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원당 이야기

3 흥천사

浮萍草 2013. 3. 20. 07:00
    태조의 비통함 고스란히 깃들어
    
    1399년 10월,흥천사의 완공을 맞아 태상왕 이성계가 한양으로 돌아왔다.
    죽은 아내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찾아온 이성계에게는 조선왕조 개창자라는 허울좋은 이름만 남았을 뿐 그의 마음은 산산조각 난 유리
    병처럼 텅 빈 고통과 날카로운 비통함만으로 가득했다.
    이성계는 아내의 영혼이나마 가까이에 두고 싶어서, 궁궐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도성 안에 절을 지었다. 
    궁궐에서 보일만큼 높다란 사리탑도 세우도록 했다. 
    하지만 그 절이 완공되기도 전 이성계는 둘째아들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훌쩍 떠나버렸다.
    신덕왕후 강씨는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기까지 최고의 협력자였다. 
    함흥의 이름 없는 무장에 불과했던 이성계가 고려 귀족사회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권문세족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때 정략결혼의 파트너로 선택된 여인이 스무 살 연하의 강씨였다.
    그녀는 탁월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이성계를 귀족사회의 일원으로 진입시켰다. 비록 정략으로 맺어진 부부였지만 강씨에 대한 
    이성계의 사랑은 지극했다. 
    이성계 스스로 강씨를 “개국을 함께한 충성스러운 신하〔良佐〕”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야심만만했던 강씨는 이성계를 조선왕조의 주인으로 만든 뒤,자신의 소생으로 하여금 그 뒤를 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세자로 책봉된 아들 방석이 보위에 오르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병을 얻어 마흔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신덕왕후가 죽은 지 이태 뒤에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때 이방원은 강씨 소생의 두 아들 방간, 방석과 사위 이제까지 모조리 죽였다. 
    어린 자식들의 죽음을 목격한 이성계는 왕위를 정종에게 양위했다.
    
    ㆍ사랑한 아내와 어린 자식들
    그들을 위한 노쇠한 왕의
    유일한 카드가 흥천사 창건
    얼마 뒤 이성계는 홀로 남은 막내딸 경순공주를 살리고자 비구니가 되게 하였다. 실록에는 “공주의 머리를 깎을 때가 되자 태상왕의 눈에서는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고 기록돼 있다. 도성을 떠난 이성계는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녔다. 낙산사에 며칠 머물다 그 뒤엔 관음굴로,회암사로 이 절,저 절 옮겨 다니며 동가식서가숙 하던 어느 날 백운사의 늙은 승려 신강을 만나 탄식하며 말하였다. “방번과 방석이 다 죽었다. 내가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구나!” 그러자 신강 스님이 말하였다. “성상께서는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불행과 당신의 불행은 모두 스스로 취한 것입니다.” 이에 태상왕은“나도 그렇게 여긴다”고 말했다고<정종실록>은 전한다. 세상 전부를 모두 얻었다 놓쳐버린,아내와 자식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린,늙고 초라해진 한 사내의 짧은 대답이었다. 태조가 조성할 당시의 정릉과 흥천사는 정동에 위치해 있었다. 광화문 대로를 따라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육조거리가 끝나는 지점이었다. 현재 서울시의회 자리가 흥천사터였으며,지금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정릉이 있었다. 흥천사의 공사가 시작되자 이성계는 아침저녁으로 흥천사에 들러 공양을 올렸고, 정릉의 경쇠소리를 듣고서야 수라를 들었다. 이성계가 정릉의 건설과 흥천사 창건에 그토록 지극정성을 다한 것은 비단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죽은 왕후의 존재를 천하에 드러내는 것,신덕왕후를 명실상부한 조선 최초의 국모로 드높이는 것은 어린 세자를 위해 늙은 아비가 꺼낼 수 있는 유일한 카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성계의 바람과 달리, 후일 태종에 의해 신덕왕후는 첩의 지위로 강등되었고, 정릉은 도성 밖으로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정릉이 옮겨진 뒤에도 흥천사는 도성 안에 남아있었지만,중종대에 유생들이 지른 불로 인해 전소되고 말았다. 현재 돈암동에 남아있는 흥천사는 선조대에 신덕왕후가 다시 왕비로 복원되면서 정릉의 능침사로 중창된 것이다. 창건할 당시 흥천사는 조계종의 본사였다. 최근 흥천사가 태고종에서 다시 조계종으로 귀속되었다 하니,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셈이다. 조선 최고의 원찰로 지어졌던 흥천사가 옛 영화를 다시 찾을 수 있을지 기대해볼 일이다.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불교신문 Vol 2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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