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42 김승옥과 김지하와 순천만의 안개

浮萍草 2016. 2. 28. 11:55
    안개를 가장 멋진 문장으로 표현한 작가
    금으로부터 52년전인 1964년 한국 문단(文壇)을 매혹시킨 문장이 등장합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안개를 이렇게 적확하게 표현한 글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습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무진을 둘러싸고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않는 먼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무진의 안개,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사람들로 하여금 해를,바람을 간절히 부르게하는 무진의 안개,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젊은 날의 김승옥. 순천 김승옥 문학관 입구에 걸린 사진이다.

    김승옥(金承鈺·75)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에서 가장 빛나는 문장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그의 글을 두고 시인 김지하는“감수성의 일대 혁신이었고 문장의 일대 파격이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꾼들도 그 앞에서는 설설 기었다”고 극찬을 했습니다. 훗날 ‘도가니’라는 소설 무대로 무진(霧津)이라는 도시가 등장한 것은 그에 대한 오마주였다고 합니다.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이 다른 대표작 ‘서울 1964년 겨울’ ‘서울의 달빛 0章’보다 지금까지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한 소설가는 “속수무책의 패배의식이 이렇게 찬란한 문장이 될 수 있다니…”라고 평했는데 더 정확한 것은 황석영의 말입니다. 그는 김승옥의 소설을 “그 이전 시대의 것들에 비하면 대단히 다른 면모가 있었다”고 했는데 그의 말을 잠시 인용해보도록 합니다. “매사 엄숙하지 않고 관념이 아닌 장난스런 말투로 시각 촉각 청각 냄새 분위기 등을 통하여 사건을 전개해나간다. 아마도 이런 문체가 ‘감각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작가 스스로는 다음과 같이 자신을 평하고있습니다. “나에게 ‘60년대 작가’라는 별칭이 붙어다니는데 아닌게 아니라 이 카테고리야말로 1960년대 상황인식이라는 걸 깨닫게되는 것이다. 1960년대를 고려치 않는다면 내가 써낸 소설들은 한낱 지독한 염세주의자의 기괴한 독백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순천만의 농토다. 그 끝은 바다다.

    소설가 김훈이 한국일보 문학담당 기자였던 시절, 그에게 남긴 평도 인용해볼만합니다. “김승옥의 산문은 바다 또는 바다에 연한 소도시에 관하여 서술할 때 가장 명징한 아름다움에 도달한다. 김승옥의 바다는,때로는 카뮈의 에세이들이 그려내는 알제리의 바다처럼 생의 작렬감에 가득 찬 바다이지만,더 많은 경우에는 도시(=현실)와의 불화의 관계 위에 설정된 자폐의 공간이다. 김승옥의 많은 젊은 주인공들은 바다에서의 갱생을 꿈꾸며 바다로 갔다가 바다에서 죽는다. 그 바다는 소설 속에서는 수 많은 이미지들에 의해 모자이크된 가공의 바다이고 지도 위에서는 김승옥이 유년과 소년시절을 보냈던 여수 앞바다, 순천만, 광양만의 바다이다.”
    순천만 위로 재두루미 가족이 하늘을 날고있다.

    김훈은 심지어 이런 헌사(獻辭)까지 바치지요. “70년대 기라성 같은 청년작가 김승옥이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발표했을 때 아버지는 문인 친구들과 함께 우리 집에 모여서 술을 마셨다. 그들은 모두 김승옥이라는 벼락에 맞아서 넋이 빠진 상태였다. ‘너 김승옥이라고 아니?’ ‘몰라 본 적이 없어. 글만 읽었지. 그들은 ‘김승옥이라는 녀석’의 놀라움을 밤새 이야기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새벽에 아버지는 ‘이제 우리들 시대는 갔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식은 안주를 연탄 아궁이에 데워서 가져다드렸다. 아침에 아버지의 친구들은 나에게 용돈을 몇푼씩 주고 돌아갔다.”
    소설가 김훈이 신문기자 시절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에 대해 쓴 지면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무진이라는 도시는 대체 어디일까요. 역사적으로는 광주광역시의 옛 지명가운데 하나가 ‘茂珍’ 혹은 ‘武珍’이었다지만 작가 스스로는 순천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김승옥은 순천(順天)이라는 바닷가 도시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김승옥은 1941년 12월23일 일본 오사카에서 아버지 김기선과 어머니 윤계자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명(兒名)은 학길(鶴吉)이었다고 합니다. 광복을 맞은 해인 1945년 이들은 귀국해 전남 진도에서 수개월을 지내다 광양으로 갔습니다. 광양 매화마을에 있는 매천 황헌 선생 유적지가 바로 이들이 머물던 곳이라는 말도 있지만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김승옥의 본적지는 전남 광양인 것이 분명합니다. 1년 뒤인 1946년 김승옥 일가는 순천으로 이사해 그곳에 정착했습니다. 1948년 김승옥이 순천 남국민학교에 입학했을 때 여순(麗順)반란사건으로 아버지가 사망했습니다. 김승옥의 공식 기록에는 ‘아버지가 여순반란사건으로 사망했다’고만 돼있습니다. 정부편에 섰다 참변을 당했는지 좌익편이었는지가 불분명하지요. 순천만 근처에 있는 김승옥 문학관 관계자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는 “김승옥 선생의 아버지가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좌익편에 섰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알고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관계자의 말이기 때문에 100% 사실로 믿긴 어렵습니다
    순천시가 만들어놓은 김승옥 문학관이다.

