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1. PROLOG 연재를 시작하며

浮萍草 2013. 3. 30. 06:00
    삼한〈三韓〉은 핏빛 절망과 희망 뒤얽힌 격동의 시대 
    전란의 소용돌이에서 충성·배신·욕망 난무
    피로써 피를 씻어내는 참혹한 살육도 잇따라

    7세기 중반 한반도 지도
    나간 세월 중에서 중요하지 않은 시기란 없지만,그래도 더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더 큰 변화를 수반했던 시기는 더욱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7세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7세기는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급격한 변화가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동 삼국간의 극심한 항쟁이 꼬리를 물었던 시기이면서 동시에 길고 긴 전쟁이 신라의 삼국통일로 막을 내린 때이기도 하고 영웅적인 인물들이 활동했고 뛰어난 사상가가 배출되기도 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7세기에 대한 연구는 적지 않았다. 삼국통일전쟁사나 나당전쟁사 같은 전문적 연구도 있고,개별 주제나 인물에 대한 저술도 있다. 그리고 이 시기 불교사에 관한 연구의 축적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 연구들은 별개로 구분되어 있다. 같은 7세기에 일어났던 사건이고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에 관한 이야기 임에도 연결이 적다. 자장과 원효가 그렇고 김유신과 김춘추가 그렇다. 7세기 동아시아와 한반도,그리고 당시의 정치와 사회, 그리고 종교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바라보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사란 연기(緣起)이다. 세상만사는 얽히고설켜 있는 하나의 그물 같은 것이고, 크고 작은 수많은 사건은 모두 관련되어 있게 마련이다. 종합적이고 전체적인 시각으로 역사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7세기에 발생했던 수많은 사건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애환 등 이 시기의 역사를 전해주는 기록은 너무나 적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세월 따라 기억도 사라져 당시 사람들의 그 많은 사연들 중에 전하는 것이란 편린뿐이다.
    그나마 어떤 기록은 설화로 윤색되고 어떤 기록은 앞뒤가 단절된 채로 전한다. 단편적 기록은 기억 상실의 막막한 상황으로 내몰 때도 있지만 때로는 설화적인 기록을 통해서 역사의 의미를 되새길 수도 있다. 7세기는 전쟁의 시대였다. 중국에서 일어난 수당제국의 팽창에 의한 물결은 고구려로 백제로 밀려들었고 해동의 삼국도 서로 싸웠다. 삼국의 항쟁은 이미 6세기 중반부터 치열했지만 7세기 중반부터는 더욱 심했다.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를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를 서로 공격했다. 어느 때는 신라와 백제가 연합했는가 하면 또 어느 때는 고구려와 백제가 손을 잡고 신라를 고립시키기도 했다. 어제의 동맹국도 이해관계가 어긋나면 원수처럼 싸웠다. 아직 민족의식은 없었다. 신라에서는 608년(진평왕 30)에 수나라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치기 위해서 원광에게 걸사표(乞師表)를 짓도록 했고 645년 5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해 왔을 때 신라에서는 군사 3만을 내어 도왔으며,백제는 그 틈을 타서 신라의 서쪽을 공격하여 일곱 성을 빼앗기도 했다. 660년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668년에 고구려도 망했다. 역시 나당연합군에 의해. 침략은 또 다른 침략을 불렀고, 원한은 또 다른 원한을 낳았다. 651년(의자왕 11) 당 고종이 백제 의자왕에게 보낸 조서 중에서 말했다. “해동 삼국이 나라를 세운지 오래며 경계를 나란히 하나 땅은 실로 들쭉날쭉하다. 근래로 마침내 의혹과 틈새가 생겨 전쟁이 번갈아 일어나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고 마침내 삼한의 백성으로 하여금 목숨을 칼과 도마 위에 올려놓게 하고 무기를 가지고 분풀이 하는 것이 아침저녁으로 서로 이어졌다.” 그야말로 이 무렵 삼한(三韓) 사람들의 목숨은 도마 위에 있었다. 참혹한 전쟁은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인양 앗아갔다. 수천수만의 목숨이 낙엽처럼 떨어져 갔다. 629년 신라가 고구려 낭비성을 침공하여 5천여명을 목 베어 죽였다. 645년 수나라 군대에 의해 고구려의 비사성이 함락되고 남녀 8천명이 죽었다. 645년 신라 변경을 침략한 백제병 2천명을 목 베었다. 647년 신라를 침략해온 백제병 3천 명을 목 베었다. 649년 공격해온 백제병 8980명을 목 베었다. 661년 고구려 군사 3만명이 당나라 군사에게 죽었다. 667년 고구려 군사 5만 명이 당나라 설인귀군에 의해 죽었다. ‘삼국사기’에는 이런 죽음의 기록이 즐비하다. 전쟁은 인간의 귀한 생명을 너무나 쉽게 앗아갔다. 어디 그 뿐이든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고통은 또 어떠했겠는가? 적에게 잡혀서 먼 타향으로 끌려가기도 했고 전염병에 휩싸이기도 했으며 전쟁터로 끌려간 남편 소식을 기다리다 지친 아내인들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왜 그래야만 했을까? 해동 삼국은 왜 이렇게 싸워야 했을까? 죽기 살기로 싸워야 했을까? 어떤 사람은 말한다. 삼국통일을 위해서라고 또 어떤 이는 말한다. 싸우다 보니까 통일이 된 것이라고. 사람들은 싸웠다. 살기 위해서 싸웠고,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 처절하게 싸우고 또 싸웠다. 그 전쟁의 와중에서 영웅적인 인물도 배출되었고 목숨을 던져 충성한 사람도 있었다. 물론 배신자도 있었고, 죽어서 이름을 남긴 사람도 있었다. 수나라의 군사를 살수대첩에서 궤멸시킨 을지문덕과 당 태종의 집요한 공격에도 끝까지 안시성을 지켜낸 양만춘은 고구려의 영웅 이었고, 결사대 5천명으로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막아섰던 백제 장군 계백은 만고의 충신이었다. 나당군사 동맹을 이끌어낸 김춘추는 뛰어난 외교가였으며, 신라 장군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다. 그래도 전쟁이 끝나고 통일의 시대도 왔다. 비록 고구려의 광활했던 영토는 차지하지 못한 불완전한 통일이었지만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 수 있었고 일통삼한(一統三韓) 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 일통삼한 인식은 민족의식과 무관하지 않았고 당시 사람들은 불교가 삼국통일에 기여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ㆍ숱한 전쟁 영웅들과 뛰어난 사상가 등장
    탄식과 눈물 속에도 춤·노래·사랑 있어

