다리차인 팔륜누거로 성을 내려다보면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공성 준비에 성안의 군민들은 불안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 무렵인 6월에 예부상서 양현감(楊玄感)이 하남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양현감과 내통하고 있던 병부시랑 곡사정(斛斯政)도 6월26일에 고구려 진영으로 도망했다. 양제에게 신임과 총애를 받아 군사에 관한 일을 오로지 관장하던 국방차관 곡사정의 투항은 고구려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28일 한밤중에 양제는 퇴각을 명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군수물자와 공격용 무기 등을 버려둔 채. 614년 2월29일 천하의 군사를 소집하여 고구려를 정벌토록 했다. 양제의 3차 고구려 원정이었다. 3월14일 양제가 탁군에 도착했을 때 도망하는 사졸들이 줄을 이었고 목을 베어도 도망자는 그치지 않았다. 7월에 양제가 회원진에 도착했을 때 징발된 군사 중에는 도착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이 무렵 수나라에서는 전국적으로 도적이 일어나 혼란했고 고구려 또한 피폐했다. 비사성을 함락한 내호아가 평양으로 향하려 하자 고구려에서는 곡사정을 송환하며 항복을 청했는데 7월28일이었다. 양제는 내호아를 소환하고 8월4일 회원진에서 군사를 돌렸다. 끝내 고구려왕은 입조하지 않았다. 화려한 용주(龍舟)를 타고 즐기던 양제는 어느 날 한밤중에 슬픈 노래를 들었다. 형은 요동 출정에서 굶어 죽었고,자신은 황제의 배 끄느라고 고달프며 형의 아내는 슬픔에 말라 가고,아들 그리워하던 늙은 부모의 기대는 이미 절망으로 변했는데 어떻게 형의 백골이라도 고향으로 모셔올 수 있겠는가고 한탄하는 노래였다. 이렇게 백성들의 슬픔과 분노가 쌓여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란은 온 나라를 흔들었다. 618년 3월 11일 마침내 반란군이 양제의 침전을 덮쳤을 때,양제는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물었다. 사마감덕이 말했다. “하늘 아래 사람들이 다 같이 원망하고 있으니, 어찌 한 사람에게 그치겠습니까?” 곡사정을 차열(車裂)로 죽여 그 살점을 삶아 백관에게 먹였을 정도로 포악했던 대일통(大一統)이라는 허망으로 고구려를 침략하여 두 나라 백성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의 원망을 받던 양제도 금군의 우둔위장군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 당했고 통일한지 38년 만에 수나라도 망했다.
    Beopbo Vol 1082         김상현 동국대 명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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