    아버지를 잃은 김승옥 3형제를 키운 것은 어머니였다고 합니다. 1950년 6·25가 터지자 일가는 경남 남해로 피난갔다가 다시 순천으로 돌아왔는데 김승옥은 1952년 월간 ‘소년세계’에 동시를 투고해 게재된 것이 계기가 돼 동시, 콩트 등 창작에 몰두하지요. 이때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행상을 하던 김승옥의 어머니가 순천의 한 책방 주인에게 “제가 한달에 한번 결제를 할 테니 아이가 원하는대로 책을 읽게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겁니다. 그 책방을 찾아보려했으나 순천도 개발이 진행돼 찾지 못했습니다.
    서울 문리대 60학번은 우리 문학사에 남을 천재들이 대거 출현한 시기이다. 사진 위에 쓰여진 이름은 당시'산문시대' 동인들이다.왼쪽 위로부터 최하림,김현,
    두번째줄 김치우와 한사람 건너 김승옥이다.기자는 공교롭게 시인 최하림과 생의 마지막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김승옥은 명문 순천중-순천고를 거쳐 1960년 서울문리대 불문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해는 문학사에 남을 천재(天才)들이 출현한 시기입니다. 불문과의 김승옥-김현-김치수,독문과의 염무웅-이청준-김주연-김광규,영문과의 박태순-정규웅 등입니다. 시인 김지하는 그들보다 한해 빠른 1959년에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했고 김화영(불문과)-오세영(국문과)은 그들보다 한해 늦은 1961년 서울문리대에 합류했으니 가히 기념비적인 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중에서도 김승옥과 이청준은 가히 독보적이었지요. 한 평론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지요. “김승옥과 이청준의 등장은 김동리-황순원 이후 박경리-서기원-이호철-선우휘 등 50년대 작가군이 보여주었던 한국적 소설의 틀을 깨고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문체로 보다 치밀하게 시대상과 인간상을 그려냈다.”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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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자의 전성시대’ 시나리오를 쓰게 되고
    김승옥이 시나리오를 쓴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포스터.김승옥의 시나리오는 영화계에 일대 파격이었다.
    승옥은 김현-김치수와 함께‘산문시대’동인으로 활동했는데 네명의 멤버 가운데 한명이 시인 최하림 이었습니다. 지난 2010년 71세로 타계한 그를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기사가 나간 후 채 한달도 되지않아 시인 최하림은 세상을 떴습니다. 성공가도를 질주하던 김승옥은 대학을 졸업하던 1965년‘서울 1964년 겨울’로 제10회 동인문학상을 수상 하고 1966년 ‘다산성’‘염소는 힘이 세다’를 내며 영화계와도 인연을 맺습니다. 영화화된 ‘무진기행’의 시나리오 집필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김승옥의 앞길에 가시밭이 등장하지요. 1970년 절친했던 시인 김지하가 담시‘오적(五敵)’으로 구속된 것입니다. 김승옥은 김지하 사건으로 붓을 꺾는데 당시 상황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긴 사람이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 첫 국정원장 이종찬입니다. “한때 김지하 혹은 그를 둘러싼 그룹이 북한과 연계된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이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의 생각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반항에 가까웠고 결론 부분에 가서는 인간존중의 ‘자유공동체 사회’를 지향하는 것 같았다…" 이런 의견에도 불구하고 당시 중앙정보부는 김지하를 잡기위해 혈안이 됐습니다. 이로 인해 피해를 본 주변 사람들이 200여명에 달하자 김지하는 제발로 남산(중앙정보부 건물)으로 걸어 들어가 자수했습니다. 김승옥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이 새벽 왜 순천만 갈대밭을 찾은 것일까.

