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41 견훤과 혜명대사와 은진미륵

浮萍草 2016. 2. 27. 23:03
    견훤이 지렁이 기운을 타고 났다는 설화
    경상도 출신 견훤이 광주 호족들의 강력한 지지 받은 비결문갑식 남 논산을 지날 때면 ‘신병훈련소’가 생각납니다. 수없이 그 부근 고속도로를 지날 때마다 훈련소 근처 ‘견훤왕릉’이라는 표지판을 보기만 하다 마침내 들렀습니다. 행정 주소는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인데 현장을 본 뒤 처량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충남 기념물 제26호인 견훤왕릉 주변에는 아무 시설도 없습니다.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가보면 지름 17.8m, 둘레 70m, 높이 4.5m의 봉분 앞에 ‘後百濟王甄萱陵(후백제 견훤왕릉)’이라는 묘석만 서있습니다. 1970년 견씨 문중에서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이 무덤이 진짜 견훤왕릉인지가 궁금한데 기록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견훤은 걱정을 심하게 하다가 등창이 나 수일 후 황산의 한 절에서 죽었다”는 거지요. 견훤은 자신의 사후, 무덤을 전주 완산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자신이 일으킨 후백제를 자신의 손으로 망하게 만든 회한 때문이었겠지요. 고려왕조는 견훤의 소원에 따라 완주군과 김제시 사이에 있는 모악산(해발 793m)이 보이는 이곳에 견훤을 묻었다고 하는데 이 무덤에는 전할 ‘전(傳)자’가 붙어 있습니다. 이곳이 견훤의 무덤같긴한데 정확한 고증은 없다는 뜻이지요. 1454년 간행된‘세종실록지리지’은진현조에 따르면 “견훤의 묘는 은진현의 남쪽 12리 떨어진 풍계촌에 있는데 속칭 왕묘라고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게 지금 우리가 보는 견훤왕릉입니다.
    견훤왕릉에서 보면 전주와 완산쪽이 보인다. 날씨가 좋으면 모악산도 보인다고 한다.

    그렇다면 견훤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합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甄萱·867~936)은 경북 상주 가은현,지금의 경북 문경시 가은읍에서 867년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꾼이었는데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장군을 칭했다고 합니다. 견훤이 원래 이씨(李氏)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견훤과 관련된 설화가 등장합니다. 견훤이 아기였을 때 어머니가 농사짓는 아자개에게 밥을 갖다주려고 견훤을 나무 아래 뒀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젖을 먹이곤 했다는 것입니다. 이 비슷한 내용이 제왕운기(帝王韻紀)에도 등장합니다. “새가 와서 견훤을 덮어주고 범이 와서 젖을 먹였다”는 것입니다. 경북 문경 가은읍에도“견훤이 태어났을 때 온갖 날짐승이 날아와 몇 년에 걸쳐 아이를 보호해줘 사람들이 아이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짐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견훤왕릉이다. 견훤은 왕건-궁예 못지않게 미륵신앙의 신봉자였다

