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원당 이야기

26 전쟁 트라우마, 왕을 망가뜨리다

浮萍草 2013. 6. 2. 07:00
    ㆍ명석했던 선조, 임란 후 비겁한 군주로 전락
    피난길 들른 ‘안국’ 편액에 불편한 심경 담아
    탁효정 전임연구원
    위초 선조는 매우 명석한 왕이었다. 학문을 좋아한 선조는 이이나 정인홍 같은 유학자 관료들을 불러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기를 즐겼다. 선조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유학자들이 반박하는 그 자체를 즐겼다. 유생들이“불교를 배척하라”는 상소를 올리면 선조는“너희가 훗날 참된 선비가 되어 조정에 나와 치도 (治道)를 융성하게 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한다면 유학이 제 빛을 발휘하고 불교는 저절로 쇠할 것인데, 굳이 승려를 죽이고 사찰을 헐 필요가 무에 있냐”고 반문하곤 했다. 이처럼 유연한 사고를 지니고 있던 선조의 모습은 임진왜란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선조가 재위한 지 25년 되던 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이 전쟁은 선조의 정신세계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국가를 위기에 빠트린 왕,도성을 버리고 백성을 내팽개치고 떠난 왕,제 한 몸 살리기 위해 명으로 망명하려 했던 왕, 이 같은 자괴감이 선조를 괴롭혔다. 아들 광해군이 선전해 의병들을 모집한 것도, 이순신이 왜적의 보급로를 차단해 국난을 헤쳐나간 것도, 자발적으로 의병으로 나선 이름 없는 백성들도 선조에게는 자신을 겨누는 칼날로 다가왔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선조는 비겁하고 교활한 군주로 변해갔다. 스스로가 작아보일수록 ‘나는 왕이야’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커져갔다.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장수 이순신은 수많은 의문을 남긴 채 한산도대첩에서 전사했다. 의병장 이산겸은 의병을 해산시키지 않은 저의가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처형되었고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는 전쟁 직후 각각 묘향산과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임란 이후 세 등급의 공신이 매겨졌는데,선조를 호위해 의주까지 따라갔던 신하들은 무려 86명이나 호성공신(扈聖功臣)이라는 칭호 를 받았다. 반면 왜적과 직접 맞서 싸우거나 난을 진압한 장수들은 겨우 18명만이 선무공신(宣武功臣)이라는 녹훈을 받았다. ‘왕을 호위해 대동강까지 도망간 공로’가 최고의 공로로 인정된 꼴이다. 호성공신이라는 민망한 녹훈을 받은 신하들은 공신첩이 내려지기 3일전 선조에게 ‘지극한 정성으로 대의에 힘써 하늘에 닿을 만큼 큰 운을 일으킨 왕(至誠大義格天熙運)’이라는 존호를 갖다바쳤다. 이같은 상황은 불교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수많은 희생자를 배출한 불교계에 대한 처우는 임란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승군들의 우수성을 치켜세우며 대가 없는 군역을 무지막지하게 부과했을 뿐이다. 전국의 승려들이 산성을 쌓거나 제방을 축조하는데 차출됐고,산성을 지키며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대신 선조의 피난처를 마련해주었거나 태조의 어진을 잠시 보관했던 사찰은 왕실원당으로 지정되었다. 평안도 평성의 안국사는 임란 당시 의주로 도망가던 선조가 피난길에 잠시 머물렀던 사찰이다. 원래 봉린사(鳳麟寺)라 불렸던 이 절은 잠시 천룡사(天龍寺)라 불리다가 선조가 안국(安國)이라는 이름을 하사하면서 안국사로 개칭 되었다. ‘나라를 평안케 하리라’는 글씨 속에는 종묘사직을 버리고 황급히 도망가던 선조의 불편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하다. 조선 역대 왕들 중에서 가장 글씨를 잘 쓴 왕,율곡과 맞장을 뜰 정도로 명석했던 왕,조선의 사림정치를 최초로 개막한 왕,출신가문 보다 능력을 더 중시했던 왕, 이러한 선조의 모습은 임진왜란 이후 모두 퇴색되고 말았다. 재위말 선조의 모습은 전쟁의 상처를 온몸에 입은, 자기방어 본능만 남은 무능한 군주에 불과했다.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불교신문 Vol 2897

      草浮
    印萍

'萍 - 저장소 ㅁ ~ ㅇ > 왕실원당 이야기 ' 카테고리의 다른 글

28 정업원 (下)  (0) 2013.06.08
27 봉인사  (0) 2013.06.05
25 화장사 (호국지장사)  (0) 2013.05.30
24 토당사  (0) 2013.05.27
23 금강산의 왕실원당  (0) 2013.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