    “피해다니던 김지하가 마지막에 저를 찾아왔어요. ‘더 이상 숨어 지낼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내 소재를 대라는 당국의 요구에 고통받고 있다. 박정희가 날 죽일 작정인 것 같다. 내일 자수할 테니 네가(김승옥) 밖에서 문인들을 모아 구명운동을 해다오.” 김지하가 감옥으로 간 뒤 김승옥은 박태순-이문구 등과 함께 구명운동을 벌였는데 불똥이 자신에게 튀고 말았습니다. 역시 김승옥의 회고입니다. “결국 나에게까지 감시가 붙었다. 불안 좌절 때문에 술만 늘었다. 나는 선천적으로 술을 못했는데도.”
    김승옥 문학관을 나와 다시 무진교쪽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작은 다리다.

    2005년 EBS에서 방영한 ‘지금도 마로니에는’이라는 프로그램에는 김승옥과 김지하가 나눴다는 대화가 나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극작가의 창작인지 모르지만 두 사람의 성격을 잘 보여는 것 같아 인용해보려 합니다. 지하=난(蘭)을 친다고 하냐, 그린다고 하냐? 승옥=난은 친다고 하는거잖아 지하=그럼 난 난을 치고있었냐 그리고있었냐? 승옥=난을 그리는걸 친다고 하는거지. 그리는거하고 치는거하고 결국 같은 말 아냐? 지하=며칠전에 수업시간에 쫓겨났어. 교수님이 난을 치라하길래 한번에 쭉쭉 그렸더니 공을 들이라고 하는거야. 다음번에 천천히 그렸더니 이번엔 그리지말고 치라는거야. 승옥=…. 지하=소설을 계속 쓸거냐 승옥=써볼까 그래. 지하=…. 승옥=왜? 지하=나는 시같은걸 써보고싶은데. 승옥=쓰지뭐. 지하=토하듯 쓸 수 있는건 시뿐이잖아. 난을 치듯이. 승옥=소설은 그리는거고. 지하=술은 퍼마시는거고. 승옥=청춘은 토해내는거고. 욱일승천하던 청년 소설가가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의 구속에 이어 정권의 압력을 느끼면서 술에 빠져가는 과정을 잘 그려낸 이가 한국의 ‘3대 구라’라는 황석영 입니다. 그는 신문 연재로 인기를 끌던 ‘장길산’이 인기를 끌 무렵 김승옥과 만났습니다. “한국일보에서 자료비를 받은 무렵이다. ‘참새방앗간’이라고 청진동 한국문학사 사무실에 들르니 술에 주린 동료 문인들이 눈알을 부라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여관방에서 밤새워 마시고 새벽주점을 찾아 마시고 며칠을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폭음했다.” 당시 황석영은 우이동에,김승옥은 수유리 부근 언덕의 신흥주택가에 살았는데 귀갓길이 같다는 핑계로 며칠동안 술자리를 떠도는‘짝패’가 되었다고 하지요.
     
    ▲ (左)김승옥이 시나리오를 쓴 영화 '겨울여자'이 포스터다.▲ (右) 김승옥이 최인호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어제 내린 비'의 포스터다

