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서양문화 속 불교코드 읽기

Japan in America

浮萍草 2013. 4. 28. 07:00
    젠가든, 사쿠라꽃에 가려진 
    미국속 일본불교의 두 얼굴 
    본은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지만 나는 지금까지 일본을 가본 적이 없다. 한 마디로 일본을 좋아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역만리 미국에 와서 가는 곳곳마다 일본을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스미스여대만 해도 그렇다. 즐겨 산책하는 파라다이스 호수 주변에 일본식 티(Tea) 하우스와 그 옆에 작은 불상이 하나 세워져 있다. 이름 그대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호숫가에 위치한 이 티 하우스만큼 미국 속의 일본의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도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일본은 이처럼 자연을 사랑하고 고요한 명상과 세련된 다도를 행하는 심오한 문화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티 하우스가 거기 있는 한 호숫가를 거니는 미국인들에게 일본의 이미지는 계속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지난 가을, 스미스여대 식물원에서 국화전시회가 열려 가깝게 지내는 교수 부인들과 국화 전시를 보러간 적이 있다. 그레고리 교수님의 부인인 마기가 스미스여대에 재학할 때에도 열렸을 만큼 그 전시는 이 지역에서 꽤 전통 깊은 행사였다. 학생들이 재배한 갖가지 색깔과 형태의 국화가 온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전시장 입구에 일본식 문(도리)이 세워져 있었고 온실 중앙에 기모노가 두 점 걸려 있었다. 처음엔 별 생각이 없었으나 후에 부속 전시실에 전시된 여러 점의 기모노와 서예 작품을 보고 비로소 이 전시의 문화사적 성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꽃 전시회가 아니라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자퐁니즘과 관련이 있는 일종의 오리엔탈리즘 전시였다. 일본문화는 세련된 미적 취미로서 서양을 매혹시켰는데 미국에서는 특히 이곳 뉴잉글랜드 지방의 눈 높은 상류층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니까 수많은 여류명사와 퍼스트레이디를 배출한 미국의 대표적인 여대인 스미스여대에서 국화전시회가 열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다음날 마기를 만났을 때 국화가 ‘국화와 칼’로 대변되는 일본문화의 상징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동아시아에서 공유된 ‘사군자’라는 유교문화의 상징 중 하나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그렇지만 이미 스미스여대의 전통이 되어버린 국화전시회는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었다. 일본은 이미 미국 전통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난 여름 영화배우 안성기 씨가 한국영화 홍보를 위해 미국에 왔을 때,잘 아는 교수님이 그 일을 기획했기 때문에 함께 뉴욕에서 워싱턴 D. C.까지 동행했다. 그 때 만난 한국대사관 직원들이 독도 문제를 걱정하면서 들려준 이야기도 미국 속 일본의 위상을 잘 말해준다. 2차 세계대전 패망 후 일본은 사죄의 의미로 벚꽃나무를 미국에 보냈는데 그 나무들이 이제 아름드리가 되어 봄마다 워싱턴 D. C. 에는 벚꽃 축제가 벌어진다. 그에 맞추어 언론은 앞을 다투어 일본문화를 소개하고 박물관은 일본문화 기획전을 연다. 저절로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패전국이 아니라 꽃을 사랑하는 평화의 나라가 된다. 이 얼마나 손쉬운 외교인가? 그러니 일본과 분쟁 중인 독도 문제에 대해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주장을 들어줄 국가가 많지 않을 수밖에. 문화외교의 힘은 이렇게 대단한 것이다. 2차대전 후 일본의 외교는 문화를 통해 일본의 이미지를 재고하는 데 주력했다. 이 정책은 메이지 시대부터 시작되었지만 패전 후 그들은 일본문화와 예술을 선불교로 포장하여 일본을 세일즈했다. 스즈키는 50년대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열린 그의 선불교 강연에는 뉴욕의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참가했고 뉴욕 문화계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존 케이지, 에릭 프롬, 칼 구스타프 융, 토마스 머튼, 아놀드 토인비, 알렌 긴스버그, 잭 캐루악, 알렌 와트, 게리 스나이더 등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스즈키의 선불교 소개는 수행방법에 대한 강의라기보다 선사상과 선문화 소개에 가까웠는데 그는 일본문화가 서양의 합리적,물질 적 문화와 반대로 고도로 정신적이고 신비로운 것이며 일본문화를 알려면 선을 알아야한다고 역설했다. 