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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벌교 홍교와 조정래의 태백산맥

浮萍草 2016. 4. 30. 10:21
    태백산맥으로 다시 재조명 받은 벌교천 虹橋
    목을 엮어 만든 다리’를 벌교라고 합니다. 
    이 보통명사가 고유명사가 된 유일한 사례가 있습니다. 
    전남 순천시에 인접한 벌교읍(筏橋邑)입니다. 
    왜 시냇가의 뗏목 엮은 다리가 이곳의 지명이 됐는지를 알려면 읍을 관통하는 벌교 천을 가봐야 합니다.
    벌교 천은 상당히 육지 안쪽까지 바닷물과 민물이 교차한다고 하지요. 바로 그 지점에 무지개를 연상시키는 돌다리가 있습니다. 
    길이 27m, 높이 3m의 홍교(虹橋)입니다. 
    여기서 ‘홍’이라는 한문 자체가 ‘무지개’라는 뜻이라는 것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벌교천의 명물인 홍교(왼쪽)에 현대식 석조다리를 이어붙여놨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04호로 지정된 이 홍교와 비슷한 다리가 인근에 있습니다.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仙巖寺)를 가본 분들은 이곳 명물 승선교(昇仙橋)가 벌교의 홍교와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아챌 것입니다. 승선교 역시 보물 400호로 지정됐지요. 벌교는 숙종 44년인 1718년, 뗏목다리 형태로 건설됐습니다. 그런 다리가 10년 뒤인 1728년, 전남을 덥친 대홍수로 무너졌습니다. 백성들이 고생을 한다는 소식을 접한 선암사의 초안선사(楚安禪師)는 1년 후 돌다리를 세워주기로 마음먹지요. 돌다리는 1734년 완공됐는데 지금같은 세칸의 무지개 형태가 된 것은 4년 뒤인 1737년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세칸의 무지개 형태 홍교에 화강암으로 만든 새 돌다리가 덧붙여져있습니다. 이것들은 1981년부터 1984년까지 보수공사를 하며 만든 것들입니다. 벌교에는 이외에도 몇 개의 다리가 있습니다. 지금도 기차가 다니는 철교가 바닷가쪽으로 있고 내륙쪽으로 소화다리, 홍교가 있지요. 그중에서 소화다리는 예전 좌우대립 때 벌교천으로 떨어진 시체가 바닷물에 쓸려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있습니다.
    벌교천을 가로지르는 소화다리다. 좌우대립이 심할 때 사람들은 주검을 소화천 아래로 버렸다. 썰물 때면 죽은이들의 검정고무신만 남고 시체는 바다로
    떠내려갔다고한다.

    그런 이 홍교가 다시 유명해진 계기가 있습니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 ‘태백산맥’ 때문입니다. 소설 ‘태백산맥’은 1983년 9월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되기 시작한 전 10권짜리 전집으로 원고량이 200자 원고지 1만5700매나 되는 대작입니다. 말이 1만5700장이지 글로 먹고사는 저로서도 이러한 분량은 놀랍습니다. 제가 최근에 낸 ‘여행자의 인문학’(도서출판 다산3.0) 역시 700매를 약간 웃도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조정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1959년 서울에 올라와 1960년대 후반까지 수도가 없는 성북동 산동네에서 살았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 4년 졸업하고 군대 가기 전까지 7년 동안 물지게를 졌습니다. 엄동설한에 눈이 내린 날은 물 길러 가기가 정말 싫습니다. 추운 날 산동네 비탈길을 물지게를 짊어지고 올라오는 일이 보통 지겹고 힘든 게 아니에요. 이불 속에서 꾸물꾸물하다가 한 10분 지나버리면 30∼40명이 줄을 서요. 게으름을 떨치고 빨리 일어나면 가장 먼저 도착해서 금방 물을 담아 돌아올 수 있어요. 인생이 별것 아닙니다. 남들보다 5분 빠르게 움직여 부지런을 떨면 항상 내가 앞에 갈 수 있다는 깨달음을 물지게질을 통해 얻었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대학생 때 읽었는데 지금도 당시 느꼈던 흥분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설은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한반도에서도 남쪽의 벌교읍을 무대로 펼쳐지는 좌우파 간의 사상대립을 그렸습니다. 줄거리를 잠깐 요약해볼까요. 소설의 초반부는 숯장수 염서방의 아들인 염상진이 민중을 착취하던 지역유지를 처형하는 등 좌파 기질을 보이며 시작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염상진의 동생인 건달 염상구는 빨갱이라면 물불을 가리지않는 우파 청년단의 중심 인물로 그려집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대개 좌파입니다. 초등학교 교사출신의 이지숙은 야학교사로 계급투쟁 의식을 고취시키고 염상진은 남로당 보성군당 위원장으로, 하대치는 그의 동조자로 나옵니다. 반면 계엄군 사령관으론 심재모 중위가 나오지요. 이들이 대립하는 가운데 6·25가 터지고 염상진은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지만 토벌대에게 포위돼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반면 김범우는 민족의 단합을 강조하는 중도 지식인으로 극좌파 염상진과 극우파 선우진 두쪽에서 모두 공격을 받게 됩니다.
    벌교천의 명물인 홍교를 건너면 왼쪽편으로 김범우의 집이 보인다.