    “하루 이틀 사흘이 넘어가면서 그는(김승옥) 점점 더 불안해졌고 헤어지거나 귀가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중에 1980년도에 김성동이보다 노골적으로 먼저 달아나려는 내 팔을 붙들고 ‘나를 두고가면 워쪄?’하며 땅바닥에 주저앉아 헹가레를 쳤는데….” 구라꾼답게 황석영은 김성동이 술마시다 도망치기 일쑤였음을 은근히 폭로하며 김승옥에 대해서는 ‘애비없는 새끼류’라면서도“나도 처지가 홀어미의 자식이었던 지라 그의 불안의 근원을 눈치채고 있었다”고 씁니다. 황석영은 김승옥보다 2살 아래였지요. 황석영은 이런 기록도 남겼습니다. “니나노집에 떼지어들어가면 그는(김승옥) 청승맞게 흘러간 유행가를 가사 삼절까지 불러젖혔다. 김지하의 탁성은 비장한데가 있고 이동순의 그것은 학구적인데 김승옥의 유행가는 남도식 애조(哀調)가 있었다.” 문단의 기린아 김승옥은 이렇게 방황하다 1974년부터 아예 영화계에서 삽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70년대 대표작 ‘영자의 전성시대’ ‘어제 내린 비’ ‘겨울여자’ ‘여자들만 사는 거리’ ‘도시로 간 처녀들’의 시나리오 작업 등을 한 것입니다. ‘ 영자의 전성시대’는 배우 염복순이,‘어제 내린 비’는 안인숙이.‘겨울여자’는 장미희가 주연을 맡은 영화입니다. 순천만 부근 김승옥 문학관에 가면 지금 50대 이상의 뇌리에 선연한 이들 영화의 포스터가 붙어있는데 꼭 한번 방문하시기를 바랍니다.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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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령이 달아준 김승옥 소설의 해괴한 제목
    는 1977년 소설 ‘서울의 달빛 0章’으로 문단에 복귀하는데 여기도 사연이 있습니다. 
    월간지 문학사상의 주간으로 있던 이어령이 장충단 공원 근처 파크호텔에 방 둘을 잡아놓은거지요. 
    한방에는 김승옥이 다른방에는 문학사상 직원을 상주시킨 겁니다. 
    그는 장편으로 구상하던‘서울의 달빛’프롤로그 격으로 150장을 써내고 ‘서장(序章)’이라는 뜻에서 ‘제0장’이라고 적어보냈는데 이어령이“김승옥한테 다음 제1장의 
    원고를 받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며 아예 그걸 제목으로 단겁니다.
    시인 김지하는 평생의 지기 김승옥의 소설에 대해 "김승옥은 그야말로 반짝이는 별이었다"고 격찬했다.

    이 해괴한 제목으로 인해 작가는 훗날까지 순진한 독자들로부터 많은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대학에서 문학강의를 하는 시인조차도 ‘서울의 달빛 0章’의 광포한 문체에 대해 비난 섞인 의문을 제기했다”며 “70년대의 도덕적 붕괴 참상을 언어로 포착 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문체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잘나가던 신진작가에서 친구 김지하의 구속과 그에 따른 절필,영화계 방황에 이어 다시 문단으로 돌아온 김승옥은 1980년 동아일보에 ‘먼지의 방’이라는 장편소 설을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광주사태 발발로 몇 회 되지않아 스스로 연재를 중단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81년 그는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지요. “하나님에 의해 내 영안(靈眼)이 열리고 하나님의 크고 하얀 손을 보게되고 그 손에 의해서 어루만짐을 받게되고 ‘누구냐’는 내 질문에 ‘하나님이다’라는 음성의 대답을 듣게되었다.” 김승옥은 1982년에는“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인도에 가서 전도하라”는 음성을 들었고 1983년에는 하얀 내리닫이 옷을 입은 하얀 몸,하얀 머리칼,하얀 수염,하얀 피부의 얼굴을 눈으로 보는 신비를 연속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김승옥은 실제로 인도로 전도여행을 떠나 전도사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희한하게도 황석영은 그때의 김승옥에 대해서도 기록을 해놓았습니다. “1980년대의 어느날이었을까 그와 우연히 만났고 반가워서 맥주라도 한잔 하자고했더니 그는 대단히 가볍게 ‘아, 나 술 끊었어’라며 건전하게 녹차를 한잔씩 나누고 말았다.”
    무진교 반대편은 순천만으로 나가는 뱃길이다. 예전에 이곳에 무진나루가 있었다

