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43 동주와 백석과 자야와 길상사와 자작나무

浮萍草 2016. 3. 14. 22:56
    윤동주 시인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
    시인 윤동주의 연희전문 졸업사진이다
    난 2월17일 개봉된 영화 ‘동주’가 관객 100만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있다고 합니다. 저예산으로 제작된데다 흑백영화인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는 알다시피 비운의 시인 윤동주(尹東柱·1917~1945)를 다뤘습니다. 최근 영화 ‘동주’를 관람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시인은 제가 졸업한 대학의 대선배로,관람하는 내내 신촌 캠퍼스 한켠에 있는 시비 (詩碑)와 그가 기숙했던 핀슨홀을 떠올렸습니다. 핀슨홀은 연세대 건립자인 언더우드 목사 동상 옆에 있는 건물입니다. 영화를 보면 의외로 그의 친척이었던 송몽규가 주인공,윤동주가 조연(助演)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이것은 이준익 감독의 계산된 연출이 아닌가 싶습니다. 뭔가 소심해보이는 시인이 암울했던 시대를 살아온 지식인의 전형적인 자화상 아닐까요?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영화 말미 일본 형사가 강제 자백을 받아낸 진술서에 서명을 강요할 때 윤동주가 한 말이었습니다. “당신들이 조작한 이 서류처럼 내가 행동하지 못한게 한스럽다. 이런 시대에 시(詩)를 써보겠다고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기인이사 43편은 암울한 시대 한반도와 만주와 일본을 떠돈 시인들과 그 연인 그 이후 벌어진 일들을 이야기해보려합니다. 윤동주는 중국 길림성 용정(龍井)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수차례 탈북자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그의 출생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부근에 있는 해란강을 고지(高地)에서 바라본 것이 10년도 훨씬 전의 일인데 아직도 눈앞에 생생합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는 가사의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해란강은 용정에서 4㎞ 정도 떨어져 있지요. 뱀처럼 꾸불꾸불 만주 벌판을 감아도는 해란강의 모습을 비암산이라는 곳에서 바라볼 때 한국인 들은 남다른 감정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이곳에 있던 소나무가 한민족의 민족정신을 고취시킨다고 일제가 고사(枯死)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시인 윤동주는 명동학교-숭실중학교에서 수학한 뒤 지금의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2학년 때 ‘소년’지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그때가 1939년입니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당시 시인의 하숙집은 지금의 서촌이었지요. 소설가 김송이 살았다는 서촌의 가옥에 ‘윤동주 하숙집’이라는 표시가 붙어있고 인왕산 자락 청운동 언덕은 ‘윤동주 시인의 언덕’으로 명명돼 있습니다.
    청운동 산꼭대기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이다. 시인의 성격을 닮아 건물이 깔끔하게 건축됐다.

    거기에 시인의 대표작인 ‘서시(序詩)’가 새겨진 검은색 바위가 청와대와 서울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청운동 인왕산 자락 윤동주 문학관 맞은편에는 1968년 1·21사태 때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124군부대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급습할 때 이를 저지하다 순직한 고 최규식 총경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최 총경 역시 연세대 정외과 출신이지요. 그래서인지 나라를 위해 숨진 시인과 그 후배인 최 총경을 바라보며 읽는 윤동주의 대표작 서시는 남다른 맛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권력의 핵심인 청와대를 내려다보며 뭔가를 암시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드는 서시를 감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인의 언덕에는 '서시'를 새겨놓은 바위가 있다. 시인은 우리에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이 살아나가길 기원하고있을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인 윤동주가 하숙하던 집 앞 벽에는 안내문과 함께 태극기가 걸려있다. 오른쪽 뒷편으로 인왕산이 보인다.