    후백제왕 견훤릉이라는 비석은 견씨 문중에서 세운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전남 광주 북촌(北村)의 어느 부잣집에 딸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밤만 되면 딸과 동침하고 새벽이면 사라졌다는거지요. 딸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딸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그 남자가 다시 오거든 옷에 몰래 실을 꿴 바늘을 꽂아두거라!” 다음날 아버지가 딸과 함께 실을 따라가보니 북쪽 담장 밑에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는 겁니다. 즉 남자의 정체가 지렁이였는데 이후 임신한 딸이 낳은 아들이 견훤이라는 거지요. 한마디로 견훤이 지렁이의 정기를 타고났다는 것입니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 아차마을에는 견훤을 지렁이의 자식이라고 본 삼국유사의 설화와 연관이 있는 ‘금하굴(金霞窟)’이란 동굴이 있습니다. 장성한 견훤은 이후 군인이 됐는데 역시 삼국사기는 “견훤은 늘 창을 베개삼아 적을 기다렸다”고 기록하고있습니다. 성실함을 인정받은 견훤은 비장(裨將)이 된 뒤 세력을 키워 892년,즉 진성여왕 6년에 후백제를 건국합니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거병한지 열흘만에 5000여명의 군사를 모았다고 하니 군에서 그의 인기가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견훤은 무진주, 즉 지금의 광주를 점령한 뒤 스스로를 신라 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겸 절도 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겸 상주국 겸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 (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 (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는 긴 벼슬로 칭했습니다. 그의 후백제는 순식간에 강성해져 건국한지 3년만에 중국 강남의 오월(吳越)가 외교관계를 맺을 정도가 됐습니다. 이것은 견훤의 군사적 능력이 탁월했다는 뜻인데 제가 주목한 부분은 견훤과 미륵신앙의 관계 입니다. 즉 그의 통치철학에 대한 것이지요. 우리는 고려 태조 왕건이 불교를 숭상했고 태봉의 왕이 된 궁예가 미륵신앙에 탐닉한 것은 잘 알지만 견훤과 불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 못 합니다. 그런데 논산과 익산 일대를 취재한 후 견훤도 불교에 의존했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었습니다.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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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훤이 불교에 관심을 가진 이유
    자들에 따르면 견훤이 불교 가운데서도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제가 앞서 기인이사 39편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와 미륵의 꿈’ 기인이사 40편 ‘도선국사와 
    장길산과 운주사’편에서 다룬 미륵신앙이었습니다. 
    어쩌다보니 ‘미륵 3부작’이 된 느낌입니다. 
    학자들은 경상도 출신인 견훤이 광주 일대의 호족(豪族)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은 것을 주목하고있습니다. 
    당시 광주 일대에 유행한 것은 완산에서 태어난 진표(眞表)율사의 미륵사상입니다. 
    여기서 진표스님에 대해 잠시 알아보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화순 운주사의 미륵와불이다. 미륵은 주로 권력에서 소외됐던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에서 발견됐다.

    생몰연도가 미상(未詳)인 진표는 신라 중기에 태어났는데 열한살 때 개구리를 보고 참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요. 개구리를 잡아 버드나무 가지에 꿰어 물 속에 넣어뒀는데 다음해 봄까지 살아있었다는 겁니다. 무분별한 살생을 반성했다는 것입니다. 12살 때 김제 금산사(金山寺)로 출가한 진표율사는 평생 그곳을 근거지로 포교했으며 절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앉아 입적했다고 합니다. 금산사는 진표의 미륵신앙 근거지가 됐으며 그가 입적한 후엔 속리산,강릉,대구 동화사로 그의 미륵신앙이 퍼졌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훗날 견훤이 자식들에 의해 유폐된 곳이 금산사였다는 사실입니다. 학자들은 이로 미루어 금산사가 후백제왕 견훤의 왕실(王室)사찰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견훤은 금산사 중창 때 많은 시주를 했습니다.
    화순 운주사의 미륵와불은 머리부분이 낮고 발쪽이 높다. 이것은 서민들을 상징한다고 한다.

    견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있는 또다른 사찰이 바로 제가 앞서 다룬 바 있는 전북 익산의 미륵사입니다. 견훤은 후백제의 수도를 서기 900년 광주에서 전주로 옮겼는데 922년 익산 미륵사에 탑을 세우지요. 익산의 미륵사지는 백제의 무왕과도 관련돼습니다.
    전북 익산 미륵사지다. 견훤은 광주에서 익산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미륵사를 중심으로 민심을 달래고 왕권을 강화하려했다.

    즉 견훤은 광주에서 전주로 수도를 옮기며 미륵사에 정성을 다하면서 자신이 명실상부한 백제의 후예임을 과시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여기서 다시한번 견훤과 무왕이 연결되니 역사는 알면 알수록 오묘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견훤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의 묘가 충남 논산에 있는 것도 가볍게 지나칠 수 없습니다. 논산에서 유명한 것이 두가지 있는데 하나는 제가 앞서 말한 ‘신병훈련소’이고 또하나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미륵불인 관촉사(灌燭寺) 은진미륵이지요. 관촉사 은진미륵은 보물 제218호로 고려 광종 19년인 서기 968년에 승려 혜명(慧明)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높이가 18.12m나 되는 관촉사 은진미륵은 몸에 비해 머리가 너무 큰 가분수 형태입니다. 이 때문에 안정감이 부족하다는 평이 많지요. 두손은 생동감이 엿보이는데 비해 얼굴이나 동체는 밋밋한 반면 머리 위에 씌워놓은 원통형 보관은 너무 높아 기이한 느낌마저 줍니다. 그래서 이 미륵을 괴석(怪石)같다고도 합니다. 왜 광종은 머나먼 논산 땅에 이토록 커다란 미륵불을 세운 것일까요?
    견훤왕릉에서 가까운 관촉사 은진미륵은 국내 최대의 크기를 자랑한다.