    김승옥은 이런 영적 체험을 한 뒤 자신이 미처 끝내지 못했던 소설을 완성시키려했던 모양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감수성 예민한 청년에서 이미 육십을 바라보는,흘러간 세월에 대해 한계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은 그의 회고입니다. “내가 못 끝낸 작품들에 대해 더 이상의 완성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첫째 이 작품들을 쓰던 이십구년전의 나는 스물여섯의 미혼청년이었다. 한국의 모든 지역의 문제점도,그리고 나도 이젠 변해버린 것이다. 굳이 쓴다면 1990년의 ‘내가 훔친 여름’을 써야하겠지만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의 사내가 훔치는 여름이란 상상조차 되지않는 괴기소설이다. 재기발랄할 젊은 작가에게 물려줘 쓰게 하고 싶다는 충동이 문득 든다. 1990년대에도 젊은이들은 호기심과 무력감에 찢기며 찾아다니고 부르짖고 울고 깊이 깊이 생각할 것이기에.”
    새벽 무진교의 풍경이다. 임자잃은 배들이 정박해있고 수면은 호수처럼 고요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뇌졸중이 그의 손목을 잡지요. 역시 당시 상황에 대해서도 황석영의 기록이 남아있으니 김승옥과 김지하의 관계 못지않게 김승옥과 황석영의 관계도 참으로 기이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세월이 흐르고 흘러 2004년엔가 인사동 어느 갤러리 카페에 앉아있는데 그 집은 거리쪽으로 커다란 통창이 벽 대신 틔어있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유리창 앞에 바짝 다가와 두손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김승옥이었다. 내가 거리로 나가보니 그는 한쪽 다리를 절었고 실어증에 걸려 있었다. 곁에 부축하고 있던 부인이 뇌졸중으로 쓰려졌었다고 말했다. 나는 할말을 잃고 그의 두손을 잡고 눈물이 글썽해서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이런 지식을 배경으로 여러분과 함께 순천으로 향해봅니다. 제가 순천에 처음 가봤던 것은 1986년 지금의 신문사가 아닌 여천공단에 있는 한 기업체 직원이었을 때였습니다. 순천의 조계산 송광사에 갔는데 당시 그곳에는 법정스님이 머물고 있었지요. 30년만에 다시 가본 순천은 낯선 도시였습니다. 처음에는 강진쪽에서,두번째는 화순쪽에서 접근했는데 과연 안개의 도시답게 새벽 안개가 지독하게 자욱했습니다.
    순천만에는 겨울에도 갈대가 한창이다. 쓸쓸한 갈대밭을 거니노라면 무진기행의 한 장면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겨울 새벽의 순천만은 안개와 갈대와 새들이 주인이었습니다. 인적 드문 순천만 대대포 포구에는 주인없는 배들이 정박해있고 바람의 흐름에 따라 갈대가 춤추고 그 위로 이름 모를 철새들이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습니다. 갈대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갑니다. 그 끝에는 ‘용산(龍山)’이라는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새벽 실루엣으로만 보자면 마치 용이 바다를 만나 멈춘 것 같은 형상입니다. 그 위로 올라가는 길이 가파르기는 하지만 순천만 일대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어 반드시 가봐야할 코스입니다. 두번째 갔을 때는 순천만 대대포 포구,즉 예전에 무진나루로 불렸던 곳에 있는 무진교를 기점으로 반대쪽으로 향했습니다. 순천시에서 만들어놓은 두채의 한옥이 있는데 한곳은 김승옥 문학관,다른 한곳은 ‘오세암’의 작가 정채봉의 문학관입니다. 김승옥 문학관에서 제 눈을 끈 것 가운데 하나는 시인 김지하가 김승옥에게 보낸 편지와 편지봉투였습니다. 첫 문장이 ‘승옥아, 사랑하는 승옥아!’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시인 김지하가 김승옥에게 보낸 편지의 원문이다.

    마침 설날이어서 거의 관람객이 없는 그곳을 마음껏 눈에 넣은 뒤 다시 대대포구로 와서 30분 코스인 순천만 일주에 나섭니다. 밀물 때여서 빠르게 밀려드는 물살을 헤치고 순천만에 들어서니 멀리로 솔섬이 보입니다. 삼척에 있는 솔섬과 비슷한 형상이지요. 김승옥 선생은 서울에 살지만 가끔 순천에 있는 자기 이름을 딴 문학관에 들른다고 합니다. 며칠 머무르다 훌쩍 서울로 돌아간 뒤 얼마 지나지않아 다시 순천으로 내려오는 반복이 마치 ‘무진기행’의 한구절 같기만 합니다.
    순천만에 떠있는 솔섬. 강원도 삼척의 솔섬과 흡사하게 생겼다.

    “내가 나이가 좀 든 뒤로 무진에 간 것은 몇차례 되지않았지만 그 몇차례 되지않은 무진행이 그러나 그때마다 내게는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해야할 때거나 하여튼 무언가 새출발이 필요할 때였다.” 칠십의 작가는 아마 새출발을 모색하는 것 같았습니다.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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