    시인은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同志社) 대학에 다니던 중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1943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됐습니다. 옥중에서 요절했을 때 그의 나이는 29세였으며 100여 편의 시를 남겼지요. 광복을 불과 6개월여 앞두고 눈을 감은 시인의 사인(死因)에 대해선 차마 옮기기 힘든 설(說)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일제가 생체실험, 즉 시인을 ‘마루타’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되짚어볼수록 일본은 우리에게 참으로 못된 짓을 많이 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시인의 마지막을 정리해보겠습니다. 공식적으로 그는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고 열흘뒤,그의 가족에게 다음과 같은 의심을 살만한 내용의 전보(電報)가 전해지지요.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를 가지러오라.’ 전보를 받고 아버지 윤영석과 삼촌 윤영춘이 일본으로 갔는데 ‘동주 위독하니 보석(保釋)할 수 있음. 사망시 시체를 큐슈제대(九州帝大)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이란 전보가 또 온 것입니다. 후일 시인의 동생 윤일주씨는 “사망했다는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전보를 보고 온 집안 사람들이 느낀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참으로 의문이 많이 남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화 ‘동주’에 등장하는 송몽규 역시 실존인물로 윤동주 시인의 친구이자 고종사촌입니다. 그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 체포돼 죽음을 맞는데 일제는 그도 생체 실험 대상으로 사용했다고 하지요. 가수 윤형주와 시인 윤동주는 6촌 재종형제간입니다. 윤동주가 만주에서 태어난 것은 우리의 어두운 민족사와 관계가 깊습니다. 원래 이 집안은 본관이 파평이고 함경북도 종서군 동풍면 상장포에 살았는데 19세기 말 기근이 심해지자 시인의 증조부인 윤재옥이 1886년 가솔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지요. 시인의 아버지 윤영석은 1910년 독립지사인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과 결혼했습니다. 그의 고모인 윤신영이 송창희와 결혼했는데 그 고모의 아들이 영화에 나오는 송몽규였습니다.
    폭설이 내리던 날, 청운동 윤동주 문학관 앞 담장에 누군가 만들어놓은 꼬마 눈사람이다.

    시인 윤동주의 삶을 살펴보면 목사 문익환(文益煥·1918~1994)도 등장합니다. 1935년 윤동주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가는데 거기 용정의 명동소학교 동창 문익환이 다니고있었던거지요. 또한 숭실중학에는 이미 장준하(張俊河·1918~1975)가 재학중이었습니다. 이 셋은 훗날 숭실중이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되자 자퇴합니다. 윤동주는 다시 용정의 광명중학교로 돌아가는데 거기서 국회의장을 지낸 정일권(丁一權·1917~1994)을 만나지요. 영화 ‘동주’에 문성근이 시인 정지용역으로 출연한 것은 이런 인연 때문이었을 겁니다. 정지용의 대표작 ‘향수’를 보고 갑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러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섭 이슬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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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윤동주가 가장 흠모했던 시인은 백석>
    런데 영화에도 나오다시피 시인 윤동주가 가장 흠모했던 시인이 있습니다. 
    오랜기간 잊혀졌다가 복권된 백석(白石·1912~1996)입니다. 
    윤동주는 연변에 살 때부터 다섯살 위인 백석의 시집‘사슴’을 읽은 뒤 그에게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이후 윤동주는 시집 ‘사슴’을 옆에 끼고 살았으며 일본으로 유학갔을 때는 동생 일주에게 보낸 편지에서“이 시집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백석과 윤동주는 과연 같은 시풍(詩風)을 지녔을까 다음의 두 시를 감상해봅니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중략)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이 시는 백석이 쓴 ‘흰 바람벽이 있어’의 구절들입니다. 1941년에 발표된 이 시를 두고 평론가들은“고향을 떠난 인물의 내면을 통해 부정적 현실을 이겨내려는 내적 의지를 표현한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윤동주의 ‘별헤는 밤’입니다.
    윤동주의 육필원고인 '별헤는 밤'이다. 글씨 모양을 보면 사람됨을 알 수 있겠다
    >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오.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않은 까닭입니다. 별하나에 추억과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쓸쓸함과 별하나에 동경과 별하나에 시와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패,경,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가난한 이웃 사람 들의 이름과,비둘기,강아지,토끼,노새,노루,프랑시스 잠,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도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어떻습니까? 1941년 11월5일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앞두고 윤동주가 쓴 이 시는 1948년 정음사에서 간행된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등장하는데 서울 종로나 광화문의 어느 골목에서 두 시인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윤동주 시인의 별헤는 밤 육필원고다. 글씨는 사람의 됨됨이를 보여준다.

