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2. 신라·백제, 동맹국서 적국으로

浮萍草 2013. 4. 6. 06:00
    백제, 관산성 전투서 대패…성왕과 3만 병사 전사 
    신라, 오랜 동맹 깨고 한강유역 백제땅 점령
    백제의 젊은 왕자 여창 뺏긴 땅 찾으려다 참패

    백제 위덕왕은 자신을 구하려다 무참히 죽어
    간 아버지 성왕을 위해 능을 조성하고 그 가까
    운 곳에 성왕의 추복과 능의 수호를 위해 능사
    (陵寺)를 창건했다. 사진은 1993년 이곳 절터에
    서 출토된 금동대향로.
    구려가 장수왕 15년(427) 평양으로 천도하자,위협을 느낀 백제와 신라는 433년 동맹으로 대비했다. 불안했던 백제는 472년 북위에 고구려 남침을 호소하며 군사 원조를 청했지만, 고구려를 자극하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장수왕이 거느린 3만 고구려 군사가 백제 서울 한성을 공격한 것은 475년 9월,포위 7일 만에 한성은 함락되었다. 개로왕이 성을 나가 도망하자 고구려의 장수 재증걸루와 고이만년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 왕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는 포박하여 아차성 아래로 보내어 죽였다. 걸루와 만년은 본래 백제 사람인데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던 인물이었다. 역사가는 논평했다. “걸루 등은 스스로 지은 죄로 나라에 용납되지 못하고 적병을 인도하여 전날의 임금을 결박하여 죽였으니, 그 의롭지 못함이 심하다.” 고구려군은 한성의 남녀 8000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원군을 청하러 신라로 갔던 개로왕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곧 문주왕이다. 백제는 이해 10월에 웅진으로 천도했다. 웅진에서 와신상담(臥薪嘗膽)으로 보낸 60여년,538년에 백제 성왕은 사비로 천도 했고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의 옛 땅을 회복하고자 했다. 이 무렵 고구려는 내우외환을 겪고 있었다. 양원왕의 즉위를 둘러싼 분쟁이 7년 동안이나 계속되는 정치적 혼란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는 동맹 관계에 있던 신라와 함께 551년에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해 9월 고구려는 돌궐의 침입으로 신성과 백암성 등지에 1만 명의 군사를 출동 시켜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먼저 백제가 한강 하류지역으로 진격하여 6군을 회복했다.
    거칠부 등 8명의 장군이 이끄는 신라군은 한강 상류로 진출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고구려 영토 10군을 점령했다. 그리고 2년 후 553년,신라는 백제가 되찾았던 한강 하류지역까지도 점령해 버렸다. 그리고 이 지역에 신주(新州)를 설치했다.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서해를 거쳐 중국과 통할 수 있는 문호를 얻게 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신라가 남양만의 당항성을 중심으로 중국과 왕래할 수 있었던 것도 한강 유역의 확보로 가능했다. 그러나 신라는 실지회복을 노리는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고구려는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상류 지역의 회복 의지를 오래 버리지 못했다. 훗날 온달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아단성 아래에서 싸우다가 죽은 것도 이 지역을 되찾기 위함이었고 온달의 상여까지도 움직이지 않았을 정도로 이 지역에 대한 미련은 강했다. 한강 하류지역을 빼앗긴 백제는 더했다. 동맹국 신라의 배신에 백제는 격분했다. 신라와 백제는 433년에 화친한 이래로 단 한 번의 전쟁도 없었다. 서로 사신을 파견했으며,고구려의 침략이 있을 경우 두 나라는 서로 구원병을 파견하여 도왔다. 그러나 신라의 백제 영토 점령으로 두 나라의 백여 년 동맹 관계는 무너졌다. 어제의 동맹국이 하루아침에 적국으로 바뀌고 만 것이다. 백제는 곧 신라 공격 계획을 세웠다. 일본에 군사를 요청했고, 554년 정월에는 일본으로부터 군사 1000명, 말 100필, 배 40척을 파견할 것이라는 회답을 받았다. 6월에 일본 수군이 도착했다. 가야의 군사도 합세했다. 백제의 신라 공격은 30세의 젊은 왕자 여창(餘昌)이 주도했다. 신라 공격을 서두르는 여창에게 기로(耆老)가 간했다. “하늘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여창은 말했다. “늙었구려, 어찌 그렇게 겁을 내시오.” 여창은 기로들의 염려를 뒤로 한 채 신라의 관산성을 향해 진격했다. 554년 7월이었다. 전투 초기에는 가야와 일본의 군사가 가세한 백제군이 우세했다. 그러나 신주(新州) 군주(軍主)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게 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관산성은 신라 왕경으로부터 추풍령을 넘어 신주로 이어지는 교통로의 중요 지점인 옥천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을 잃는다면 신주도 고립될 가능성이 있었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관산성 수호에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성왕은 전쟁터의 아들이 걱정되자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관산성으로 출발했다. 성왕이 전투에 참여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신라에서는 대규모의 군사를 일으켰고 옥천 부근의 구천(狗川)에서 매복하고 있던 병사가 성왕을 사로잡았다. 신라는 의도적으로 삼년산군(三年山郡)의 도도(都刀)를 시켜 성왕을 참수(斬首)했고, 무례하게 시신을 대했다. 도도가 사로잡은 성왕에게 두 번 절하고서 말했다.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 성왕이 대답했다. “왕의 머리를 종놈의 손에 맡길 수는 없다.” 도도가 말했다.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도 종의 손에 죽습니다.” 성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과인은 매양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생각하며 살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 이에 머리를 내밀어 참수를 받았다. ㆍ속죄 위한 출가 뜻 접고 부친 위해 능과 절 조성
    고구려 혜량법사 망명 신라의 승통으로 추대

