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44 남사고와 격암유록과 십승지

浮萍草 2016. 4. 2. 13:20
    전쟁-기근-괴질을 피할 수 있는 10곳 십승지(十勝地)
    공지능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인간 바둑 최고수와 자웅을 겨루는 시대지만 세상은 여전히 불가사의합니다. 
    최첨단 시대에도 사람들을 사로잡는 고서(古書)가 많은데 한국인들에게는 그게 정감록(鄭鑑錄)이 아닌가합니다. 
    이 예언서는 정체불명입니다. 
    저자도, 집필연도도 알 수 없으며 정본(正本)이 뭔지 어느게 이본(異本)인지도 안갯속을 걷는 것처럼 부정확합니다. 
    흔히 정감록의 저자로는 도선(道詵)국사 혹은 중국 촉(蜀)나라의 도인 정감(鄭鑑), 조선초 정도전(鄭道傳)이 꼽히지만 확증이 없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촉의 도인 정감이 완산백의 둘째아들 이심(李沁),셋째아들 이연(李淵)과 함께 조선 산하를 둘러본 뒤 조선의 국운과 미래를 예언하고 
    문답을 나눈 것을 기록한 것이 정감록이라고 하지요. 이때의 조선은 고조선을 말하는 듯 합니다.
    정감록은 감결,삼한산림비기,화악노정기,구궁변수법,동국역대본궁음양결,무학비결,도선비결,남사고비결,징비기,토정가장비결,경주이선생가장결,삼도봉시, 
    옥룡자기 등이 망라된 것입니다. 
    이 이름들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도선비결이나 옥룡자비결은 도선국사를 말함이요, 
    둘째 무학비결은 무학대사를 지칭하는 것이요, 
    셋째 삼도봉은 정도전의 호 삼봉에서 온 것이 아닌가 여겨지며, 
    넷째 남사고비결은 격암 남사고를 말하고, 
    다섯째 토정은 이지함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격암 남사고 선생의 생가터다. 오른쪽에 보이는 한옥이 생가다.

    이로 미뤄보면 우리가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로서 정감록에 수록된 비결을 쓴 이는 도선, 무학,정도전,남사고,이지함으로,이들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기인이사 (奇人異士)라는 거지요. 또 한가지, 이 책은 쓰여진 시기에 대해서도 대체로 추정이 가능합니다. 전문가들은 정감록이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완성됐다고 봅니다. 정감록에 등장하는 지명(地名)이 조선 중기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성혁명을 예언한 정감록은 세조-성종 때 분서목(焚書目), 즉 불태운 책 명단에 나와야하는데 정감록은 등재돼있지않습니다.
    남사고 선생의 생가터를 발굴해 새로 지어놓은 한옥이다.

    그렇다면 정감록의 예언은 뭘까요. 잘 아시다시피 앞으로 들어설 왕조에 대한 것이지요. 정감록에서 정감과 완산백의 아들들이 나눈 대화는“곤륜산으로부터 맥이 백두산에 이르고 원기가 평양에 이르렀지만 1000년 운이 지나갔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평양을 기반으로 한 고조선-고구려를 말하는 듯 합니다. 또 “운이 송악(松岳·개성)에 옮겨가 500년 도읍이 되나 요승과 궁녀가 장난하여 땅의 기운이 쇠하고 하늘의 운수가 막혀 운이 한양으로 옮겨갈 것”이라 예언하는데 관심을 끄는 것은 그 이후입니다. “백두산의 맥이 금강산~태백산~소백산에 이르러 계룡산으로 들어갔으니 정씨의 800년 도읍지요, 뒤에 가야산에 들어갔으니 조씨의 1000년 도읍지다. 전주는 범씨의 600년 도읍지이고, 다시 송악은 왕씨가 부흥할 땅이나 그 뒤는 상고할 수 없다”는 거지요. 이래서인지 조선 선조 때 정여립(鄭汝立)의 난 이후 ‘정씨’만 등장하면 사람들은 정감록을 떠올리지요. 한때 정주영(鄭周永) 고 현대그룹 창업주나 그의 아들인 정몽준(鄭夢準) 전 의원이 대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도 비슷한 현상이 여지없이 나타났습니다.
    풍기 금계리 옆은 무릉리다. 무릉도원과 한자가 똑같다.

