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6. 김춘추와 김유신과 원효

浮萍草 2013. 5. 4. 06:00
    신라 최고의 명망가 3인 결혼으로 의기투합 
    김춘추와 문희의 결혼은 김유신이 추진했던 정략 선덕여왕 후원 가능성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29대 태종무열왕릉(사적 제20호)의 전경. 경내의 비각에는 비석의 몸체는 없고 귀부(龜趺)와 이수
    (首)가 남아 있으며,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새겨져 있어 신라왕릉 중 묘 주인의 신원이 확인되는 유일한
    능이다

    김상현 동국대 명예
    교수
    라 진평왕 47년(625) 무렵. 정월 보름 김유신(金庾信)의 집 앞. 김유신과 김춘추(金春秋)가 함께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이때 김유신(595~673)은 31세,김춘추(604~661)는 22세였다. 유신은 춘추의 옷고름을 일부러 밟아서 떨어뜨리고는 말했다. “우리 집이 가까이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달도록 합시다.” 그들은 함께 집으로 갔다. 유신은 먼저 술상을 마련하고 첫째 누이동생 보희(寶姬)를 불러 옷고름을 달아 드리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사소한 일로 귀공자에게 가까이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사양했다. 이에 동생 문희(文姬)에게 옷고름을 달아드리도록 했다. 옅은 화장,산뜻한 옷차림,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문희의 모습 그를 보는 순간부터 춘추는 이미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자기의 집으로 데려간 유신의 속마음도 알아차리게 되었다. 20대 초의 영특하고 늠름한 용모의 춘추, 그 멋진 청년의 옷고름을 달아주던 문희의 가슴도 이미 뛰고 있었을 것이다. 문희는 그 순간에 언니 보희로부터 샀던 꿈 생각을 했다. 미남자이면서도 담소(談笑)도 잘 하는 이렇게 멋진 귀공자가 자기 앞에 나타나게 된 것은 비단치마를 주고 언니로부터 샀던 그 꿈의 징험이라고 생각했다. 열흘 전 아침이었다. 언니 보희가 꿈 이야기를 했다. 서악(西岳)에 올라가서 오줌을 누는데 오줌이 서울에 가득 찼다는 꿈이었다. 동생 문희가 비단치마로 그 꿈을 사겠다고 제의하자 언니도 동의했다. 동생이 옷깃을 벌리고 꿈을 받을 때, 언니는 말했다. “어젯밤 꿈을 너에게 준다.” 동생은 비단치마를 언니에게 주었다. 이렇게 꿈을 산지 열흘 만에 신라 왕실의 귀공자를 만났으니 그 꿈의 징험이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산 위에서 눈 오줌이 왕경을 가득 채웠다는 언니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가슴에 품은 지 열흘 만에 만난 귀공자를 통해 그 꿈을 실현 하려 했던 한 처녀의 가슴은 이미 바다 같은 것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춘추가 보희를 보고 기뻐하여 혼인을 청하고 예식을 올렸다고 한다. 즉 두 사람의 결혼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은 다르다. 문희를 좋아하게 된 춘추는 이 집을 자주 드나들었고 문희는 결혼 전에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망국 가야의 후손 김유신가문이 신라 왕실과 결혼하는 일은 어려웠다. 때문에 김유신은 결혼 전에 임신한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겠다는 연극을 꾸며야 했고 선덕여왕(632~647)이 관여한 뒤에야 결혼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덧붙여지게 되었다. 유신은 그 누이가 임신한 것을 알고 꾸짖었다. “너는 부모에게 고하지도 않고 아이를 배었으니,어찌 된 일이냐?” 이에 그는 누이를 불태워 죽일 것이라는 소문을 온 나라에 퍼뜨렸다. 그리고 김유신은 자기 집 마당에 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질러 연기를 피웠다. 선덕여왕(632~647)이 남산에 거둥한 날을 택하여. 높은 산에서 이를 본 여왕이 무슨 연기냐고 물었다. 좌우에서 아뢰었다. “아마도 유신이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는 것인가 봅니다.” 왕이 다시 그 이유를 물었다. 그의 누이동생이 남편도 없이 몰래 임신한 때문이라는 대답에 왕은 다시 물었다. “그것이 누구의 소행이냐?” 이때 왕을 모시고 있던 춘추의 얼굴빛이 몹시 변했다. 왕은 눈치를 채고 말했다. “그것은 네가 한 짓이구나. 빨리 가서 구하도록 하라.” 명령을 받은 춘추는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함으로서 죽음 직전의 문희를 구해냈고 그 후에 버젓이 혼례를 올렸다. 기록에 의하면,유신이 결혼 전 임신한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일부러 퍼뜨리고,이를 알게 된 선덕여왕이 춘추로 하여금 위기에 처한 문희를 구하도록 하여,그 결과 떳떳하게 결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덕여왕이 문희를 구했다는 이야기는 훗날에 덧붙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춘추 아들 법민(法敏)이 출생한 진평왕 48년(626)을 기준으로 보면,이들은 진평왕 47년(625) 무렵 결혼했고,이때는 선덕여왕 즉위 7년 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ㆍ원효도 요석공주와 결혼 중첩적인 혈연의 관계가 삼국통일 의지 구체화로