    시인 백석의 고향은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입니다. 정주 오산학교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 선생의 영향으로 기독교 세력이 강한 곳이지요. 백석은 부친이 37살, 모친이 24살 때 낳은 귀한 ‘손’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이봉우는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시집왔는데 음식 솜씨가 남달라 고당 조만식 선생이 오산학교 교장시절 그 하숙집에 기거했으며,백석의 부친 백용삼은 고당,계초 방응모 선생과도 친분이 두터웠다고 합니다. 어릴 적 ‘백기행’으로 불린 백석은 이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겠지요. 백석의 부친 백용삼은 개화기 사진계의 초창기 인물입니다. 동향인 계초 방응모 선생은 그런 그를 조선일보의 사진반장으로 채용하기도 했습니다. 훗날 백석이 조선일보를 통해 등단한 것이나 조선일보 기자를 지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백석은 1918년 평북 정주의 오산소학교에 입학했지만 학교는 1년뒤 일어난 3·1운동의 여파로 교실이 불타면서 1년6개월간 문을 닫아야했지요. 백석은 1924년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는데 이때의 교장이 고당 조만식 선생이었습니다. 백석이 경성(京城), 즉 지금의 서울을 처음 본 것은 1927년 수학여행 때라고 합니다. 그는 서울에 대해 “건건쩝쩔한 냄새가 나고 황혼녘 같은 서글픈 거리”라는 인상기를 남겼지요. 1929년 오산학교 졸업 후 백석은 가정형편 때문에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930년 1월5일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지금의 신춘문예)에 그가 쓴 단편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인생에 전기가 마련됩니다.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있던 계초 방응모 선생이 일본 유학자금을 대준 것입니다. 백석은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영어사범과에 진학해 1학년 때는 영어,2학년 때 프랑스어,3학년 때 러시아어를 공부했습니다. 이때 세례도 받았고‘동경 길상사(吉祥寺) 1895번지’에 살았다는데 이 이름은 훗날 다시 등장하지요. 아오야마학원에서 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백석은 학교로 가는 대신 조선일보 출판부에 입사합니다. 1934년 4월의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백석은 잡지 ‘여성’의 편집업무를 하는 한편,조선일보 지면에 러시아 작가 안톤 체홉의 단편을 번역 발표했습니다. 백석은 1935년 8월 시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을 걷습니다. 그의 일생에서 기념비적인 시 ‘정주성(定州城)’은 유년시절의 기억을 방언으로 표현한 것인데 감상해봅니다. ’ ‘산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듯한 소리가 들리는듯하다. 잠자리 조울든 무너진 성(城)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듯이 크다란 산(山)새 한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영화 ‘동주’에도 등장한 백석의 첫 시집 ‘사슴’이 나온 것은 1936년 1월20일입니다. 100부 한정판으로 나온‘사슴’은 당시 시인이 되기를 꿈꾸던 문학청년들이 서로 돌려보면서 시집을 통째로 암기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시 ‘여승(女僧)’을 봅니다.
    최근 초판본 그대로 복각돼 출판된 윤동주의 시집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 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 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어떻습니까, 비록 북한작가였지만 그가 시인들이 뽑은 ‘한국의 대표시인’의 반열에 당당히 오른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백석의 삶은 시 못지않게 여러 여인들과의 로맨스로 유명한데 그 첫번째는 친구의 혼인 축하자리에서 처음 본 박경련이었습니다. 백석은 생애 통틀어 세번 경남 통영에 갔으며 시를 남겼는데 첫번째 통영행은 1935년 6월, 친구 허준의 혼인축하 회식자리였다고 합니다. 그때 남긴 시 ‘통영’에는 박경련이라는 여인이 ‘천희(千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요.
    시인 윤동주가 사망한 뒤 1948년 발간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다.
    ‘옛날엔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열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백석은 이후로도 두번 통영에 가 시를 남겼는데 이번에는 박경련이 ‘난(蘭)’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요. 백석은 1936년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함흥 영생고보 영어 교사로 옮겼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난은 절친했던 친구 신현중과 1937년 혼인하지요. 하필이면 신현중은 백석이 난을 향한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으면서 통영에 갈 때마다 동행했던 친구였습니다. 실연의 아픔을 달랠 시기 이번에는 김영한(1916~1999)이라는 여인이 백석의 앞에 등장합니다. 김영한에 대해 잠시 살펴봅니다.