    신라는 성왕의 두골(頭骨)을 수습해 두고 나머지 뼈는 백제에 예를 갖추어 보냈다. 신라왕은 성왕의 뼈를 도당(都堂)의 계단 아래에 묻었다. 이는 백제에 대한 의도적인 모욕이었다. 성왕의 참혹한 죽음은 치욕이었고, 인정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일대사건이었다. 성왕은 지혜와 식견이 빼어나고 일을 잘 결단하였다고 한다. 그러기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성왕(聖王)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일본의 조정에서도 성왕은 천도(天道)와 지리(地理)에 통달하여 그 명성이 사방에 두루 알려져 있다고 평했다. 실제로 성왕은 사비로 천도하고 중앙 관제와 지방 통치조직을 정비하여 왕권을 확립했으며,고구려를 쳐서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 하는 등 백제의 중흥을 위해서 노력한 왕이다. 이러한 성왕의 죽음은 너무나 비참했다. 관산성 전투는 백제의 참패로 끝났다. 왕을 비롯하여 4명의 좌평(佐平)과 2만9600명의 사졸이 전사했으며 한 필의 말도 살아서 돌아온 것이 없었다. 4명의 좌평이 국왕과 함께 전사한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3만 명에 가까운 사졸의 전사 또한 엄청난 피해였다. 겨우 살아온 태자 여창은 출가하고자 했다. 비명에 전사한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여러 신하들이 간했다. “지금 군왕이 출가하여 수도하고자 하신다면 우선 왕명을 받들겠습니다. 아, 지난번의 생각이 확고하지 못하여 후에 큰 화가 있게 된 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무릇 백제를 고구려와 신라가 다투어 멸망시키고자 하는 것이 나라를 연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니 지금 이 나라의 종묘 사직을 장차 어느 나라에 넘겨주려고 하십니까? 모름지기 왕명을 따르는 것이 분명한 도리지만 만약 능히 기로의 말을 들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습니까? 청컨대,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세속을 떠나는 수고로움은 그만 두십시오. 원하시는 것을 굳이 하고 싶다면, 나라 백성들을 출가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패전의 참담한 화를 초래한 왕자 여창의 잘못에 대해서 신하들은 지적했다. 사직의 보전마저 위태롭게 된 당시 상황에서 태자의 출가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여창이 출가 수도하려했던 것은 패전 이후에 처한 정치적인 곤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왕의 참혹한 죽음과 참담한 패전을 경험한 30세의 젊은 왕자 여창에게 밀어닥쳤을 인간적인 고뇌 또한 없지 않았을 것이기에. 신하들의 만류로 출가를 단념한 여창은 왕위에 올랐다. 그가 곧 위덕왕이다. 위덕왕은 부왕의 추복(追福)을 위해서 100명을 출가시켜 여러 공덕을 닦도록 했다. 성왕의 능은 부여의 능산리(陵山里)에 조성되었다. 1993년에 부여 능산리 고분군 바로 옆에서 사지 하나가 발굴되었는데,이 절터에서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를 비롯한 많은 유물과 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造舍利龕)이 출토되었다. 이로써 이 절이 위덕왕 13년(567) 무렵 창건된 사실과 능산리에 성왕의 능을 조성한 후 그 가까운 곳에 성왕의 추복과 능의 수호를 위해서 창건한 능사(陵寺)였던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참혹하게 전사한 성왕 그 성왕의 능 옆에 절을 세우고 100명 승려들이 명복을 빌었던 것이다. 이 절터에서 출토된 금동대향로는 참으로 아름다운 걸작품이고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진혼의 향불은 성왕의 능을 맴돌았을 것이다. 전쟁의 와중에도 이렇게 불교는 있었다. 아니 전쟁의 상처가 클수록 그 아픔을 치유해 줄 종교는 더 필요했을 것이다. 고구려의 혜량법사(惠亮法師)가 신라로 망명한 것도 신라가 고구려의 10군을 점령했을 바로 그때였다. 혜량이 제자들을 이끌고 나오자 신라 장수 거칠부는 말에서 내려 인사를 올렸다. 거칠부는 젊은 날 승려가 되어 사방을 다닐 때 고구려로 들어가 혜량의 강의를 들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칠부는 말했다. “전일 유학할 때 법사의 은혜를 입어 생명을 보전했는데 지금 뜻밖에 서로 만나니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법사가 말했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지러운 정치로 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나를 그대 나라로 데려가 주기 바랍니다.” 이렇게 고구려의 고승 혜량은 신라로 망명했고 진흥왕은 법사를 승통(僧統)으로 삼았다. 그리고 신라에서는 처음으로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했으니 혜량은 신라불교 발전에 기여한 셈이다.
    Beopbo Vol 1080         김상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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