    그런데 정감록이 재미있는 것은 왕조 예언뿐 아니라 사람들이 삼재(三災), 즉 전쟁이나 기근이나 괴질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十勝地)를 거론했다는 것입니다. 십승지는 몇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같이 북쪽은 없고 남쪽에 위치해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사람의 씨를 구하려면 양백지간(兩白之間)이어야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사이를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정감록에 수록된 ‘도선비기’에 다음과 같은 무시무시한 말도 등장합니다. “정축년에 평안도와 함경도는 오랑캐의 땅이 되고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일 것이다.” 그러면서 “곡식 종자를 구하려면 삼풍지간(三豊之間)이어야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풍기-무풍-연풍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정감록엔 두리뭉실한 표현이 많지요. 그런데 정감록에 등장한 여러 십승지가운데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이가 있습니다. 격암(格巖) 남사고(南師古·1509~1571) 선생입니다. 특이하게도 남사고 선생은 인류 최대의 예언가라는 프랑스의 노스트라다무스(1503~1566)와 생몰연대가 매우 비슷합니다.
    남사고 선생이 태어난 울진은 지금도 오지다.구주령 위에서 보면 태백산맥의 실루엣이 겹겹이 보인다.

    그렇다면 남사고 선생이 말한 십승지는 어디일까요. 첫째 경북 영주 풍기의 소백산 아래 금계촌이다. 둘째 경북 봉화 화산 소령의 소라국 옛터로 태백산 아래 춘양면에 있다. 셋째 경북 예천 금당동 북쪽 금당실마을이다. 넷째 경남 합천 가야산 아래 만수동 주위 이백리다. 다섯째 충북 보은 속리산 중항 근처다. 여섯째 충남 공주시 유구-마곡 두 물길사이 백리다. 일곱째 전남 남원 운봉 두류산(지리산) 아래 동점촌 백리안이다. 여덟째 전북 무주 무풍 북쪽 덕유산 근처다. 아홉째 전북 부안 호암아래 변산의 동쪽이다. 열째 강원도 영월 정동쪽 상류다. 이것을 보면 경북이 세곳, 전북이 두곳, 경남-충북-충남-전남-강원도가 각각 한곳이며 각각 태백산-소백산-속리산-지리산-변산-태화산이라는 명산을 끼고 있습니다. 또한 놀랍게도 남사고 선생이 꼽은 십승지는 지금도 여전히 개발되지 않은 채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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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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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학도인을 만나 비서(秘書)를 넘겨 받은 남사고
    암 남사고 선생의 고향은 경북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입니다. 
    증조부 남호 선생은 울릉도를 토벌할 때 공을 세운 무장이었으나 할아버지 남구주(南九疇)는 정4품 의정부 사인(舍人),아버지 남희백(南希伯)은 이조좌랑을 지낸 
    문인 가정이었습니다. 
    남사고 선생의 호 격암에서의 ‘격’은 대학(大學)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격자를 따온 것입니다. 
    어렸을 적 그의 집안이 가난해 서당이나 서원을 다니지 못하고 선생님없이 오로지 독학으로 책을 읽고 오묘한 학문의 경지를 터득했다고 합니다.
    남사고 선생을 기려 만든 자동서원의 현판이다.

    장성하여 주천대와 남수산 기슭에서 초가를 짓고 살았지만 남세영-주경안-주세창-황응청-황여일-기자헌-양사언 등 명사와 교분을 쌓았습니다. 그렇지만 과거시험에 여러 번 응시하고도 실패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자 천거를 통한 등용을 꾀했습니다. 대표적인게 강원도관찰사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거기 ‘연래치소 문전지(年來恥掃 門前地-요즘은 문 앞을 쓸기가 부끄럽기도 하거니와) 항리하무 걸화인(巷里何無 乞火人-내 심정 헤아려 주는 사람도 어찌 이다지도 없습니까)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걸화인이라는 말은 중국 고사에 나오는 ‘걸화녀(乞火女)’를 빗댄 것입니다. 옛날에 한 시어머니가 부엌에 걸어둔 고기가 없어지자 며느리가 훔쳐 먹었다고 의심해 쫒아냈지요. 며느리는 길을 가다 아는 이에게 하소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시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젯밤 우리집 개가 고기를 물고오자 서로 먹으려고 싸워 두 마리 모두 죽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나서야 시어머니는 며느리에 대한 오해를 풀고 며느리를 도로 집안으로 불러들였다는 것입니다.
    남사고 선생의 생가터에 있는 돌비석이다.