    전쟁 중에도 사람들은 불교를 믿었다. 아니 전쟁의 고통이 심할수록 평화를 희구했고 현실의 삶이 힘겨울수록 아름다운 세상 불국(佛國)을 꿈꾸었다. 전쟁의 시대에는 출가 수행자까지도 조용히 수행에만 전념할 수 없게 했다. 원광은 망설이면서도 군사 원조를 청하는 걸사표(乞師表)를 지어야 했고 도옥(道玉)은 승복을 벗어던지고 전쟁터로 달려가기도 했다.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의상은 당의 신라 침공 소식을 조정에 알렸고 명랑은 사천왕사 창건을 건의하여 당나라 군사의 격퇴를 빌기도 했다. 전쟁의 와중에도 구도의 길을 간 사람도 있다. 바다를 건너고 사막의 길을 넘어서 서역으로 간 구도자도 있고 당나라로 간 사람도 있다. 그 어떤 상황과 조건도 이들 구도자의 앞길을 막지 못했다. 7세기 전반 서역으로 갔던 신라의 구법승들은 히말라야를 넘었고 천축의 여러 성지를 순례했으며 나란타대학에서 유학하기도 했다. 그들은 비록 신라로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그 구도의 열정까지 무상한 세월 따라 잊혀질 수야 없다. 자장과 순경과 혜통과 의상 등은 모두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신라에서 활동한 고승이다. 그러나 원효는 해외에서 배우지 않고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백제 출신의 경흥 고구려의 보덕 등도 이 시대의 손꼽히는 고승이다. 전쟁의 시대에도 사찰은 창건되었다. 백제에서는 대통사,왕흥사,미륵사 등을 세웠다. 미륵사는 무왕 때에 세운 왕실의 원찰이었다. 신라에서도 분황사,영묘사,장의사,통도사,사천왕사,부석사 등을 세웠다. 장의사는 전쟁에서 죽은 장춘랑과 파랑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고 사천왕사는 침략해 오는 당나라 군사 격퇴를 기원하면서 세운 절이었다. 사람들은 탑을 세우고 불상을 조성하면서 공덕 닦기를 빌었고, 어렵게 살던 사람들도 불사에 보시할 줄 알았다. 혼란하고 어렵던 시절이라고 눈물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노래도 있었고 춤도 있었고, 기쁨도 있었고 웃음도 있었다. 그리고 사랑도 있었다. 혜공은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었고, 원효도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다니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대중을 교화했다. 그리하여 삶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했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웠다. 대안(大安)대사는 항상 거리를 다니면서 대안대안(大安大安)이라고 노래했기에 사람들이 불러준 호칭이었다. “크게 편안하라. 크게 편안하라.” 이 노래는 거리의 설법이었고 축원이었던 셈이다. 물론 사랑도 있었다. 사랑의 기쁨과 사랑의 아픔도 있었다. 선덕여왕을 사모하던 청년 지귀(志鬼)는 상사병으로 죽을 만큼 여왕을 혼자서 짝사랑했다. 백제 청년 서동은 국경을 넘어 신라로 가서 선화공주를 유혹하는데 성공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와 눈이 맞았다. 7세기 한반도에서 살았던 삼한(三韓) 사람들의 절망과 희망,그리고 현실의 삶과 그들이 꿈꾸던 희망의 세계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7세기 한반도에서 살았던 사람들 그들의 삶의 현장으로 다가서고 싶은 생각으로 인해 이 모험의 글을 시작하는 것이다.
    ㆍ김상현 교수
    경상대를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한국불교사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및 한국교원대 교수와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장을 역임했고, 동국대 명예교수 . 저서로 ‘원효연구’, ‘신라의 사상과 문화’, ‘신라화엄사상연구’, ‘역사로 읽는 원효’, ‘한국불교사 산책’,‘한국의 차시’ 등이 있고, 10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Beopbo Vol 1079         김상현 동국대 명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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