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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금강산의 왕실원당

浮萍草 2013. 5. 24. 07:00
    “살아생전 가보고 싶다, 금강산
    
    ㆍ한국에만 있는 담무갈보살 성지로 여겨
    조선왕실도 보호…한국 대표고승들 배출
    종 16년(1485) 일본에서 앙지라는 노스님이 사신으로 조선에 왔다. 
    당시 일본은 불교국가였기 때문에 사신단 가운데 스님이 한두 명씩 포함되곤 했다. 
    이 스님은 성종에게 금강산 유점사를 한번만 구경하게 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했으나 성종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연세도 많으신데 길이 너무 험하니 그냥 다른 좋은 데나 구경하시지요.”
    하지만 이 스님은 막무가내였다. 
    “일흔이 넘은 노승이 어찌 감히 대국에 다시 오겠습니까. 
    금강산을 구경하다가 눈 속에서 죽더라도 여한이 없겠으니,제발 보내만 주십시오.” 
    이 스님의 시봉은 한술 더 떠서 “비록 우리 스승과 한 구덩이에 같이 죽더라도 금강산을 한번 가보고 싶다”고 애원했다. 
    결국 성종 이하 조정 대신들이 모두 백기를 들었고 이 노스님은 꿈에 그리던 금강산 유람을 떠났다.
    외국 사신들이 금강산에 가겠다고 떼를 쓴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태종 때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단은 국경을 넘어서면서부터 ‘금강산,금강산에 한번만 가봤으면’ 하고 노래를 불렀다. 
    태종을 접견한 명의 사신들은 “우리나라에는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을 꼭 한번 가보고 싶다’(願生高麗國 親見金剛山)는 속담이 
    있습니다. 
    꼭 한번 금강산에 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며 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태종이 ‘왜 이런 속담이 생겨났냐’고 묻자 사신이 대답하기를,“금강산에는 담무갈보살(법기보살)이 상주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금강산은 동아시아 불교사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산이다. 
    오대산,보타산,용문산,아미산 등 보살 상주처의 ‘오리지널’이 대부분 중국에 있는 것과 달리 금강산만은 조선에 있는 불교성지이기 
    때문이다.
    <화엄경>‘제보살주처품’에는“동북방의 바다 가운데에 금강산이 있으니,담무갈보살이 일만이천의 보살들과 더불어 항상 반야심경
    을 설법하는 곳”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중국인들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동북쪽의 담무갈보살 상주처를 조선의 금강산이라 믿었다. 
    중국의 황제들 또한 조선으로 가는 사신에게 번과 기를 내려 금강산 사찰에 봉안하라고 명했다. 
    황제의 특명을 받았으니, 조선에 파견된 사신들은 금강산에 갈 온갖 명분을 들이대고 나중에는 협박까지 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외국 사신들의 금강산유람은 조선왕조 입장에서 매우 불편한 사안이었다. 
    사신들이 금강산에 들르게 되면 경유하는 지방 관아나 민가에 끼치는 피해가 막대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여행 과정에서 국가
    기밀이 유출되거나 간첩활동이 발생할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조선정부는 사신들이 유람을 떠나기 전에 각 관아의 문서와 사찰의 사적을 모두 감추고 문제가 될 만한 건물의 현판까지 
    철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정부의 난색에도 불구하고 사신들에게 있어서 금강산은 살아생전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그곳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한 ‘법기보살 상주처’였기 때문이다.
    금강산은 이처럼 외국 사신들뿐만 아니라 조선왕실에서도 매우 특별한 성지로 추앙됐다. 
    금강산에 있는 수백여 개의 사찰들은 조선시대 내내 왕실의 보호를 받았다. 
    금강4사,즉 유점사,장안사,신계사,표훈사 등 금강산의 대표사찰들이 조선 500년간 사세를 유지한 것은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금강산 사찰에 마련된 어실(御室)에는 역대 왕들의 위패가 모셔졌고,왕비나 대비전에서 보낸 용상과 촛대,향로,연(輦) 등이 안치
    됐다. 
    또한 사원전과 사패지가 지급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찰 중수 때마다 수백장의 공명첩이 하사되었다. 
    장안사의 ‘장하던 금전벽우(金殿碧宇)’는 실로 왕실 비빈들의 불심의 흔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처럼 왕실의 보호를 받은 금강산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조선불교의 산실로 기능하였으니,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수많은 고승들도 
    자연스럽게 금강산에서 배출되었다.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불교신문 Vol 2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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