    일제 강점기에 학병으로 징집됐다가 버마에서 탈출해 미군 정보기관 OSS에서 훈련받은 김범우는 귀국 후 미국 통역,순천중학 교사,남로당 공작원 등 다양한 행로(行路)를 걷다가 6·25 때 미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뒤 반공 포로로 석방됩니다. 아마 영화 ‘태백산맥’을 보신 분이라면 안성기가 맡은 김범우 역할이 생각날 것입니다. 소설 속 김범우의 집은 지금도 벌교천 홍교 맞은편 언덕에 보존돼 있습니다. 김범우의 부친은 김사용으로 다른 지주들과 달리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었습니다.
    김범우의 집 현관이다. 대낮인데도 괴괴한 느낌이 든다.

    심지어 염상진마저도 김사용을 계급과 서열 때문이 아니라 진정 존경할만하다고 해 ‘어르신’이라고 부르지요. 그는 일제시대 막대한 재산을 독립운동에 썼으며 그 스스로는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이 집은 지금 거의 폐허처럼 방치돼있었습니다.
    김범우의 집 마당이다. 지금은 방치돼있다.

    저는 감히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로 홍명희의 ‘임꺽정’, 황석영의 ‘장길산’과 함께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꼽습니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나 이문열의 ‘변경’ 등도 대단하지만 제게 끼친 영향은 이 세명의 소설가가 더 컸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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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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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래와 박태준의 예외적인 상대 평가
    소설가 조정래와 그의 아내인 시인 김초희.
    정래(趙廷來)는 1943년 8월 17일 선암사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 조종현은 승려이자 시조 시인으로서 만해 한용운이 조직한 승려들의 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재무위원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왜 승려가 결혼을 했는지가 궁금할 것입니다. 당시 조선불교는 총독부가 시행한 일본불교와의 통합정책 때문에 “승려들도 결혼하라”는 압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조종현 역시 결혼을 해 4남4녀를 낳았는데 조정래는 그중에 넷째였습니다. 조정래의 부친은 해방 후 죽을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토지 분배 문제를 놓고 당시 선암사 주지와 대립했는데 주지가 여순(麗順)반란 사건 때 조종현이 좌익이라고 모함해 죽을 뻔 한 것이지요. 이 대목은 소설 속에 법일 스님이 지주의 착취로 가난한 소작농 편을 들다 고초를 겪는다는 이야기로 나옵니다. 조정래는 1949년 순천 남국민학교에 입학한 후 충남 논산으로 이사했는데 1년 뒤 6·25가 터지자 피난지에서 소작제의 모순을 알게됐다고 훗날 회고했습니다. 그가 벌교로 온 것은 1953년으로, 아버지 조종현이 벌교상고의 국어교사로 취직했기 때문입니다. 광주 서중에 진학한 조정래는 1959년 서울로 와 역시 아버지가 근무하던 서울 보성고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원래 이과(理科)반이었는데 5·16이 터지자 국문과로 진학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1962년 동국대 국문과에 입학했습니다. 1966년 대학 졸업 후 군에 입대한 그는 1967년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나온 시인 김초혜와 결혼한 뒤 동구여상 국어교사로 근무하던 1970년 월간 ‘현대문학’ 6월호에 단편 ‘누명’이 추천되면서 등단했습니다. 그는 1972년 중경고로 전근했는데 정부를 비판한 작품이 문제가 돼 학교 교장과 마찰을 빚자 교직을 그만뒀습니다. 1973년 월간문학 편집장이 된 그는 1976년 포켓용 문예 월간지 ‘소설문예’를 인수해 1977년 10월호까지 발간했습니다. 이때 연재를 맡은 집필진 중에 친일파 연구로 훗날 유명해진 임종국이 있습니다. 그는 원래 “직접 경험한 것을 소설로 써선 안된다”는 지론을 갖고있었지만 1980년 5월 광주사태가 일어 나자 소신을 접고 소설 ‘태백산맥’을 집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조정래는 좌익일까, 이런 의문을 가진 분이라면 조정래가 한 언론과 나눈 다음과 같은 말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인용해봅니다.
    소설가 조정래의 캐리커쳐다.
    그는 “북한의 현체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가장 비인간적인 체제입니다. 봉건주의가 무너진 이유는 비인간성 때문입니다. 봉건주의의 비인간성은 권력의 세습, 양반·상놈 차별하는 계급주의로 나타납니다. 그러한 비인간성 때문에 인간들은 봉건주의를 무너뜨리기 시작한 것 아닙니까?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나온 것인데 사회주의를 표방한 북쪽이 권력세습을 했으니 더 말하여 뭣하겠습니까. 다른 건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조정래는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1915~2000)의 제자였지만 훗날 사제관계는 불화로 끝났습니다. 조정래가 ‘친일파 인명사전’을 만들 때 문학계의 친일 행각을 정리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한거지요. 그는 한 매체를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정주는 내 스승이자 내 아내를 등단시킨 사람이고 우리 결혼식 주례도 섰다. 하지만 작가적 삶에서 서정주와 황순원은 대조되는 인물이다. 미당이 친일시를 쓸 때 순원은 붓을 꺾었고 미당이 전두환을 칭송할 때 순원은 전두환이 폐간시킨 잡지의 복간을 위해 싸웠다. 미당은 (춘원) 이광수처럼 수십년에 걸쳐 비판받아 마땅하다. 미당이 내 아버지라도 그건 어쩔 수가 없다. 인간의 3대 발명품은 종교,정치,문학이다. 그중 문학은 인간을 위해 옳은 일만 하라고 발명한 것이지 불의와 타협하라고 발명한 게 아니다.” 어떻습니까, 그의 퍼런 서슬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저는 소설가 조정래를 만나보진 못했지만 또다른 대목에서 그의 인간됨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벌교읍 제석산 바로 밑에는 소설 태백산맥 문학관이 있고 그 옆에는 소화의 집, 현 부잣집 등의 건물이 복원돼있습니다. 태백산맥 문학관에는 이채로운게 있지요.
    소설 태백산맥 문학관 옆에 있는 현부잣집이다. 대문의 2층 누각이 위풍당당하다