    김유신 가문과 신라 왕실은 이미 유신의 아버지 서현이 진흥왕의 동생 숙흘종(肅訖宗)의 딸과 결혼함으로서 한 발짝 다가서 있었다. 그러나 그 결혼도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기에 왕실에서는 불만이 적지 않았다. 춘추의 아버지 김용춘(金龍春)은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과 결혼한 국왕의 사위였을 뿐 아니라 당시에는 내정을 총괄하는 내성사신(內省私臣)의 직에 있었다. 따라서 김유신 가문과 김춘추 가문의 혼사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김유신은 여동생을 불태워 죽이겠다는 헛소문까지 퍼드려 선덕여왕의 허락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두 가문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지기 까지 어려움이 많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덕만(德曼)은 훗날 즉위하여 선덕여왕이 되지만,춘추의 이모였기에 왕위에 오르기 전에도 춘추의 결혼을 적극 후원했을 가능성은 있다. 김춘추와 문희의 결혼은 김유신이 의도적으로 주선한 정략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도 혈연으로 맺은 이들의 인연은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춘추와 문희 사이에는 태자 법민과 각간 인문(仁問)·문왕(文王)·노단(老旦)·지경(智鏡)·개원(愷元) 등이 태어났다. 특히 태자 법민은 훗날 문무왕이 되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으니 비단치마로 샀던 꿈의 징험은 참으로 큰 것이었다. 그리고 김유신과 김춘추의 결합은 더욱 공고하게 되었다. 선덕여왕 11년(642) 청병(請兵)을 위해 고구려로 떠나기 직전에 김춘추는“나는 공과 일신동체(一身同體)로 나라의 팔다리가 되어 왔다”고 하면서 서로 도울 것을 청했고 두 사람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마시며 서로의 맹서를 다졌다. 약속한 60일이 지나도 춘추가 돌아오지 않자 김유신은 군사 3천명을 선발하여 구출 작전을 펼치기 위한 기일을 정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654년 진덕여왕이 죽고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김유신은 재상 알천(閼川)과 모의하여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했다. 알천도 쾌히 동의했다. 김춘추야말로 제세(濟世)의 영걸(英傑)이라고 무열왕은 즉위 2년(655)에 자기의 셋째 공주 지소(智炤)를 김유신에게 시집보냈다. 이로써 이들은 중첩적인 혈연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김춘추와 김유신의 결합은 삼국통일의 의지를 구체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전개되었다. 젊은 시절 통일의 염원을 간직했던 이들이 훗날 삼국통일의 주역을 담당했던 것이기에 신문왕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어진 덕이 있었던 선왕(先王) 춘추는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삼한을 통일하였다.” 원효는 어느 날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나. 내 하늘 받칠 기둥을 다듬고자 하는데.” 사람들은 그 노래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태종만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아마도 이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구나. 나라에 대현(大賢)이 있으면 그보다 더한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 당시에 요석궁(瑤石宮)에는 과부공주가 있었다. 왕은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궁리가 칙명을 받들고 원효를 찾고 있을 때 원효가 남산으로부터 내려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가 만났다. 원효는 일부러 물속에 떨어져 옷을 적시었다. 궁리는 원효대사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말리게 하니,그 곳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공주는 과연 아이를 배더니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명민하여 경서와 역사서에 두루 통달했다. 그는 신라 십현(十賢) 중의 한 분이다. 수도승이 저자거리를 헤매는 것도 이상한 일인데 당대의 이름난 고승 원효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리겠다고 거리에서 노래하며 다니다니 그것은 놀라운 사건이었다. 천주(天柱), 즉 하늘 받칠 기둥은 지상과 천상을 이어주는 우주목이다. 이 나무는 세계의 중심에 있는 것이고, 모든 것을 떠받치는 우주의 기둥인 셈이다. 그러나 원효가 부르는 노래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한 사람은 있었다. 구만리 장천(長天)을 날고자 하는 대붕(大鵬)의 꿈, 그 꿈을 단번에 눈치 챈 대인(大人)은 바로 국왕이었다. 세상을 구제하려던 꿈을 젊은 날부터 가슴에 품었던 태종무열왕은 원효의 마음을 쉽게 헤아릴 수 있었다. 단번에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김춘추는 그런 눈을 가진 왕이었다.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만들 수 있다는 원효,그는 자신이 그 천주의 소유자임을 자인(自認)했고,이 위대한 자인을 알아준 사람은 무열왕이었던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사람을 지음(知音)이라고 한다. 지음은 곧 지기(知己)다. 무열왕과 원효는 상대방의 말을 알아들었고 가슴속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단 말인가. 원효의 큰 뜻을 무열왕이 알아서 원효를 요석궁으로 안내하도록 했고,원효 또한 그 뜻에 따랐다.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을 적시면서까지 원효의 결혼도 다분히 정략적이다. 골품제가 생활을 규제하고 있던 신라에서는 결혼도 신분에 따라서만 가능했다. 그러나 원효의 결혼은 그 제약을 단숨에 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치적 야망 때문에 원효가 요석궁으로 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에게 요석궁은 세속으로 향하는 문이었을망정 권력의 상징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나라에 이로운 큰 인물을 얻고자 했던 무열왕의 입장은 또 달랐다. 아무튼 정치외교가 김춘추와 장수 김유신,사상가 원효,당대에 가장 위대한 이들 세 사람은 결혼이라는 인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Beopbo Vol 1084         김상현 동국대 명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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