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16살 때 조선 권번,즉 기생조합에 들어갑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근근이 이어가던 생활이 금광을 한다는 친척 때문에 풍비박산나면서 기생의 길로 밀어넣은 것인데 기명은 진향(眞香)이었습니다. 그는 정악계(正樂界)의 대부 하규일 문하로 들어가 창가곡,궁중무를 배우는 한편, 잡지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할만큼 재능이 많았습니다. 김영한이 백석을 만난 것은 자신의 일본 유학을 주선해준 신윤국이 함흥 감옥에 투옥됐기 때문입니다. 신윤국을 면회갔다가 만나지 못하자 함흥권번에 주저앉은 김영한은 우연히 영생고보 교사들의 회식장소였던 함흥관에 갔다가 운명적으로 백석을 만나지요. 백석은 옆자리에 앉은 김영한의 손을 잡고 이렇게 속삭였다고 합니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백석은 김영한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주는데 이것은 ‘당시(唐詩)선집’에 나온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따온 것이었다고 합니다. 자야오가는 중국 장안에서 서역으로 오랑캐를 정벌하러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담은 시인데,앞서 말한 백석의 일본 주소 ‘길상사’나 결국 이뤄지지 못한 백석과 자야의 사랑을 보면 뭔가 운명적인 것이 있긴 있는 모양입니다. 1937년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가자고 했지만 자야는 홀로 경성으로 떠났습니다. 백석은 결국 만주 대신 자야를 따라 경성으로 와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동거하지요. 이때 3년간 살며 그가 남긴 대표적인 시가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입니다.
    윤동주가 가장 흠모했던 시인 백석의 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 오른쪽은 백석을 평생 사랑했던 김영한씨가 쓴 '내사랑 백석'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탸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탸샤는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탸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탸샤를 생각하고 나탸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같은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탸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응응앙 울을 것이다.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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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만에 끝장난 백석과 자야의 열애
    거웠던 백석과 자야의 사랑은 3년만에 백석의 부모에 의해 끝장나고 말지요. 
    백석이 기생과 동거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백석의 부모가 1939년 충북 진천에서 한 처녀와 혼례를 올리게 한 것입니다. 
    그 처녀와 백석의 결혼은 머지않아 끝났습니다. 
    부모의 강요에 의해 혼인을 한 백석은 다시한번 자야에게 만주행을 권유했지만 자야는 자기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합니다. 
    백석은 1939년 만주 신경(지금의 장춘·長春)으로 떠나는데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습니다.
    백석은 이후 고당 조만식 선생의 일을 돕다 1947년 북한 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의에서 외국문학문분과원이 됐으며 이후 파데예프의 ‘청년근위대’,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파블렌코의‘행복’등을 번역했다는 북한측 기록이 있습니다. 
    시는 1957년 평양신문에 ‘감자’ 등을 발표했지만 반동분자로 몰렸는지 1959년 양강도 삼수군에 있는 국영협동조합으로 하방(下放)돼 양치기 일을 하기도했지요. 
    1962년 일체의 창작활동을 중단한 그는 1995년 84세까지 살다 사망했습니다.
    백석이라는 인물에 대해선 여러가지 평이 가능한데 저는 한때 조선일보에서 같이 일했던 문학평론가 백철(1908~1985)의 평이 가장 정확하지않나 생각합니다. 
    그는 ‘1930년대 문단’이라는 글에서 백석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백석에 대해 사내(社內)의 평판이 그리 호감적인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내게 말한 것인데‘사람이 새파랗게 젊어가지고 도도하기만 하단 말이야. 
    원 그러면서 시를 쓴다는거야?’ 백석은 본시 성품이 모질지 않았다. 대신 결벽성이 심한데가 있었다?.”
    그런 백석을 보며 제가 생각한 것은 만주와 한반도 함경도 일대에 많이 자라는 자작나무였습니다. 
    백화(白樺)라고도 불리는 자작나무는 순결의 상징인데 의외로 백석은 자작나무를 소재로 한 시를 꽤 남겼습니다. 
    ‘백화’라는 시를 감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백석이 떠돌았던 만주와 함경도 일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자작나무 숲이 인제에도 있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자작나무들은 속살을 벗어낸다. 나무의 흠들이 사람의 눈처럼 그것을 지켜보고있다.

