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서양문화 속 불교코드 읽기

미국의 부처님 오신 날 풍경

浮萍草 2013. 5. 5. 07:00
    "How old is the Buddha?"
    자기화될 때 비로소 전통이 된다  
    그제가 초파일이었다. 타국에서 혼자 맞는 초파일을 어떻게 보내는지 걱정하는 메일들이 왔지만 정작 나는 여러 가지 일로 바빠 적적할 여유조차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명절을 즐기는데 나만 홀로 있다면 울적하겠지만 미국에서 부처님 오신날은 공휴일도 아니고 일반인들은 알지 도 못해서 그저 혼자 되새기고 은사스님께 문안전화 드리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미국에 부처님 오신날 축하행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거리마다 사찰마다 오색 연등을 달고 축제 분위기를 내지 않지만 아시아 이민공동체에서는 그들 전통에 따라 부처님 오신날을 경축한다. 재미있는 점은 전 세계 인종이 모여 살다보니 부처님 오신날도 제각각이어서 한국절은 한국식으로 일본절은 일본식으로,남방불교는 남방불교식으로 경축한다. 신도들의 편의를 위해 행사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치러지며 대체로 4월 초부터 5월 중순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경축행사에 참여할 수도 있다.

    올해는 조지워싱턴 대학의 강연과 겹쳐 기회를 놓쳤지만 작년에는 스미스여대 학생들과 함께 현장학습으로 인근의 캄보디아 절과 평화의 탑을 참배했다. 그리고 피터 그레고리 선생님과 함께 초대를 받아 뉴욕 주에 있는 한국절도 다녀왔다. 캄보디아 사원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참배를 하고 (한국에서처럼) 준비해간 과일을 올렸다. 나중에 보니 (캄보디아에서) 공양물은 부처님이 아니라 스님들께 드리는 것이었다. 여성신도 한 분이 나를 비구스님들이 공양 중인 단상으로 안내했다. 캄보디아에는 비구니스님이 없지만 내가 구족계를 받은 스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른 스님들과 똑같이 대접해주었다. 신도들이 나를 위해 서둘러 음식을 내오고 옆에 있던 비구스님도 물이며 떡 등을 권했다. 그런데 문제는 신도들이 준비해온 음식에 고기가 섞여있었다는 것이다. 남방불교의 계율을 따르자면 신도가 공양한 음식은 모두 받아먹어야 하고 대승계율을 따르자면 육식을 해서는 안 된다. 난처한 상황이었다. 신도들이나 다른 스님들에게 결례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밥과 야채 떡을 골라먹었다. 그러나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야채에 배어든 생선 비린내였다. 음식을 한 입 먹을 때마다 잠깐 호흡을 멈추고 먹었다. 킬링필드를 피해 난민으로 미국에 정착한 이들이 식당 종업원이나 호텔 청소부 등 막일을 하며 어렵게 모은 돈으로 마련한,그 어떤 공양보다 정성스럽고 값진 공양을 먹으면서 나의 수행이 아직도 코와 입에 달려 있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스님들의 공양이 끝나자 단상 위에 있던 음식을 내려 신도들이 먹기 시작했다. 그제야 스미스여대 학생들과 후버드 교수도 공양을 시작했다. 그들 곁으로 다가가자 몇몇 학생들이 나를 보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함께 수업을 듣던 스님이 특별 대접을 받는 것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불교와 이국문화에 대한 그들의 호기심 덕에 나 역시 현장학습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후바드 교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학생들에게 남방불교 계율과 대승불교 계율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짓궂게도 나의 선택이 무엇이 었는지 물었다. 나의 대답은 “신도들이 공양한 그 많은 음식을 어떻게 다 먹을 수 있겠어요? 그래서 야채를 골라먹었지요”였다. 공양을 마치고 나오니 마당 한쪽에 세워진 간이무대에서 캄보디아 어린이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민속춤을 추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캄보디아인임을 잊지 않게 하려는 부모들의 간절한 바램을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의 재롱이 귀여웠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자들의 비애가 느껴져 가슴 아팠다.