    소설 태백산맥 문학관에는 조정래가 쓴 육필원고가
    보존돼있다. 200자 원고지로 1만5700매로 웬만한 성인
    키를 능가한다.
    본인이 쓴 육필 원고 외에 아들과 며느리가 200자 원고지 1만5700매를 그대로 베낀 것이 전시돼있는데 여기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내 사후(死後), 너희(아들과 며느리)들이 내 책을 멀고 살 것이니 태백산맥을 일일이 베껴라!” 놀랍게도 며느리는 한달여 만에 1만5700장을 모두 필사했습니다. 미심쩍은 조정래 “혹시 대충 베낀게 아닌가”하고 일일이 검사했는데 원고는 한자의 틀림도 없었다는 저이요. 조정래는 지금도 컴퓨터 대신 펜으로 육필(肉筆)을 고집한다고 합니다. 조정래가 우파 인사들을 무작정 비판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고(故)박태준 포철 명예회장을 1990년대 쓴 소설 ‘한강’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자신의 아동용 위인전집 15권 가운데 박태준을 신채호-김구-안중근-한용운과 동급반열에 올려놓았지요. 박태준 역시 조정래를 좌파가 아닌 민족주의자, 그것도 투철한 민족주의자라고 평가했고 소설 ‘태백 산맥’이 이적성(利敵性) 표현물 시비에 연루됐을 때 반대의견을 내기도 했습니다. 박태준은 조정래의 태백산맥 기념관 사업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조정래의 박태준 인물평을 들어볼까요? “박태준이라는 인물은 한국사회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이에요. 우리 근현대사에서 그처럼 뒷모습이 깨끗한 기업인이 있었나요? 모르는 사람들은 박 회장을 개발독재의 주역이라고 말하지만 개발독재의 주역은 독재로 인해 권력을 누리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독재를 행사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거예요. 박회장은 순수한 기업인일 뿐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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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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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산맥 등장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봐야하는 이유
    김범우의 집 정면이다. 아랫채에 누군가 살고있다고
    한다.
    교에는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곳들을 알리는 표지판이 곳곳에 서있습니다. 제일 먼저 제가 가본 홍교 맞은편은 김범우의 집이고 김범우의 집 건너편,홍교 뒷편은 염상구 일당이 활동하던 청년단 자리로, 야트막한 언덕입니다. 벌교 중심부의 공공기관과 자애병원,여관 같은 곳들이 산재해있으며 앞서 말씀드린 태백산맥 문학관 주변에도 지금은 어린이 집으로 바뀐 옛 교회터와 조정래가 살았던 집이 있는데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있어 대문엔 아무 표지도 없었습니다. 소설 태백산맥 문학관 바로 앞은 소화의 집인데 소화는 어머니 때부터 무당이었지요. 그는 양조장집 아들로 좌익이 되는 정하섭을 사랑하며 그를 위해 헌신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학교를 다니지 않았지만 소작인의 생존권에는 눈을 뜬 인물입니다. 그런 소화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이가 미혼모로 소화를 낳은 어머니지요. 정참봉과의 사랑으로 낳은 딸 소화도 자신과 같은 운명이 되지않을까 노심초사하지만 소화 역시 어머니처럼 미혼모가 됩니다. 만일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를 전부 답사해보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조정래의 말이 도움이 될 듯 합니다. 그는 전남과 지리산 일대의 거의 모든 현장을 답사한 뒤 소설을 썼다고 했는데 구체적인 지명까지도 밝혔습니다. “소설 ‘태백산맥’의 1차 무대는 보성군 벌교읍입니다. 2차가 순천-화순-광주 쪽이고요. 3차가 지리산입니다. 1차 무대는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취재가 필요없었습니다. 2차 무대부터 취재를 했습니다. 화순 백암산, 장흥 유치 등이 전부 빨치산 지구입니다. 지리산은 아흔아홉 골짜기라고 합니다. 평생 여기서 심마니를 한 사람도 골짜기를 다 모른다고 할 정도로 큰산이에요. 전남 경남 전북도의 가운데 떡 버티고 앉아 있는 산입니다. 전북도당 경남도당 전남도당이 맡았던 골짜기가 모두 다릅니다.” 소설 ‘태백산맥’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몇 명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빨치산 소년전사로 노비 태생인 조원제는 진보 경제학자인 고(故)박현채를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조정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위대한 전사 ‘조원제’가 바로 박현채 선생입니다. 빨치산 투쟁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다가 박 선생을 만났습니다. 이 분은 저의 광주서중학교 선배입니다.”
    벌교읍 제석산 아래 마련된 소설 태백산맥 문학관.