    그러고보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사랑했던 윤동주 역시 자작나무처럼 순결한 존재로 저에겐 비쳐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최근 강원도 인제에 다녀왔지요. 남한에서 유일하게 군락을 이루고 있는 인제 명품 자작나무 숲을 보고 싶었던 겁니다. 임도를 따라 1시간 정도 올라가야하는 인제 자작나무숲은‘인제국유림관리소’라고 네비게이션에 치면 되는데 경춘고속도로 동홍천IC를 빠져나와 인제쪽으로 가다보면 38선 휴게소 근처에 진입하는 길이 있지요. 시인 박인환 문학관 훨씬 못미쳐입니다. 이 숲 초입은 자작나무로 구성돼있다가 중턱부터는 자작나무가 보이지 않습니다. 정상부근에 가면 아랫쪽과 확연히 다른 자작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하필 제가 갔을 때 백석의 표현처럼 ‘펄펄 눈이 나려’ 더욱 환상적인 자태를 감상했습니다. 그렇다면 백석과 결별한 후 남한에 남은 진향,즉 김영한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김영한은 1951년 성북구 지금의 길상사가 있는 땅을 구입합니다. 원래 이곳은 일제시대 백인기의 별장으로 건물 3채가 들어서 있었으며 해방후에는 청암장으로 불렸습니다. 김영한은 당시로서는 거금 650만원을 주고 청암장을 인수한 뒤 요정으로 탈바꿈시켰지요. 이곳은 1970년대까지 부근의 삼청각, 우이동의 선운각과 함께 한국의 3대 요정으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사라져버린 요정은 대체 뭐하는 곳이었을까요. 시인 고은이 쓴 다음의 시를 보면 요정이 뭔지를 알 수 있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대원각이 길상사로 바뀌기 전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때는 이미 요정이 아닌 고깃집으로 바뀐 후였지만 ‘대원각’의 명성을 들었기에 건물을 유심히 관찰한 적이 있지요.
    이 작은 건물들이 대원각 시절 손님들이 기생과 운우지정을 나누던 곳이다.이 건물들은 대원각이 고깃집으로 바뀐 뒤 고기냄새로 찌들어있다 지금은 스님들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70년대 성북동 대연각이라 우이동 삼청각이라 아니 코밑의 청진동 장원이라 거기 가면 온통 번드르르르 아리따운 연인의 치맛자락 방바닥을 쓸어가며 교자상 가득히 산해진미 점심때라면 밥도 은수저로 떠 넣어주고 그렇게 밥 먹고 나면 야들야들한 손으로 등때기 굳은 살 풀어주고 슬슬 졸음 오는 척하면 뒷방으로 모셔가 그 침침한 방 요 위에 눕혀져 졸음은커녕 난데없는 운우의 정이 쏟아지니 정아무개가 뒹군 방 아무개가 뻗은 방 박아무개 김아무개가 늘어진 방 이렇게 점심때 대낮 주색 마치니 퇴근 후에는 영락없는 모범공직자 아니었던가 그것으로도 모자라지만’
    삼청각-선운각과 함께 한국 3대 요정으로 불리던 대원각은 길상사로 바뀌었다

