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3. 원광(圓光)과 세속오계

浮萍草 2013. 4. 13. 06:00
    신라 지도이념 제시…임전무퇴 화랑도 정신 확립 
    유교·도교에도 깊은 이해 신라 최고의 문장가 명성
    진평왕 등 성인으로 존숭 국내 정치·외교문제 자문

    원광법사가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지도하는 모습의 청도 운문사 대웅전 벽화.
    7세기 초에 활동한 신라의 승려로는 원광(圓光)과 지명(智明)과 담육(曇育)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중국 유학을 다녀온 고승이지만 지명과 담육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고 원광의 전기는‘속고승전’과‘삼국유사’ 등에 전 한다. 원광(542~640)은 이 무렵 신라의 대표적 고승이었고 지식인이었다. 그는 불교는 물론 유학과 노장학에 이르기까지 두루 공부했다. 그리고 그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대제국으로 등장하던 시기에 유학을 다녀옴으로서 수나라의 불교계는 물론 정치적인 여러 정황에 대해서도 남다른 식견을 갖고 있었다. 그는 귀국 후 진평왕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수나라와의 외교나 국내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했으며, 세속오계로 신라 젊은이를 지도하기도 했다. 그는 젊은 날 노장학과 유학을 널리 읽고, 제자(諸子)와 역사서를 연구했다. 신라에서는 이미 문장으로 이름이 났지만 다시 해외로 가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자 했다. 25세에 진나라의 수도 금릉(金陵)에 이르러 종래의 의문을 풀었고 도를 물어 그 뜻을 해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장엄사(莊嚴寺)에서 승민(僧旻)의 제자로부터 처음으로 불교 강의를 들었다. 평소 세간의 전적을 주로 배웠지만 불교의 교리를 듣고부터는 세간의 전적을 가볍게 여기게 되었고 이에 진나라 왕에게 출가를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처럼 원광은 진나라에서 출가했다. 원광은 구족계를 받고 강석을 두루 찾아 ‘성실론(成實論)’과‘열반경(涅槃經)’ 등을 수학했고 삼장(三藏)과 석론(釋論)을 두루 탐구 했다. 후에 소주(蘇州)의 호구산(虎丘寺)으로 가서 ‘아함경(阿含經)’의 교의도 익혔다. 그는 세속과 완전히 단절하고 이 산에서 조용히 평생을 마치려고 했다. 이 무렵 산 밑에 살고 있는 어떤 신도가 강의를 요청함에‘성실론’과 ‘반야경’을 강의했다. 소문이 퍼지자 산길을 뚫고 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혜민(慧旻, 573~649)이 15세에 회향사(廻向寺)에서 원광의 ‘성실론’ 강의를 들었다. 혜민은 2년 정도 이 절에 머물렀는데, 대개 588년 무렵이었다. 수나라가 남북조를 통일하던 그 무렵 수나라 군사 50여만 명이 진나라의 수도 건업(建鄴)에까지 침공했고 진나라는 쉽게 무너졌다. 이 와중에 원광은 난병(亂兵)에게 사로잡히는 처지가 되었다. 절의 탑이 불타는 것을 멀리서 본 수나라 군사의 대장이 달려가 보니,불은 없고 탑 앞에 원광이 결박된 상태로 살해될 찰나에 있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대장이 결박을 풀어주어 살아날 수 있었다. 이 설화는 원광의 신이(神異)한 법력을 강조하고 있지만 진나라가 망하던 그 전쟁터에서의 생생한 체험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수나라가 통일을 이룩하던 589년 바로 그 해에 원광은 수도 장안으로 갔다. 당시 장안에는 담천이 흥선사에서‘섭대승론’을 강의한 것을 계기로 섭론학파(攝論學派)가 일어나고 있었다. 원광의 명석한 해석은 그의 명성을 장안에 퍼지게 했다. 멀리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라에서도 원광을 돌려보내 줄 것을 여러 차례 황제에게 청했다. 원광이 중국 유학을 마치고 신라의 사신을 따라 귀국한 것은 진평왕 22년(600)이었다. 