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7. 백제의 미륵사 창건

浮萍草 2013. 5. 11. 06:00
    전륜성왕 통치 구현하려 했던 백제왕실의 비원 
    
    백제왕실 불국토의 꿈 미륵사 창건으로 표출
    전륜성왕 권위 의탁해 왕실 존엄 제고 의도
    백제 무왕 40년(639) 건립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 지
    난 2009년 1월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과정에서 미륵사가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왕후의 발원과 정재 희사로 창건된
    왕실의 원찰임이 밝혀졌다.
    느 날 백제의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에 가기 위해 용화산 아래의 큰 못가에 도착했다. 이때 못 속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났다. 일행은 수레를 멈추고 치성을 드리며 경의를 표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여기에 큰 절을 지어주십시오. 저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사자사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었다.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사이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이에 불상과 미륵삼회전(彌勒三會殿)과 탑과 회랑(回廊) 등을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彌勒寺)라고 했다. 이상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이다. 용화산 아래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했다는 설화는 미륵하생을 의미 한다. 연못을 메운 곳에 미륵삼회(彌勒三會)의 불전과 탑과 낭무를 세 곳에 두었음은 미륵불의 용화삼회 설법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용화삼회는 미래에 하생할 미륵보살이 화림원(花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고 3번의 법회를 개최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으로 미륵삼회라고도 한다. 미륵삼회를 상징하는 삼원(三院)의 독특한 가람배치를 가진 미륵사를 창건했던 것인데,이 사실은 이 절터의 발굴을 통해서도 확인되었다. 미래세에 미륵불이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중생들을 다시 구제할 것이라 는 미륵신앙은 불교의 중요한 구원신앙이자 희망의 신앙이다. 미륵신앙은 상생신앙(上生信仰)과 하생신앙(下生信仰)으로 구별되는데, 미륵하생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 56억7천만년이 지나면 미륵불이 사바세계에 출현할 것이다.
    그 때의 이 세계는 이상적인 국토로 변해 있을 것이다. 땅은 유리와 같이 평평하고 깨끗할 것이며 꽃과 향이 뒤덮여 있다. 인간의 수명은 8만4천세나 되며, 지혜와 위덕이 갖추어져 있고, 안온하고 기쁨에 차 있다. 이 세계에 계두말(鷄頭末)이 있고, 이곳은 상카라는 전륜성왕이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 이 나라에는 수없는 보배들이 길거리에 즐비하지만, 사람들은 이 보배를 손에 들고 “옛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서로 싸웠지. 그러나 오늘날은 이것을 탐하거나 아끼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세상에 미륵이 태어난다. 미륵은 출가하여 용화수(龍華樹) 밑에서 성불한다. 그리고 미륵불은 3회에 걸쳐 설하는데 1회에는 96억 인이, 2회에는 94억 인이 3회에는 92억 인이 각각 아라한과를 얻을 것이다. 이것이 용화삼회(龍華三會)의 설법이다. 경전에 의하면, 미륵불이 이 세상에 출현할 때 샹카라는 전륜성왕이 등장하여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린다고 한다. 그리고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할 때 이 세상은 낙토로 변하고 나라는 깨끗이 잘 정돈되어 온갖 재난은 사라진다고 했다. 미륵신앙은 유토피아적 이상세계에 대한 동경과 희구라는 특징을 지닌다. 그러나 미륵불의 세상은 사람들의 노력과 공덕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미륵신앙은 희망의 신앙이지만 동시에 끊임없는 정진의 신앙이기도 하다. 결국 미륵하생신앙은 미륵불이 출현하는 국토의 풍요로움과 안락함에 대해 설함으로써 중생으로 하여금 죄악의 종자와 모든 업장과 번뇌의 장애를 끊고 자비심을 닦아서 미륵불의 국토에 나도록 하는 것이다. 십선법(十善法) 등의 수많은 공덕을 닦은 결과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아름답고 풍요로운 유토피아는 수많은 공덕이 모여서 이룩되는 장엄의 표현이다. 아무튼, 백제 왕실은 불국토의 건설을 꿈꾸었고 그것은 미륵사의 창건으로 표출되었다. 미륵불이 하생할 때 이 세상에는 전륜성왕이 등장한다는 경전 내용에 유의하면, 백제 왕실의 미륵사 창건의 배경에도 전륜성왕의 권위를 빌려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던 정치적 의도도 보인다. 물론 전륜성왕의 정법에 의한 통치라는 불교적 이상을 현실 정치에 구현하려 했던 희망도 없지는 않았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미륵사 창건연기 설화에 의하면 미륵사 창건을 발원한 이는 왕비이고 그 왕비는 선화(善花)공주였다. 최근 미륵사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에 의하면 미륵사 창건의 발원자는 무왕의 왕비인 사택왕후(沙宅王后)로 되어 있다. 사리봉안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만히 생각하건데, 법왕(法王)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근기(根機)에 따라 부감(赴感)하시고 중생에 응하여 몸을 드러내신 것은 마치 물 가운데 비치는 달과 같았다. 때문에 왕궁에 의탁해 태어나 사라쌍수(娑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8곡(斛)의 사리를 남겨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를 이익 되게 하셨다. 마침내 찬란히 빛나는 오색(사리)으로 일곱 번을 돌게 하였으니 그 신통변화(神通變化)는 불가사의하였다. 우리 백제왕후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서 오랜 세월[曠劫] 동안 선인(善因)을 심으시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 를 받으셨다. (왕후께서는) 만민(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다. 때문에 삼가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 원하옵건대, 세세토록 공양하여 영원토록[劫劫]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으로 우러러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나란히 견고 하고, 왕위[寶曆]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크게 하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소서. 다시 원하옵건대 왕후께서는 마음은 수경(水鏡) 같아서 법계(法界)를 항상 밝게 비추시고 몸은 금강(金剛)과 같아서 허공과 같이 불멸(不滅)하시어 칠세(七世)를 영원토록 다함께 복리를 받고 모든 중생들이 다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 ㆍ7세기 초 삼국에서도 사리신앙 급격히 확산 사리 수호주체는 왕실 미륵사 등에 각각 봉안
    석탑 내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