    전남 화순 대리 미륵불은 뒤에서보면 커다란 돌같지만
    앞에서 보면 잘 생긴 미륵이 나타난다.
    학자들은 이것이 견훤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해석합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비록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견훤이 망명한 후 그를‘상부’로 대접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적이었던 그의 무덤을 자신들의 수도인 개경 근처에 세우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 입니다. 그런데 견훤이 모악산이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고 하자 한편으로는 환영하면서도 한편에서는 견훤에게 향수를 지닌 후백제 잔존세력이 뭉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뭔가 지역민심을 어루만지면서도 고려 왕조의 강력한 힘을 과시할 상징물이 필요했겠지요. 학자들은 그것이 거대한 은진미륵을 만든 이유라고 보고있습니다. 더구나 은진미륵을 세운 광종은 고려의 왕 가운데도 가장 개혁적이고 강력했습니다. 그는 956년 노비안검법을 실시해 노비를 풀어줬는데 이것은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조치 였습니다. 광종이 958년 과거제도를 실시한 것 역시 명분은 천하의 인재를 얻기위한 것이라지만 내심 귀족세력 약화에 목적이 있었지요. 실제로 광종은 과거제 실시 이후 준홍(俊弘)과 왕동(王同) 같은 귀족들을 모반 혐의로 숙청한 것을 시발점으로 호족의 힘을 꺾는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오죽했으면 당시 “(준홍과 왕동의 숙청 이후)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뜻을 얻어 어질고 충성스런 사람을 모함하니 종이 그 상전을 고소하고 자식이 그 아비를 참소하매 감옥이 항상 가득 차 있었으므로 임시 감옥을 설치하였으며 죄 없이 죽임을 당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는 말까지 나왔겠습니까.
    전남 화순 이용대 체육관 근처에 있는 대리 미륵불이다. 웃는듯한 모습이 보면 볼수록 정겹다.

    조선시대 세조가 조카 단종을 죽인 뒤 불교에 심취했던 것처럼 광종 역시 호족들을 대거 죽인 뒤 여러 곳에 절을 짓고 방생소를 설치하는가하면 혜거(惠居·?~974)를 국사(國師),탄문(坦文·900~975)을 왕사(王師)로 삼았습니다. 사람을 많이 죽인 죄를 부처님의 힘을 빌어 씻고자했던 것입니다. 관촉사 은진미륵 역시 이 같은 상황의 연장이었다고 보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갑니다.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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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랑캐가 압록강을 건널 때 은진미륵이 홀연히 나타나
    진미륵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져내려오고 있습니다. 
    절 아래 한 노파가 쑥을 캐러 갔는데 갑자기 땅속에서 바위가 솟는 것을 본 것입니다. 
    노파는 이 일을 사위에게 전하고 사위는 관청에 고했으며 관청은 조정에 보고했지요. 
    보고를 받은 광종이 “돌로 미륵불을 지으라”고 했는데 조성 책임자가 혜명(慧明)대사였습니다. 
    혜명이 인부 100명과 함께 공사를 끝내는데는 38년이 걸렸지요.
    은진미륵은 고려 광종이 고려왕조의 위엄을 옛 후백제 땅 주민들에게 과시하기위해 세웠다는 설이 있다.