그가 돌아오자 노소가 기뻐하고 왕은 그를 성인처럼 공경했다. 나이가 많아지자 수레를 타고 대궐을 출입하도록 했고 의복과 약은 왕이 손수 마련하고 좌우의 사람들이 돕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귀국 후 국가가 그에게 정치하는 방법을 맡겼고 도법(道法)으로 교화하는 일을 물었다고 한 것은 그에게 여러 정치적 자문을 구했다 는의미다. 중국 문물에 대한 많은 견문을 쌓고 온 그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원광이 외교문서의 작성에 참여하고 있었음은 오가는 국서는 모두 그의 심중으로부터 나왔다고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진평왕 30년(608)에 왕이 수나라에 군사 원조를 청하는 걸사표(乞師表)를 원광에게 지어 주도록 요청했던 것은 그 한 예다. 왕의 요청을 받고 원광은 망설였다.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남을 없애려는 것은 승려가 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그러나 ‘왕의 땅에 살면서 그 물과 풀을 먹고 있으니 어찌 감히 명을 받들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걸사표를 지었다. 토지와 인민은 모두 왕의 것이라는 왕토사상(王土思想)은 당시에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611년 신라에서는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걸사표로 군사를 청했고 이 글은 수 양제의 고구려 공격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원광의 문장은 미려하기로 소문나 있었고 당시 신라에 그를 능가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원광은 청도의 가실사(加悉寺)에 머문 적이 있다. 귀국 직후인 601년 무렵이다. 사량부의 귀산(貴山)과 추항(項)이 원광을 찾아왔다. 두 젊은이는 공손히 아뢰었다. “속세의 인사가 우매하여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부디 한 말씀 주셔서 평생의 교훈으로 삼도록 해주십시오.” 이에 원광은 이들 두 젊은이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 임금 섬기기를 충성으로 하고(事君以忠) 어버이 섬기기를 효로써 하며(事親以孝),친구 사귀기를 신(信)으로 할 것이며(交友以信), 전쟁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말고(臨戰無退),생명 있는 것을 죽일 경우에도 가려서 할 것(殺生有擇) 등이 그것이다. 충성,효도,신의,자비,용기의 덕목을 강조하고 있는 이 가르침은 세속인의 생활 규범이었고 불교 입장에서는 방편적 윤리규범이었다. 원광은 귀산 등이 세속인이라는 점에 유의했다. 그리고 정복 전쟁이 거듭되고 있던 당시 신라 사회의 현실도 지나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세속오계는 당시 신라 사회가 절실히 요구하고 있던 국가적 지도이념이 될 수 있었다. ㆍ세속오계로 젊은이 지도 임전무퇴 화랑정신 확립
    ‘모든 사람은 부처’ 강조 대승적 윤리관으로 교화

    귀산 등 두 젊은이는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아서 군자(君子)가 될 것을 기약했고,바른 도리를 구하고자 원광을 찾아가 일생의 교훈을 물었던 것이다. 스스로 구한 교훈이었기에 그들은 몸을 던져 이를 실천했다. 602년 8월 아막성(阿莫城)으로 백제 좌평 해수(解讐)가 거느린 4만 병사가 침략해 왔다. 신라 장군 건품과 무은 등이 이를 막았고 귀산과 추항도 전선에 나갔다. 전쟁이 불리해지자 해수는 천산 못가로 물러나 군사를 매복시키고 기다렸다. 무은이 추격하자 매복했던 백제 군사들이 급히 공격하였다. 신라 군사가 물러나 돌아올 때 무은이 군사의 맨 뒤에 섰는데 갑자기 백제의 복병이 갈고리로 무은을 말에서 떨어뜨렸다. 