    하소연이 통했는지 선생은 55세 때인 명종대에 9품 사직참봉을 시작으로 선조 때 관상감의 천문교수(6품)에 임명됐습니다. 그는 평소 역학을 연구했는지 천문교수로 일할 때 완역도(玩易圖)같은 천체의 도식을 직접 그려 벽에 붙여놓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울진 주변에서는 남사고 선생이 득도한 과정에 대해 여러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중 몇가지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날 남사고 선생이 울진의 명승인 불영계곡의 불영사(佛影寺)로 가는 중에 스님 한분과 동행하게 됐습니다. 스님은 돌연 “장기를 둘 줄 알거든 나와 내기를 하자”고 했습니다. 두사람이 나무 그늘 아래에서 한참 장기를 두는데 갑자기 기합소리와 함께 스님이 사라졌습니다. 한참 있자니 없어졌던 스님이 땅속에서 서서히 고개를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남사고가 태연히 앉아있자 오히려 스님이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선생이 “무엇이 무섭느냐”고 되묻자 스님은 “내가 많은 사람을 시험해 보았지만 모두 놀라 기절하였는데 너만 이렇게 대담하였다”고 말했다고 하지요.
    남사고 선생의 자동서원 안에서 밖을 바라본 장면이다.

    그의 수제자인 남세영(南世英)의 기록에 의하면 “나(남세영)의 어머님이 선생과 인척인 관계로 가끔 나의 편에 안부를 전하면 반드시 절하고 받으며 혹시 무슨 일을 나의 편으로 묻기라도 하면 꼭 엎드려서 아뢰었다”고 적었습니다. 그만큼 존경했다는거지요. 또다른 설화에는 남사고가 젊었을 때 풍악산(楓岳山·금강산)에 놀러갔다가 신승(神僧)을 만나 석실(石室)로 인도되어 세권의 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승이 바로 정희량(鄭希良)이며 세권의 책이 비서(秘書)라고 여겼습니다. 정희량(1469~?)은 연산군에게 경연에 충실히 임하라고 간했다가 미움을 받은 인물로 갑자사화가 일어날 것을 예언하고 음양학에 밝은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는 어머니의 묘를 지키다 홀연히 사라져 당대 사람들에겐 미스터리한 인물로 기억되고있었습니다
    남사고 선생의 자동서원 바로 옆에 있는 사당이다.

    심지어 중종 시절 송도(松都) 출신의 도인(道人) 전우치(田禹治)와 얽힌 전설도 전해집니다. 대사성을 지내던 낙봉 신광한이 전우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기묘사화 당시 자신이 조광조파로 몰려 삼척부사로 좌천됐을 때를 회상하지요. 신광한이 울진 불영사를 관람하고 잠시 풍광좋은 주천대(酒泉臺)에서 땀을 식히고 있을 때 지나가던 준수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가 바로 남사고였는데 남사고가 앞날을 걱정하는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더라는거지요. ‘이구후사장(二九後師長)!’ 이것은 18년 후 신광한이 대사성으로 중용될 것을 예언했다는 겁니다. 이야기를 듣던 전우치는 빙그레 웃으며 남사고가 소년이었을 때 만난 적이 있다며 그가 천자의 주성(主星)인 자미성의 기운을 받은 기재(奇才)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화담(花潭·서경덕·1489~1546)이나 북창선생(정렴·1509~1546)과 비교해달라고하자 전우치는 “화담은 현인이며 북창선생은 이인(異人)이요 남사고는 도인이 될 그릇”이라 한 뒤 “속명만 버리면 신선이 될 재목”이라고 합니다.
    아홉개의 구슬이 있다는 구주령 정상에서 본 태백산맥이다.