    여하간 이렇게 돈을 모은 김영한은 북으로 간 백석을 잊지 못했는지 백석의 생일인 매년 7월1일이면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곤 팔순을 바라보던 1987년 자신이 평생 애독하던 에세이 저자 고 법정(法頂)스님과 연락하게 되지요. 김영한씨는 김대도행(金大道行)이라는 분을 통해 미국 로스앤젤레스 고려사에서 법정스님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아무 조건없이 대원각을 시주할 테니 절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법정스님은“평생 주지도 맡아본 적이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법정스님은 여러 번 사양했지만 1994년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펴며 불교의 사회적 책무를 알리다 마침내 김영한씨의 청을 받아들입니다.
    폭설 내리던 날 극락전앞이다. 백석이 자야로 불렀던 김영한은 이렇게 눈내리던 날 이곳에 자신의 재를 뿌려달라고했다.

    1996년 마침내 대원각은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는데 대지-임야가 7000여평, 시가 1000억원에 달했습니다. 이렇게 통큰 시주를 하고 김영한이 법정스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염주 한벌과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이었으니 아름다운 기부가 분명하지요. 여기서 여러분은 백석이 동경 아오야마학원 유학시절 머문 주소가 길상사였다는 그 우연을 다시 떠올려보시길 바랍니다.
    왼쪽 아래건물이 김영한씨가 거주하던 길상헌이다. 김씨의 유골은 눈 내리던 날 길상헌 뒷편에 뿌려졌다. 지금 그곳엔 김씨를 기리는 사당과 유골함이 서있다.

    1999년 김영한씨는 세상을 떠나며 화장을 한 뒤 첫눈이 길상사에 내리면 자신이 머물던 길상헌(지금의 길상사 입구에서 왼쪽 건물) 뒷편 계곡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지금 길상헌 뒤에는 작은 사당과 김씨의 소박한 유골함과 ‘나와 나탸샤와 흰당나귀’가 적힌 김씨의 약력판이 서있습니다. 요정을 절로 바꾼 법정스님도 2010년 여기서 입적했지요. 길상사 맨 윗쪽 진영각은 법정스님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며 진영각으로 들어가서 오른쪽 밭에는 법정 스님의 유골함이 있습니다. 스님의 유골함은 송광사에도 있는데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법정스님의 영정을 모신 진영각에는 작은 유골함도 있다.

    송광사의 옛 이름이 바로 길상사였다는 것입니다. 마침 3월11일은 법정스님이 입적한 날입니다. 길상사를 돌면 법정스님과 김영한씨의 인연 그에 앞서 백석과 김영한의 사랑 더 나아가 백석을 흠모한 윤동주가 생각날 것입니다.
    윤동주 문학관위로 올라가면 시인의 언덕이 나온다.

    서촌의 윤동주 하숙집에서 청운동 윤동주 문학관과 시인의 언덕을 거쳐 북악스카이웨이 건너 길상사까지는 걸어서 2시간이 채 안걸릴 것입니다. 다가오는 봄날,이곳을 거닐며 우울했던 시절,우리 문학계를 빛낸 찬란한 별들의 내면을 밟아보기를 권합니다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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