    이 발원문 중에서도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왕후가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는 기록은 미륵사 창건 연대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된다. 기해년은 백제 무왕 40년(639)에 해당한다. 미륵사는 왕후의 발원에 의해서 그리고 왕후가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창건한 왕실의 원찰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백제 왕실에서는 미륵사를 창건하여 국왕과 왕후의 연수(延壽)를 발원했다. 실로 백겁을 지나도 만나기 어려운 분,세상에 존귀한 분 그 분 붓다가 열반에 들었을 때, 북인도의 여러 통치자들은 불사리에 대한 그들의 몫을 요구했고 붓다가 남긴 8곡(斛)의 사리는 8등분 되어 8개 국가에 분배되었다. 사리 분배를 감독했던 드나 브라흐만은 사리를 담았던 단지를 보관했고 늦게 도착했던 모리야족은 화장터에 남은 재를 가져갔다. 그들은 각각 탑을 세워 불사리를 봉안하고 공경했다. 붓다의 유골인 불사리는 살아있는 붓다처럼 신성하게 여겨졌다. 점차 많은 나라에서 불사리가 중시되고 신앙되었다. 중국의 사리탑 신앙은 육조로부터 수대에 이르면서 차차 깊어졌는데 수나라 인수년간(601~604)의 사리탑 건립 사업은 가장 활발 했다. 바로 이 무렵 고려·백제·신라의 세 나라에서도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각각 1과의 사리를 요청했는데,본국에 불탑을 세워 공양하기 위함이었다. 수의 황제는 이를 허락했는데, 곧 601년의 일이었다. 이렇게 해동 삼국에도 당연히 사리신앙은 행해졌고,백제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위덕왕 때에 건립된 능산리사지의 탑과 왕흥사의 탑 속에는 불사리가 봉안되었음이 최근의 발굴 성과로 확인되고 있다. 부여 능산리사지의 목탑지 심초석 위에서 발견된 석조사리감(石造舍利龕)의 명문에 의하면,백제 창왕,즉 위덕왕 13년(567)에 매형 공주(妹兄公主)가 사리를 공양한다고 했다. 성왕의 딸이자 위덕왕의 누이동생으로 생각되는 공주가 공양했던 사리는 아마도 불사리였을 것이다. 위덕왕은 577년 2월15일에 죽은 왕자를 위해서 왕흥사(王興寺)에 찰주를 세우고 사리 2매를 봉안했다. 위덕왕은 587년에 승려 혜총(惠總) 등을 일본에 보내어 불사리를 전했고 이 불사리는 593년에 법흥사(法興寺) 탑의 심초 중에 안치 되었다. 무왕 40년,제석사가 불타고 불사리를 봉안한 수정병에 사리가 보이지 않자 국왕은 법사를 청하여 참회하고 다시 열어보니 불사리 6과가 고스란히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불사리의 불가사의한 영험을 직접 목격한 무왕과 궁인들의 사리에 대한 신앙은 더욱 깊어졌던 것 이다. 백제의 사리신앙에 신이한 영험담은 이미 위덕왕 때부터 있었다. 왕흥사에 모신 사리 2매는 신이한 조화로 셋이 되었다고 한다. 미륵사 서탑의 사리봉안기에도 오색으로 빛나는 사리가 일곱 번을 도는 등 그 신통변화가 불가사의함을 강조했다. 5세기 중반 경 남조 불교계에서 진신사리가 보인 여러 신이(神異)와 비슷하다. 붓다의 열반으로부터 천년 세월이 흐른 후 머나먼 동쪽의 나라 백제인들,그들도 붓다를 사모했다. 진정 만나기 어려운 분, 그 분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역시 불사리 신앙이었다. 의례는 세속적이고 연대기적인 시간을 폐지하고 신화의 성스러운 시간을 회복해 준다. 그러기에 사리신앙과 관련된 의식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현존하는 듯한 붓다를 만날 수 있다고 믿었다. 백제 무왕 40년(639) 정월 29일 미륵사 서탑에 불사리를 봉안하는 의식이 진행되었다. 국왕과 왕후, 그리고 많은 대신과 귀족은 물론 그날 그 곳에 참석할 수 있었던 모든 대중들은 불사리를 봉안하면서 마치 지금 여기 에서도 살아 있는 석가모니로 만나는 기쁨으로 감격했을 것이다. 당시 백제인들의 붓다를 향한 공경심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다. 신성한 불사리를 수호하는 주체가 왕실이었음은 백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왕흥사·제석사·미륵사 등 세 사찰의 사리 봉안 주체는 모두 백제 왕실이었다. 사리의 신성성에 의탁해서 왕실의 존엄을 고양시키려는 정치적 상징으로 이용한 사례는 이미 여러 나라에서 있었고 백제 또한 마찬 가지였다.
    Beopbo Vol 1085         김상현 동국대 명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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