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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수행자 버니의 회고

浮萍草 2013. 5. 19. 07:00
    無승가 미국불교 1세대들 자긍심 대단
    이후 2∼3세대 불교는 어떤 모습 될까
    “불법 오래 전하려면 승가 필요하지 않을까?”질문엔 ‘수긍’ 국인들은 그들의 불교가 승려라는 특권 계층을 배제한 민주적인 불교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비구라는 이름만으로 승납이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존경받는 것은 미국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 더구나 학생이 친구처럼 교수의 이름을 부르는 미국 분위기에서 불교공동체 내에 위계질서가 없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불교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까? 전업수행자들이 수행과 가정생활을 병행하는 것이 가능할까? 또 어떤 위계질서도 없을까? 만약 그렇다면 민주화된 세상에서 출가승단은 구시대적 착오에 불과한 것일까?

    2009년 1월 나는 이 문제에 관하여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피터 그레고리 선생님은 나의 연구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면 모두 소개시켜주셨고 근처에 좋은 행사가 있으면 자동차가 없는 나를 위해 태워다주시기까지 했다. 버니 그래스만도 그레고리 선생님의 소개로 만났다. 그는 미국불교를 대표하는 1세대 지도자 중 한 사람이며 일본 조동종 마에즈미 선사의 제자이며‘젠 피스 메이커 서클(Zen Peacemaker Circle)’라는 새로운 수행모임을 조직했다. 그의 선원이 노스햄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나는 그레고리 선생님 부부와 함께 종종 그곳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여했다. 지난 1월 그곳에서 버니 그래스만의 70번째 생일을 축하하고 수행 50년을 회고하는 모임이 열렸다. 미국불교사의 첫 장을 열었던 인물 중 한 사람의 회고이기 때문에 미국불교 역사와 현주소를 알고자 하는 나로서는 더없이 소중한 기회였다. 행사는 미국불교 1세대로부터 2세대로의 계승을 기념하는 성격도 가지고 있었는데,지난해 말,버니는 제자 중 한 사람을 후계자로 정하고 자신이 창립한 선원의 운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아직도 정신적 지주로서 여러 가지 일에 관여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젊은 세대에게 인계했다. 일본 선사의 제자인 그가 아들에게 선원을 물러주지 않고 전통적인 승가 체제대로 제자 중 한 사람을 후계자로 정한 것은 미국인 들이 그들의 방식대로 민주적이며 합리적인 체제를,본래부터 아시아에서 존재했던 승가체제로 회귀하는 징표라는 점에서 흥미 로웠다.