    불교의 미국으로의 전래는 대체로 두 가지 경로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일본을 통해 다른 하나는 아시아계 이민이나 난민을 통해 첫 번째 형태를 개종불교라고 한다. 대부분 고급 교육을 받은 백인 중산층이 중심이 된 불교로서 무엇보다 명상에 관심을 갖는데 현재 일본선사를 이어 미국인 법사 1, 2세대들이 지도하고 있다. 두 번째 형태를 에스닉불교라고 부르는데, 내가 방문한 캄보디아절이나 한국절이 이에 해당한다. 그 밖에 최근 흑인과 히스패닉계 등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일본 창가학회와 같은 신흥불교가 있다. 그들은 명상보다 ‘나모호랑겟교’ 염불을 하며 구복적인 성격이 강하다. 불교가 미국에서 환영받고 있지만 불교를 미국으로 보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시아의 정치적 경제적 곤궁이었다. 몇 해 전에 입적한 캄보디아 붓다고사난다 스님이나 현재 미국에서 헐리우드 스타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 달라이라마 스님 이나 틱낫한 스님 모두 조국의 불행이 그들을 세계적 종교지도자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상황 자체만 놓고 본다면 비극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민사회나 난민공동체에서 사찰은 타향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달래고 정체성을 확인하는 공간인 동시에 처음 이민 온 사람들에게 미국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해주고 일자리를 알선해주는 창구이다. 아울러 이민 2세대들에게 모국어와 문화 교육까지 담당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급속도로 미국사회에 동화되는 이민 2세대들에게 장차 사찰이 부모 세대와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될지 알 수 없다. 종교학회에서 만난 대만 비구니스님도 최근 차이나타운 사찰도 젊은이 수가 줄어든다고 걱정했다. 캄보디아절에도 미국에서 태어나 출가한 스님은 없었다. 그것은 곧 재정적이든 인적이든 공동체로부터의 지원이 줄어든다는 의미이고 필연적으로 공동체에서의 사찰의 기능을 약화시킬 것 이다. 한국절의 상황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하다. 미국인에게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꼭 둘 중 하나였다. 숭산스님을 안다는 반가움과 한국에도 불교가 있느냐는 질문이다. 극단적으로 다른 이 두 가지 반응은 미국에서 한국불교가 처한 상황을 잘 말해준다. 다른 에스닉불교가 이민사회에 국한된 것과 달리 한국불교는 일본 선불교와 마찬가지로 백인 중산층을 상대로 포교했는데, 그 장본 인이 숭산 스님이다. 안타깝게도 숭산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 중 아직도 관음스쿨과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까지 프로비던스나 캠브리지 LA에 있는 센터를 방문하지 못해 판단하기 어려우나 일본계의 선불교가 미국인 제자들에게 전수되어 계속 확장되는 데 비해 숭산 스님의 제자들은 과거의 교세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밖의 한국사찰에서도 가끔 미국인을 상대로 포교를 하고 있으나 대부분은 한인 중심으로 운영되는 형편이다. 그런데 그것조차 만만치가 않다. 내가 만난 미국 젊은이들이 한국을 기독교의 나라로 오해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만난 한인들이 모두 기독교인이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한국에서 불교가 3대 종교 중 하나이며 인구의 30% 이상이 불자라고 말해주면 깜짝 놀란다. 아무튼 이 상황은 한국불교가 한인들을 포교하기도 벅찬 현실을 말해준다. 미국에서 한국절에 다니는 사람은 한국에서도 불교를 믿던 사람이지 이민 와서 새로 불교를 믿게 된 경우는 거의 없다. 아니, 불교를 믿던 사람조차 미국생활의 필요 때문에 교회에 나간다. 그만큼 교회는 정보와 재정 연대의식으로 한인사회에서 공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서 처음 이민 온 사람이 교회에 나가지 않고 버티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뉴저지에서 만난 대학동기도 학창시절에는 종교가 없었는데 이민 와서 열렬한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고 워싱턴 D.C.