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원당 이야기

2 북한산 회룡사

浮萍草 2013. 3. 13. 07:00
    왕의 귀환, 조선의 서막이 열리다
    선이라는 역사상 가장 견고한 왕조의 시작은 위화도라는 작은 섬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의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 이성계에게 위화도는 죽음의 교두보였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明)이라는 새로운 패자가 등장했다. 
    명나라는 공민왕이 수복한 땅을 내놓으라 요구했고 우왕은 고려의 영토를 내줄 수 없다고 맞섰다. 
    우왕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요동정벌을 강행했다.
    이성계가 위화도에 도착한 때는 1488년 음력 5월. 
    강만 건너면 중국 땅이었지만 연일 쏟아지는 폭우에 이성계의 군대는 오도 가도 못한 채 불어나는 강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망병들이 속출했고, 병사들의 동요는 극에 달하였다. 
    이성계는 우왕에게 요동정벌을 포기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 강행을 독촉했다.
    이성계는 고민에 빠졌다. 개경으로 돌아간다, 
    왕명을 어긴 반역자가 된다. 
    그대로 요동으로 출발한다, 
    명나라를 이길 가능성은 1%나 될까.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도 없다. 
    강물은 계속 불어났고 고려군에는 전염병까지 돌고 있다. 
    이성계는 백척간두에서 한발 더 나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스스로 새로운 세상을 열기로 마음먹었다.(百尺竿頭進一步 十方世界現全身)
    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는 최영의 군대와 일전을 벌였다. 
    결과는 이성계의 대승이었다. 
    이성계는 최영을 귀양보내고 우왕을 폐위시키는 한편 창왕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웠다.
    
    ㆍ위화도로 간 이무기
    압록강에서 군사 돌려
    용이 되어 돌아오다
    위화도회군은 이성계가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하게 된,사실상 조선왕조의 첫 시발점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성계의 조선 건국은 민중들의 봉기에 의한 정권교체도,군벌 간의 전투 끝에 이루어진 왕조 개창도 아니었다. 고려의 왕씨에서 조선의 이씨로 왕조의 주체만 바뀐 군부의 쿠데타라는 혹평을 받아왔다. 700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그러할진대 위화도회군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더욱 가혹했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성계에게는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시킬 명분이 절실히 필요했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사대부들을 왕조 개창에 가담시켰고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통해 대중적 지지를 확보했다. 그의 혁명에 필요한 또 하나의 작업은 불교를 통해 민심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그를 지지하는 사대부들은 유학을 신봉했지만, 여전히 고려는 불교국가였고 고려의 민중들은 대부분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이성계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개경 한복판에 위치한 연복사탑을 고쳐 세웠다. 새로운 영웅,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알리기 위한 선전물이었다. 또한 혼수 스님과 함께 대장경을 조성해 서운사에 안치하였다. 해인사의 탑도 새롭게 장엄하고 대장경을 안치했다. 조선을 개국한 직후에는 이성계와 크고작은 인연을 맺은 절들을 왕실원당으로 삼았다. 젊은 시절 공부했던 안변의 석왕사,함흥의 귀주사,100일 기도를 올리자“왕이 될 것이다”는 소리가 들렸다는 임실 상이암 등이 그것 이다. 그 중 회룡사는 오랜 벗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위해 기도한 사찰이었다. 이성계가 요동으로 출전하자 무학대사는 북한산 기슭에서 손수 만든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이성계 영달을 축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이성계가 조선이라는 국가를 탄생시키기까지 수많은 조력자가 있었지만,그 중에서도 무학은 결코 빼놓을 수가 없는 인물이다. 이성계에게 무학대사는 ‘법 높은 친구’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우선 무학이 왕사(王師)로 있는 이상,혁명의 주체들이 불교계를 무자비하게 탄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 대다수가 불교신자인 고려의 신민들로 하여금 새로운 왕조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든 연결고리가 무학이었다. 이성계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마다 깊은 통찰력으로 나침판이 되어준 이도 무학이었으며,무엇보다 수십 년간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이성계의 성정을 순화시킴으로써 피의 숙청을 자제하도록 도와준 이가 바로 무학대사였다. 결국 무학은 이성계를 ‘성공한 군주’로 만든 최고의 멘토였던 것이다. 원래 법성사에서‘용이 돌아온 곳’이라는 의미의 회룡사로 바꾼 것은 이성계 자신이었다. 용의 귀환,즉 임금이 되어 돌아온 자가 던진 자기 찬탄의 극치였다.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불교신문 Vol 2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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