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원당 이야기

4 내원당 (上)

浮萍草 2013. 3. 27. 07:00
    불교 경멸한 태종이 원당 세운 까닭
    선 역사상 가장 불교를 싫어한 왕은 태종이었다. 
    다른 왕들처럼 유학자들을 달래기 위해 립서비스로 싫어한 게 아니라 진짜로 불교를 마뜩찮아 했다.
    불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태종은 늘 ‘허황되고 망령된, 혹세무민하는 종교’라고 비난했다. 
    그는 불교의 영험담도 싫어했다.
    아들 세종에게 “내가 죽은 뒤에 내 무덤 근처에는 절대로 절을 세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할 정도였다. 
    조선시대 사원전이 1/10로 줄어든 것도 전국의 사찰이 242개를 제외하고 모두 혁파된 것도 태종에 의해서였다.
    그렇다고 태종이 특별히 나쁜 경험이 있어서 불교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태종은 젊은 시절 원주의 각림사에서 공부했는데 왕이 된 이후“꿈에 그 절과 산천이 자주 나타난다”고 할 정도로 각림사를 그리워
    했다.
    그래서 태종 14년에는 원주 각림사에 직접 거동했고,재위기간 내내 토지와 노비,곡식 등을 하사했다. 
    그렇지만 태종은 각림사를 끝내 자신의 원당으로 삼지 않았다.
    태종이 불교를 싫어한 이유는 어렸을 때 성균관에서 받은 유교식 교육과 타고난 냉혹한 성정,통치 수단으로서의 필요성 등 여러 
    요인을 들 수 있다.
    그런 태종이 재위 6년째인 1406년,돌연 궁궐 안에 불당을 지으라고 명했다. 
    태종은 한양으로 재천도를 하면서 창덕궁을 조성했는데 이때 인소전의 부속불당 즉 내원당을 다시 설치할 것을 명한 것이다.
    
    ㆍ생모 추숭에 소홀함 없게 
    진전에 부속 불당 설치하는 
    고려 유습 그대로 받아들여
    그토록 불교를 싫어한, 특히 기복신앙을 매우 경멸했던 태종은 왜 궁궐 안에 불당을 지으라고 한 것일까. 이유는 불당의 주인이 그의 생모 신의왕후였기 때문이었다. 인소전은 신의왕후의 초상화를 모신 진전으로,태종은 어머니를 위한 추숭시설로 창덕궁 안에 진전을 마련한 것이다. 신의왕후는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왕비였던 적이 없었다. 태조가 신덕왕후의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삼았던 것 또한 이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엄밀히 말해 조선의 첫 번째 왕비는 신덕왕후이므로, 그의 소생이 조선왕조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따라서 신의왕후의 소생인 정종과 태종은 자신들의 생모 추숭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의왕후를 정실부인으로 높이고 신덕왕후를 첩으로 강등시키면 자연히 자신들은 적자가 되고, 방간과 방석은 첩의 자식이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태종은 이성계가 죽은 후 신덕왕후를 첩으로 강등시키고 정릉을 도성 밖으로 내쫓았다. 하지만 이성계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신덕왕후를 첩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자신의 생모를 추숭하는 방식을 택했다. 정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신의왕후의 능침사인 연경사를 중창했고 태종 또한 인소전을 지으면서 불당을 마련해 생모의 추숭시설로 삼은 것이다. 태종이 내원당을 설치한 또 하나의 이유는 불교적 예제가 여전히 왕실의례의 대부분을 차지한 점을 들 수 있다. 생모의 추숭시설에 조금의 소홀함도 없게 하고 싶었기에 진전에 부속불당을 설치하는 고려의 유습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런 경향은 태종뿐만 아니었다. 조선을 건국한 주체들도 비록 몸은 조선을 살아가고 있었지만,정신세계는 여전히 고려에 머물러 있었다. 관료들 또한 조정에 나와서는 불교가 이단이니 미신이니 하고 떠들었지만, 집으로 돌아가서는 불교식 제사를 지냈다. 부모가 죽었을 때도 스님들을 불러 장례를 치렀다. 태종이 그들을 보고 “지금 불사를 행하지 않는 자는 오직 하륜뿐이다. 그 나머지 유자들은 남몰래 불사를 행하지 않는 자가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조선 전기에는 불교가 아닌 유교식으로 장사를 지낸 사람이 있으면 실록에 그를 칭송하는 글이 실렸다. 이를 뒤집어보면, 그만큼 유학자 집안에서도 불교식 상장례가 일반적이었다는 것이 된다. 천하의 태종도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추숭시설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던 것처럼 조선시대 사대부들 또한 부모의 장례나 제사를 불교 식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조선전기에 왕실원당이 꾸준히 설치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기도 했다.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불교신문 Vol 2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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