무은은 귀산의 아버지였는데, 귀산이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일찍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용사는 전쟁에 나가서 물러나지 않는다고 했다. 어찌 도망쳐 물러나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겠는가?” 귀산은 적 수십 명을 죽이고 자기 말에 아버지를 태워 보낸 뒤에 추항과 함께 힘껏 싸웠다. 이를 본 군사들이 분발하여 백제군을 섬멸했다. 해수만이 한 필의 말을 타고 돌아갔다. 온 몸에 칼을 맞은 귀산 등은 도중에 죽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아나들에서 맞이하여 시체 앞에 통곡하고 예로써 장례를 치르게 했다. 이처럼 귀산과 추항은 임전무퇴의 교훈을 죽음으로 지켰다. 이 소식은 신라에 두루 퍼졌다. 흠운(歆運)이 화랑 문노(文奴)의 문하에 있을 때다,낭도들은 말했다. “누구는 전사하여 지금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다”고. 이 말을 들은 흠운은 자신도 그들과 같이 되려는 기색이 있었다. 이처럼 화랑도는 임전무퇴의 용맹을 자랑으로 여겼고, 국가에 목숨을 바치는 일, 이는 화랑도의 기풍이었다. 진평왕 35년(613) 7월에 수나라 사신 왕세위(王世儀)가 왔다. 수 양제의 제2차 고구려 침공이 실패한 직후로 고구려 원정과 관련된 사행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 때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개최했고 원광이 그 윗자리에 앉아서 경을 강의했다. 원광이 강의한 경은 ‘인왕반야경’이다. 이 경은 어떻게 나라의 어려움과 재난을 물리치고 인민을 안락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가 설하고 있고 불교의 정치이념을 담고 있다. 이 경의 호국품(護國品)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어떤 국토이든 혼란해지려 하거나 온갖 재난이 있고 적이 침공하여 파괴하려 한다면 그대 국왕들은 마땅히 이 경을 수지하여 독송 하고 도량을 장엄하고 백 개의 불상과 백 개의 보살상과 백 개의 사자좌를 안치하고 백 명의 법사를 초빙하여 이 경을 해설하도록 해야 한다. 각각의 자리 앞에는 갖가지 등을 켜고 향을 사르며 온갖 꽃을 뿌리고 의복,침구,음식,탕약,방사 등 공양물 일체를 널리 공양하고, 매일 두 차례 이 경을 강독하도록 하여 만일 국왕과 대신과 사부대중이 이 경을 독송하고 법에 어긋남이 없이 수행하면 재난은 곧 사라질 것이다. 대왕들의 모든 국토 안에는 한량없는 귀신이 있고 그 귀신들에게는 또 많은 권속이 있다. 만약 그들이 이 경을 듣는다면 이 국토를 지켜 주리라.” 국왕이 백 명의 고승을 초청해서 높은 자리에 모시고 법문을 듣는 백고좌회,이 법회에서 원광은 윗자리에 앉았다. 원광은 수나라 사신과도 외교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고 자문했을 것이다. 능숙한 중국어로. 수나라 양제는 이 해 1월에 고구려 원정을 위한 총동원령을 내린 바 있기에 신라와도 협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원광은 ‘여래장경사기(如來藏經私記)’ 및 ‘여래장경소(如來藏經疏)’를 저술하기도 했다. 그는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에 주목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은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하는 이 사상을 토대로 그는 신라인의 생활 방식을 대승적인 윤리관으로 교화했다. 원광은 천성이 허정(虛靜)함을 좋아했고 도량이 넓었다. 말할 때에는 언제나 웃음을 띠고, 얼굴에 성내는 빛이 없었다. 성품이 겸허하고 인정이 많았다. 보시 받은 재물은 사찰 운영비로 충당했다. 640년 99세의 원광은 황룡사에서 단정히 앉은 채 입적했다. 오직 가사와 바루만을 남기고.
    Beopbo Vol 1081         김상현 동국대 명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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