에서 만난 대학 후배는 한국교포를 만나면 항상 듣는 말이 ‘왜 교회를 다니지 않느냐?’라면서 진저리를 쳤다. 또 다른 후배는 주변에서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가족뿐이라고 했다. 한국불교는 미국에서 미국적 환경에 적응하는 동시에 한인교회를 상대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해야 하는데 상황은 한국보다 심각하다. 이민 2세들의 문제는 더 심각해서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자의로든 타의로든 교회에 나가는 경우가 많았고 부모가 불자인데도 자식이 교회에 다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미국 주류사회에서 불교가 새로운 종교로 환영받는 것과 정반대로 한인사회에서 불교는 구태의연한 종교로 취급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은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데 일요일에 절에 가면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없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불교가 따분하고 재미없는 것도 당연하다. 미국에서의 한국불교의 장래는 젊은 한인들의 포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으로 이민사회가 성장하면서 한국절의 수효와 규모가 커지고 미국에서 활동하는 젊은 한국불교학자와 스님들이 늘고 있어 고무 적인데 어떻게 그 변화를 주도할지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한국절의 부처님 오신날 행사는 캄보디아절보다 훨씬 풍성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도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의 애틋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초파일은 부처님 오신날이기도 하지만 어린이,어른,노인,갓 이민 온 사람,이민 온 지 한참 되는 사람,불법 체류자,기러기 가족 등등 온갖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이 한국인임을 확인하는 날이기도 하다. 특히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어머니 합창단의 공연이었다. 아이들이야 어떤 어려움을 겪든 장차 미국사회에 동화되겠지만 이민 1세대들에게 미국은 여전히 남의 나라일 수밖에 없다. 어머니들에게 절은 자식들을 위해 희생한 그들의 사회적 자아를 발현하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토록 열심히 노래 부르는 그들의 모습이 오히려 안타깝게 느껴졌던 것은 나의 지나친 노파심이었을까? 작년 부처님 오신 날은 미국 어머니날과 겹쳤다. 피터 그레고리 선생님은 그날 간단한 축사를 했다. “부처님께서 어머니를 통해 이 세상에 오셨듯이 세상의 모든 자식들도 어머니를 통해 세상에 왔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몇 살일까요? 우리 모두 본래 부처니까,열 살 먹은 꼬마에게 부처님은 열 살이고 스무 살 청년에게 부처님은 스무 살이며 칠순 노인의 부처님은 칠순이지요. 그러니까 여기 모이신 모든 어머니들은 부처님들의 어머니입니다.” 벽안의 학자는 한국절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고 어머니들에게 큰 위로를 전해주었다. 미국의 부처님 오신 날 행사는 아직까지 아시아 이민공동체의 민속행사일 뿐 보편성을 얻지 못하고 있다. 올 4월 8일에 노스햄턴에 있는 선 센터에서 있었던 초파일 행사는 참석자가 이십 명도 안 되는 조촐한 모임이었지만 뜻 깊었다. 늘 듣는 이야기지만 미국인 법사가 부처님 탄생 설화를 말해주며 우리 속에 있는 아기부처를 돌아보자고 했을 때 참석한 미국인들 모두 깊이 공명했다. 그들의 목소리로 그들의 삶에 녹아든 법문이 아니라면 부처님 오신 날은 그저 이국적 행사에 불과할 뿐 그 의미를 새기지 못했을 것 이다. 부처님의 법은 살아있는 체험으로써만 전해질 수 있다. 그래서 승보가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삼보의 하나인 것이다. 불교의 오랜 역사가 보여주듯이 철저하게 자기화 될 때만 자신의 전통이 될 수 있다. 그렇다. 그렇다면 미국의 부처님은 몇 살인가?
    명법 스님(미국 스미스칼리지 박사후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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