    그런가하면 남사고가 열다섯살 때 불영계곡에서 높은 바위절벽 위에 앉아있는 운학도인(雲鶴道人)을 만났는데 운학도인이 그를 보고 “삼원명경(三元明鏡)의 점괘대로 과연 동방의 기재가 여기 있었구나”라고 감탄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남사고는 운학도인에게서 낡은 두권의 책을 받았는데 그것이 바로 복서(卜筮·점괘)와 상법(相法·관상)에 관한 책과 천문과 역학을 기록한 비서였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주면서 운학도인은 다음과 같은 무서운 단서를 달았다고 합니다. “이 비서를 받기에 앞서 반드시 마음에 새겨둬야할 할 것이 있다. 책에 적혀있는 내용들은 모두 천기(天氣)에 관계된 내용들이어서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아무에게나 발설하게 되면 집안의 대가 끊기는 화를 입는데 그래도 비서를 받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남사고는 주저하다 비서를 받아 수년에 걸쳐 공부했습니다. 상법을 익혀 관상으로 사람들의 앞날을 점치고 복서를 터득해 길흉화복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풍수지리에 도통해 간룡(看龍) 장풍(藏風) 득수(得水) 정혈(定血)의 묘를 깨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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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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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승지에 직접 가보니…
    지만 남사고의 명운은 부친 남희백의 묘를 정할 때 다하고 맙니다. 
    그의 부친 묘는 근남면 수곡리 대현산 중턱에 있었는데 남사고는 부친을 명당에 모시기 위해 아홉번이나 이장했지만 끝내 실패했다는 구천십장(九遷十葬)의 
    전설이 그것입니다. 
    장사를 마치고 보니 묫자리가 아홉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놓고 다툰다는 구룡쟁주(九龍爭珠)의 명당이 아니라 아홉마리의 뱀이 개구리 한마리를 놓고 싸우는 
    구사쟁와(九蛇爭蛙)의 혈이었다는 겁니다. 
    남사고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지요. 
    이후 아홉번을 이장했지만 그래도 명당을 찾을 수 없었지만 열번을 이장(移葬)하면 횡액을 당한다는 풍수지리학의 가르침에 따라 명당찾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천기를 누설하면 대가 끊기리라는 운학도인의 예언이 적중했다고 봅니다.
    풍기 금계리에서 내려다본 광경이다.

    남사고의 최후 역시 운학도인과 연결됩니다. 그가 종 6품 관상감(觀象監) 천문학교수로 재직하던 어느날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역서를 읽다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니 운학도인이 문 밖에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반가워하는 남사고와 달리 운학도인은 “이제 시간이 다 됐으니 내가 줬던 비서 두권을 거두어가야겠다”며 “천기를 누설한 준비는 돼있느냐”고 힐난합니다. 놀라서 보니 남사고는 꿈을 꾸고있었던 것인데 도인이 준 비결 2권은 서고에서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다음날 관상감정(觀象監正)으로 있던 이번신(李蕃臣)이 “어젯밤 별자리를 살펴보니 태사성(太史星)이 어두워졌다”고 하자 남사고는 “그 별의 운명이 바로 내 명운”이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 남사고는 사표를 내고 한줄의 시를 남기고 낙향했습니다. ‘강물 남쪽에 경치가 좋은데 너무 늦기 전에 그곳에서 살아보리라(水南山色好 歸計莫樓遲).’과연 울진 남수산 자락으로 돌아온 남사고는 사표를 낸지 1년 후인 1571년 63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홉개의 구슬이 있다는 구주령 정상에서 본 태백산맥이다.

    세상을 떠난 후, 남사고에겐 액운이 찾아왔지요. 생전에 1년 넘게 남사고가 봐둔 묫자리를 파헤치는 땅속에서 물이 솟구치는 것이었습니다. 명당이라고 봐뒀던 장소가 풍수지리에서 제일 기피하는 수맥자리였던 겁니다. 남사고는 다른 자리에 묻혔고 그의 아들 대에서 남사고의 후손은 끊겼습니다. 남사고 선생이 유명해진 것은 그가 남긴 예언이 적중했기 때문입니다. 그 첫번째가 조선시대 최대의 사건이라할만한 선비들의 ‘동서 분당(分黨)’에 대한 것인데 이 이야기는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이라는 책에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1575년 선생이 이산해를 만났습니다. 남사고는 한양의 서쪽 안산(鞍山)과 동쪽 낙산(駱山)을 가리킨 뒤 말했지요. “조정에서 분당이 있을 것이요. 낙(駱)이란 각(各) 마(馬)로 끝에 가서 헤어지며 안(鞍)은 혁(革) 안(安)이라 개혁 후 편안해지지요.” 말대로 서인은 조선 말기까지 정권의 주류를 이뤘으며 동인은 훗날 대북-소북으로 찢어졌습니다. 남사고는 명종의 사망과 선조의 즉위도 예언했다고 합니다. 그는 남산에 올라 “왕기가 흩어져 사라지는구나. 사직동으로 옮겨지리라”라고 되뇌었습니다. 그의 예언처럼 명종은 후손없이 사망하고 16세된 하성군 균(鈞)이 보위를 이어받았는데 그의 집이 사직동에 있었습니다.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과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남사고가 임진왜란을 예고해 적중시켰다는 이야기가 실려 전해집니다. “임진년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에서 조선을 침범하리라!” 과연 그의 말대로 왜군의 선봉이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백마를 타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지금 시점에서보면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으나 그만큼 도력이 높다는 반증이겠습니다. 그렇다면 격암선생이 말한 십승지가운데 몇곳을 둘러보겠습니다. 맨먼저 그가 최고의 십승지로 꼽은 풍기 금계촌 입구에는 ‘정감록마을’이라는 돌비석이 서있습니다. 풍기는 제주도처럼 돌·바람·여자가 많은 ‘삼다(三多)의 고장’인데 놀라운 것은 거란-몽골의 외침과 임진왜란, 6·25때도 피해를 안봤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비율이 낮아졌지만 한때 주민의 70%가량이 이북출신이라는 점도 기이합니다. 이북사람들이 해방후 공산당의 횡포를 피해 월남할 때 정감록에 나오는 풍기를 찾아 대거 이주했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이때 이들이 들고온게 베틀과 인삼입니다. 베틀로 시작한게 지금 저 유명한 풍기 인견의 시발점이 됐고 인삼농사로 풍기인삼은 이름을 날리게된 것입니다. 금계촌에서면 뒤로는 소백산이 병풍처럼 막아서고 좌우로 야트막한 산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데 사과나무밭이 많은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북사람들이 십승지 마을을 찾아 몰려오면서 풍기는 인삼과 인견의 고장이 됐다.