    박현채는 광주서중학교(지금의 광주일고) 3학년 때 남로당 서중학교 총책이었다고 합니다. 광주서중은 전남지방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들어가는 학교였는데 천재 소리를 듣던 박씨는 조숙해 어린 나이에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깊이 빠졌다고하지요. “박 선생은 종전 직전에 화순에 보급투쟁을 하러 내려왔다가 체포됐습니다. 다행히 학생이라서 징역을 살지 않고 특별사면 조치를 받았습니다. 기억력이 비상해 지리산 빨치산 시절을 샅샅이 기억했습니다. 정말 놀라워요. 대개 빨치산 투쟁을 한 사람들은 자기가 활동한 분야밖에 몰라요. 그러나 박선생은 지리산 빨치산을 총체적으로 다 알아요. 전투부보다 상위인 문화부 중대장을 맡아 그렇습니다. 문화부는 작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부 중대장이 ‘안된다’고 하면 전투 중대장은 전투를 못하게 돼 있습니다. 박선생이 문화부 중대장을 17∼18세 때에 했습니다. 똑똑하고 강인한 체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이현상(李鉉相·1905~1953)은 빨치산 출신 이태가 쓴 소설 ‘남부군’에도 나오는 지리산 유격사령부 사령관입니다. 박현채 선생이 조원제로 나오는 것과 달리 그는 실명(實名)으로 등장합니다.
    벌교천의 녹슨 철교에는 아직도 기차가 다닌다. 천변에 갈대가 무성하다.

    지금의 충남 금산(과거엔 전북 금산)에서 부농(富農)의 아들로 태어난 이현상은 중앙고 재학중 사회주의에 경도됐으며 1928년 보성전문(지금의 고려대)에 입학한 뒤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좌익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인물입니다. 남로당의 중심인물이 된 이현상은 1948년 남북협상 당시 월북했다가 회의가 끝난 후 남하 하지않고 북한에 머물며 강동정치학원에 다니며 유격전술을 익혔습니다. 교육을 마친 후 그는 이주하와 함께 월남해 지하활동을 시작했습니다. 6·25막바지 지리산을 일대로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던 이현상은 1953년 9월18일 지리산 빗점골 부근에서 총상을 입고 사망한 채 발견됐습니다. 김일성은 그를 1968년 조성된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가장 먼저 묻었으며 1호 애국열사로 지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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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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