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원당 이야기

5 대자암

浮萍草 2013. 3. 30. 07:00
    ‘자비로운 절’의 씁쓸한 역설
    강지처 불하당(糟糠之妻 不下堂).
    ‘술지게미와 쌀겨를 함께 먹은 부인은 버릴 수 없다’는 뜻으로,중국 후한시대에 지어진 고사성어다. 
    이 말이 지난 2000년간 이어져 왔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조강지처를 버린 사내들이 예나 지금이나 많았다는 뜻일 게다.
    조강지처를 버린 남편은 드라마에서도 단골 메뉴다. <청춘의 덫>의 이종원이나, 
    <장밋빛 인생>의 손현주,<아내의 유혹>에 변우민 등 나쁜 남편들이 등장하는 드라마는 어김없이 대박이 난다. 
    수천 년 간 이어져온 아줌마들의 애환(?)을 대변해서가 아닐까 싶다.
    조선시대에도 조강지처를 버린 대단한 남편들이 여럿 있는데,그 중 대표로 1명만 꼽으라면 단연 태종 이방원이다. 
    원경왕후의 입장에서 본다면야 이방원은 머리털을 다 뽑아버려도 시원찮을 남편이었다. 
    원경왕후 민씨는 남편을 왕으로 만든 1등공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씨의 친정은 고려 말의 대표적인 명문가 여흥 민씨 가문으로,이 집안의 막강한 권력과 재산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은 후일 이방원이 
    왕의 지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힘이 됐다. 
    태조가 이방원의 사병들을 모두 몰수했을 때 몰래 비자금을 조성해 군사를 키운 것도 민씨의 친정 형제들이었다.
    민씨는 남편에게 지극정성이었다.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킬 때 몰래 숨겨놓았던 갑옷을 꺼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민씨는 남편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아들을 내리 넷이나 낳았는데, 하나같이 똑똑하고 잘난 아들뿐이었다.
    그런데 형편이 좀 풀리자마자 이 남자,시앗부터 들였다. 
    그 시대에 사내가 첩을 들이는 게 뭐 그리 대수인가 할 수도 있지만 하필이면 그 상대가 민씨의 여종이었다.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민씨는 그 첩이 아이를 낳는다는 소식을 듣고 한겨울 차가운 광 속에 가두어버렸다.
    
    ㆍ남편 등극 위해 혼신 다했건만
    조강지처에게 돌아온 것은
    비정한 남편의 지독한 배신뿐
    후일 이 사건은 원경왕후의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결정적 빌미가 되었다. 이방원은 왕위에 오른 후 이 사건을 살인미수사건으로 둔갑시켰다. 왕의 씨를 죽이려 한 역적이라는 것이다. 민씨의 오빠와 남동생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모조리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방원이 이렇게 ‘치사한’ 덫을 놓은 것은 왕이 된 후 원경왕후의 ‘대단한’ 집안이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전제군주국가를 꿈꾸는 태종에게 외척세력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따라서 민씨의 집안은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어진 아니 왕이 가고자 하는 길에 방해가 되는 걸림돌일 뿐이었다. 원경왕후의 몰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를 마지막 구렁텅이로 몰고 간 것은,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던 막내,성녕대군의 죽음이었다. 엄마 아부지의 전쟁 같은 싸움 와중에서 메신저 역할을 하던 막둥이가 그만,열네 살의 나이로 죽어버린 것이다. 성녕대군은 왕비가 마흔한 살에 낳은,왕비를 궁궐에 붙잡아 두었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막내아들의 죽음으로 원경왕후는 더 이상 바랄 것도,버릴 것도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자식 잃은 어미에게 바람난 지아비가 무슨 소용 있으며,허울 좋은 국모의 자리가 무에 중요하랴. 원경왕후는 막내아들의 죽음 이후, 궁궐에서 나왔다. 그리고 아들의 묘 옆에 대자암(大慈庵)이라는 암자를 짓고,그곳에서 기도하며 여생을 보냈다. 한 서린 여인이 지은 암자의 이름이 ‘큰 자비를 베풀라’는 의미라니,씁쓸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태종은 역사가들이 한마디로 평가하기에 매우 어려운 인물이다. 정치사적 입장에서 볼 때, 태종은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군주임에 분명하다. 중국사에서도 해결하지 못했던 외척과 환관의 전횡이라는 두 위험요소를,조선은 이미 태종대에 제거했다. 세종이 역사에 길이 남을 성군이 된 것도,조선왕조가 500년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도,태종이 그린 밑그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이었다. 하지만 여성사적 입장에서 볼 때,태종은 조강지처를 가장 지독하게 배신한,역사에 길이 남을 나쁜 남자였다.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불교신문 Vol 2848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