스즈키의 영향은 유럽까지 미치지만 미국에서 더 많은 독자를 얻었던 데에는 전후 일본과 미국의 정치 역학이 개입되어 있다. 태평양 전쟁 때 미국은 적군 일본을 파악하기 위해 일본어 습득을 장려했으며 전쟁 후에는 미군이 일본에 주둔함에 따라 더 많은 미국인이 일본을 방문하거나 체류하게 되어 양국 간의 교류가 증대되었다. 냉전시대에 미국의 군사 기지로서 그리고 한국전쟁 특수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룬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에 성공한 아시아 국가로서 일본은 미국의 주적에서 미국의 우방으로 탈바꿈한다. 상호 존중과 이해가 양국의 공동 관심사가 되자 문학과 예술 그리고 스즈키가 주장한 선의 정신성이 1950년대 이후 미국에서의 일본의 새로운 얼굴이 되었다. 마침 전쟁 후 미국이 경험한 풍요 속의 공허는 일본문화에 대한 동경을 증대시켰고 비트와 히피운동 은 일본 선을 전파하는 통로가 되었다. 비트 작가와 알렌 와트를 통해 불교를 알게 된 대학생들이 아시아 종교, 특히 불교 과정을 개설해줄 것을 대학에 요구했다. 이제 상황은 스즈키가 폴 케루스에게 배우기 위해 미국에 왔을 때와 정반대가 되었다. 선은 ‘동양의 지혜’로 간주되었고 불교학은 미국에서 중요한 학문으로 자리 잡았다. 많은 서양학자들이 스즈키의 저서를 읽고 학문적 관심뿐 아니라 선 수행을 직접 경험하려는 희망으로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 도착하여 그들이 발견한 것은 스즈키가 말한 선불교가 일본에 없다는 사실 이었다. 일본 승려들은 장례를 주관하고 가업을 계승할 뿐이었다. 미국이 선불교의 새로운 중심이 되리라는 희망으로 열심히 수행을 했지만 스즈키가 말한 깨달음은 쉽게 얻어지지 않았다. 열광은 실망으로 바뀌었고 많은 불교학자들이 스즈키에게서 배신감을 느꼈다. 일부 학자들은 사토리,무심,불성과 같은 동아시아 불교의 근본 개념이 내용이 없는 수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만약 그렇다면 스즈키의 저술 뿐 아니라 선불교 전체가 사기에 불과할 텐데, 스미스 여대에서 일본불교를 강의하는 후바드 교수가 대표적인 비판불교 학자이다.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일본불교의 또 다른 문제가 드러났다. 선승들이 일본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에 가담했으며 일부는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원 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스즈키의 스승인 소엔 샤쿠가 러일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과 만주를 방문했고 스즈키의 선불교 해석 역시 군사주의와 연관된다는 점이 밝혀졌다. 태평양전쟁 기간 중 일본불교는 일본 행동을 비판하지 않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도덕적 반성이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실망은 환멸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일본불교를 비판하든 아니든,그들의 학문적 입장과 관계없이 일본에서 공부했던 학자들은 대부분 일본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시절이 그들 개인사에 가장 순수하고 열정적인 시기였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만 일본에 대한 기억마저 우호적이라면 일본의 저력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 미국 대학에서 스즈키의 저술은 읽히지 않는다. 더불어 선불교도 매력을 잃어버렸다. 그 자리에 위파사나와 티벳불교가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그러나 스즈키가 구축한 선과 일본문화의 이미지는 학문 밖의 세계에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국에 가장 먼저 전해지고 가장 널리 알려진 불교가 일본 선이기 때문에 그 영향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이 신천지 미국에 선불교를 전하면서 일본불교의 문제점까지 고스란히 전했다는 점이다. 이번 학기엔 후버드 교수의 일본근대불교 강의를 청강하고 있다. 미국불교를 알기 위해서도, 한국불교를 알기 위해서도 일본불교 연구가 필요하다. 알지 못하면 당하게 마련이다. 부처님의 법을 바르게 전하기 위하여 일제 강점기에 한국불교가 받았을 일본불교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서 알량한 자존심은 잊어 버려야 하겠다.
    명법 스님(미국 스미스칼리지 박사후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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