    서산마애삼존불이다. 서산일대는 옛 백제와 후백제
    신앙의 중심지였다.
    혜명은 미륵불은 머리와 신체로 나눠 따로 조각해 붙이려했는데 두 부위가 너무 무거워 세울 수가 없었다 고 하지요. 고민을 하던 차에 마을 앞 시냇가를 걷는데 두 어린이가 탑 쌓기 놀이를 하는 것을 보게됐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혜명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두 아이는 하나의 돌을 놓고 주변에 흙과 모래를 채운 뒤 또 다른 돌을 굴려 두 돌을 포갰습니다. 혜명대사가 그걸 보고 기뻐 손뼉을 치는 순간 아이들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혜명은 그 아이들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현신이었다고 믿었지요. 은진미륵에 대한 설화는 그것뿐이 아닙니다. 고려는 오랑캐의 침입을 많이 받았는데 오랑캐를 물리친 것이 은진미륵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오랑캐들이 압록강을 건널 때 물의 깊이를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스님이 나타났습니다. 스님이 강으로 걸어들어가는 모습을 본 오랑캐 장수는 스님을 따라 강을 건너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곳만 유독 물이 깊고 물살이 거세 뒤따르던 수많은 병사들이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화난 장수는 스님을 붙잡아오도록 했습니다.
    장수의 명을 받고 오랑캐 병사가 칼로 스님을 내려치는 순간‘쩡’하는 쇳소리가 울려퍼지면서 스님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알고보니 그 스님이 바로 관촉사 은진미륵이었다는 겁니다. 불교의 호국(護國)사상을 바탕으로 한 설화라고 보여지지요. 견훤왕릉과 전북 익산을 둘러보신다면 충남 서산까지 가볼 것을 권합니다. 충남 가야산은 제가 기인이사 36편‘사도와 남연군과 흥선군과 육관도사’편에도 등장한 산입니다. 천하명당이 숨어있다고 해서 풍수가들의 발길이 지금도 이어지는 곳이지요. 이 가야산 자락에서 서산시 운산면 용현계곡까지는 승용차로 약 30분이 걸립니다. 그 골짜기로 올라서면 저 유명한‘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마애여래삼존상(磨崖如來三尊像)을 볼 수 있습니다. 마애여래삼존상은 국보 제84호입니다.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삼존상은 가운데의 소탈한 본존불상과, 좌우의 반가사유상과 보살입상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기존의 삼존불상과 달리 소탈한 미소가 인상적이며 모든 구속으로부터 초탈한 여유를 느끼게 해주는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입니다.
    서산마애삼존불을 살피는 소녀도 미륵의 꿈을 꾸고있을까.

    ‘백제의 미소’라는 말은 고 김원용박사가 쓴 책 ‘한국미의 탐구’에서 처음 사용됐는데 한번 본 사람들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정확한 표현입니다. 서산마애삼존불을 중심으로 ‘백제의 미소 길’까지 만들어져 한번쯤은 답사해볼만 합니다. 새벽, 아침, 한낮, 황혼무렵에 햇빛의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서산마애삼존불의 존재를 우리가 안 것은 불과 50여년전이라고 합니다. 1959년 홍사준 국립부여박물관장의 지시로 답사팀이 현장에 갔는데 원래 서산은 백암사(白菴寺)가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불상은커녕 탑도 발견하지 못한 답사팀이 무심코 지나가던 나무꾼에게“혹시 불상이 근처에 있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나무꾼은 이렇게 답했다고 하지요.
    서산마애삼존불을 모시는 자그마한 절이다. 마애삼존불이 발견된 것은 1959년의 일이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쪽 바위로 가면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분 있는디유. 양옆에 본마누라와 작은마누라도 있지유. 근데 작은마누라가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마누라가 장돌을 쥐어박을라고 벼르고 있구만유. 근데 이 산신령 양반이 가운데 서 계심시러 본마누라가 돌을 던지지도 못하고 있지유.” 답사팀은 ‘산신령과 두 마누라’의 현장을 찾아봤습니다. 이렇게 발견된 것이 마애삼존불상입니다.
    서산마애삼존불 근처에 있는 강댕이 미륵불이다. 강댕이란 이 지역이 지명이라고 한다.

    마애삼존불을 보고 내려오면 승용차로 3분 거리 도롯가에 또다른 미륵불이 서있습니다. 보원사지(瑞山普願寺址)로 통하는 길목의 ‘강댕이 미륵불’입니다. 강댕이라는 것은 예전 이곳의 지명이었다고 합니다. 강댕이 미륵불은 하나의 화강암을 이용해 조각했는데 높이 2.16 어깨 폭 65㎝,두께 25㎝의 크기입니다. 역사가들은 이 미륵불이 고려 후기에서 조선시대에 건축됐다고 보고 있습니다.
    서산 강댕이불은 이곳을 지나는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로써 39-40-41편에 이르는 기나긴 미륵탐방을 일단 접을까 합니다. 제가 이렇게 충청도와 전라도의 미륵에 갑자기 탐닉하게된 것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수소폭탄 실험 등에 온갖 뒤숭숭한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스스로 돌이켜봅니다. 아마 옛 우리 선조들도 세상이 혼탁할 때면 세상을 구해주러온다는 미륵을 기다렸겠지요. 바라건대 빨리 나라가 안정을 되찾길 전국의 우리 산하(山河)를 버티고 있는 미륵불들에게 빌어봅니다.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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