    사흘 동안 버니 그래스만은 불교에 입문하게 된 동기와 마에즈미 선사로부터 받은 지도와 수행,그리고 그가 시도한 새로운 형태의 불교에 대해 회고했는데,오전에는 지정 토론자의 질문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갔고 오후에는 참석자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허심탄회하게 자기의 삶을 -물론 그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대중들 앞에서 털어놓는 것은 미국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는 법당에 들어올 때면 피에로의 붉은 플라스틱 코를 달고 왔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권위적인 것을 싫어해서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는'로쉬'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그냥 '버니'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사흘 동안 유년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첫날, 어머니를 일찍 잃은 유년의 기억에서 시작하여 그가 자라난 뉴욕 브루클린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그의 가족을 둘러싼 유대 사회주의에 대해 들려주었을 때 나는 비로소 형식을 싫어하는 그의 성향과 나중에 뉴욕에서 베이커리를 운영하며 걸인들에게 무료 로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했던 배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학을 마친 후 그는 캘리포니아로 옮겨 맥더널 더글라스사의 항공엔지니어로 일하면서 UCLA에서 응용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거기서 처음 선불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첫 만남에 대해 그는 “선불교가 나를 정화시켰다”라고 표현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LA에 와 있던 마에즈미 선사를 만나게 되었으며 항공엔지니어로서의 유망한 장래를 포기하고 전업수행자의 삶 에 투신하게 된다. 그는 스승과 함께 로스엔젤레스 선센터를 창립하고 스승의 지도 아래 수행에 전념한다. 그러나 당시 이미 가정을 가지고 있었던 버니는 가정생활과 수행을 양립시키기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놀라운 말이었다. 재가불교 종단을 창립한 사람의 입에서 가정생활과 수행을 양립하기 어려웠다는 말이 나오다니! 다른 참가자들도 비슷한 문제를 느꼈던 모양인지 점심식사 후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 모든 참석자의 질문이 이 문제에 집중되었다. 현재 콜로라도 볼더에서 선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로스엔젤레스 선센터에서 마에즈미 선사의 지도를 함께 받았고 버니 그래스만 의 전법제자 중 한 사람인 시씬이 첫 질문을 했다. 가정생활을 병행하더라도 일정 기간 집중적인 수행 기간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버니는 시씬의 지적에 공감했다.
    이어서 내가 질문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정생활을 지속했던 이유가 무엇이며 그것이 미국과 아시아의 문화적 차이 때문인지 또는 수행에 대한 상이한 태도 때문인지 물었고 덧붙여 장차 미국에서 출가승단이 조직될 가능성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버니의 대답은 간단했다. 롤 모델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스승 마에즈미 선사가 대처승이었기 때문에 출가를 생각해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는 또한 출가와 재가는 어떤 것이 더 우수하냐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방법이 다 길이 될 수 있고 어떻게 방편을 활용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는 숭산 스님도 미국에서 비구승단을 세우지 못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은연 중 재가승단이 미국에 적합한 형식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을 드러내보였다.
    청중석에 있던 노부인도 수행과 가정생활을 공존시키는 데 오는 어려움을 하소연했다. 남편이 부인의 선수행에 호의적이고 여러 가지 지원을 하고 있지만 자신의 정신세계를 남편과 공유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 노부인의 고충은 버니의 어려움과 성격이 좀 달랐다. 버니의 고충은 생계유지를 위해 생업에 종사해야 하고 아이들의 등교를 도와야 하는 등 가정생활 때문에 수행에 전적으로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는 현실적인 문제였다면 노부인의 문제는 정신적인 것이었다. 독일에서 온 다른 여성은 참선수행 못지않게 어머니로서의 자신의 역할이 중요하다면서 양자를 조화시킬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해 주기를 부탁했다. 서양에서도 여성이 수행을 하는 것은 남성보다 더 어려운 것 같아 보였다. 마기 역시 몇 차례 비슷한 문제를 내게 말해주었는데 LA에서 함께 수행하던 시절,결혼 전에는 자신의 수행을 지도해주던 마에즈미 선사가 결혼 후에는 항상 남편에 대해서만 묻고 자신의 수행에 전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던 이유를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날 마기와 나,그리고 시씬은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다음날 아침 몬테규 선원에 가기 위해 그레고리 선생님 댁에 들렸을 때,선생님도 우리의 대화에 관심을 보였다. 그날 그들은 밤을 새워 토론하여 출가와 재가의 차이가 ‘절에 상주하느냐 아니냐’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나의 관점은 좀 달랐다. 대승불교는 재가불자의 이상형으로 <유마경>의 유마힐 거사를 제시했으며 중국 당송대에 오면 재가자 중에서 선맥을 이은 배휴나 장상영 같은 인물이 배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한국은 승단이 존속하며 특수한 지위를 유지했다. 과연 그것이 전근대 동아시아와 포스트모던시대의 미국 사이에 놓인 차이일까, 아니면 불교의 성숙과 미성숙에서 비롯된 것일까? 버니의 대답처럼 출가의 여부가 수행의 깊이를 보장하지 않는다. 재가지도자로서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수행하는지 지켜보았으며 한국에서도 신심이 돈독한 불자들을 많이 만나 보았다. 그리고 성철스님과 같이 출가 전에 깨달음을 얻은 이도 있다. 그런데 그들이 더 깊이 불법에 귀의할 때 출가수행자의 길을 걷는 것은 어떤 필연성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적어도 한 가지 확인할 수 있는 점은 출가승단의 존재가 지금까지 법의 전수에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법을 전하기 위해 실크로드를 건너온 서역의 수많은 스님들과 또 서역 어딘가로 법을 찾아 떠났던 구법승들, 그리고 지리산 어느 골짜기에서 또 해인사 장경각 한 모퉁이에서 이름없이 살다간 스님들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불법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으랴! 교통과 정보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살아있는 전통으로서 불법을 지키고 다음 세대로 전하는 것은 결국 불법에 신명을 바치는 자들이 아닐까? 마기도 수행에는 재가와 출가의 차이가 없지만 만약 불법을 오래 전하려면 출가승단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나의 생각에 바로 동의했다. 미국불교의 새로운 여러 특징들에 공감하면서도 아쉬운 대목은 법을 위해,깨달음을 위해 신명을 바치는 태도가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현실적인 문제를 치유하는 수단으로서 불교의 효용을 주목하고 그것을 활용하려고 노력하지만 아시아인들이 가지고 있는 헌신적 태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가정생활과 선수행을 공존시키는 것은 그래스만의 첫 번째 결혼이 이혼으로 끝나게 된 사실이 보여주듯이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뉴욕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사회참여 활동을 행하던 시절 그의 모든 활동은 두 번째 아내인 지코의 헌신적인 내조 덕분이라고 그들을 아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두 번째 아내가 심장마비로 돌연사한 후 지금까지 그는 세 번째 아내와 함께 몬테규 선원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두 아이들에게 그가 어떤 아버지였는지,그리고 그의 경험이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2세대,3세대 전업 불교지도자들에게 어떤 롤 모델이 될지 알 수 없다. 그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새로운 불교가 과연 어떤 모습을 지니게 될지 참 궁금하다.
    명법 스님(미국 스미스칼리지 박사후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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