    십승지마을 가운데 두번째로 꼽히는 봉화는 지금도 오지 중의 오지로 꼽힙니다. 그중에서도 춘양(春陽)마을 도심촌은 임진왜란 때 ‘징비록’의 저자인 서애 류성룡 선생의 형인 겸암 류운용 선생이 가솔을 이끌고 피난갔던 곳으로 지금도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겸암선생은 안동 하회마을에서 이곳으로 와 아무 피해도 받지않았다는데 교통수단이 발달한 지금도 안동에서 봉화 춘양마을까지 가는 것은 만만치않습니다. 저는 울진 취재를 가는 길에 춘양마을을 지나갔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오지였습니다. 세번째가 안동에서 가까운 예천 금당실마을입니다. 이 마을 북쪽에는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주민들을 위한 운동시설과 현대식 정자가 있습니다.
    경북 예천 금당실 마을도 십승지가운데 한곳이다.

    그 바로 아래에는 마을을 지킨다는 노거수가 아직도 웅장한 자태로 마을을 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보면 금당실마을은 분지형이며 산들이 마을을 빙 둘러싼 형상인데 특이하게도 2010년 이웃 안동에서 전국으로 번진 구제역 파동이 이곳에만은 미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경북 예천 금당실 마을을 뒷산에서 내려다본 장면이다.

    금당실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얽인 일화도 있습니다. 이여송이 마을 지형을 보고 깜짝 놀란 뒤 “(마을 뒷편) 오미봉(五美峰)의 산세를 보아하니 금당실에서 인재가 많이 날 모습이다. 장차 중국에 해를 끼칠 것이니 무쇠말뚝을 박아 산의 맥을 끊어라”라고 지시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금당실마을에서는 조선시대 대과에 급제한 사람만 15명이나 됐다고 하며 지금에도 법조계와 금융계에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고 합니다. 충북 보은 속리산은 누구나 한번쯤 가봤을 장소입니다. 이 산은 보은-괴산과 경북 상주의 경계에 있지요. 몇가지 설화만 소개하자면 속리산은 고려시대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안동으로 몽진왔던 공민왕이 개경으로 가던 중 넉달이나 머물렀으며 조선 중기 최고의 명장이라할 임경업장군이 경업대-입석대에서 무예를 익혔다는 전설도 서려있습니다. 공민왕이 머물렀다는 관기리는 사실 속리산과 거리가 있으며 주변에는 구병산(九屛山·해발 876m)이 북쪽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습니다.
    충북 구병산 자락 적암리 마을 한복판에 솟아있는 시루봉이다.

    관기리 옆에는 적암리가 있는데 이곳에 있는 촌로로부터 “여기는 옛날부터 피난지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북한의 미사일이 구병산에 막혀 이곳에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88서울올림픽 때 이곳에 국가기간방송망의 송신탑이 설치됐지요. 6·25가 났을 때는 이북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오기도 했고요. 지금은 다 떠나고 노인들만 남았지만요.” 특이한 것은 구병산을 끼고있는 마을 한가운데 시루봉이 서있는 것입니다. 마치 떡시루와 같은 형상인데 놀랍게도 이 주변에는 시루봉이라는 이름의 산만 최소 5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름만으로봐도 뭔가 범상치않은 지역임에 틀림없습니다.
    충북 구병산 자락 적암리 바로 옆 관기리는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고려 공민왕이 넉달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공주 마곡사가 있는 마곡과 유구는 제가 기인이사 23편 ‘백범 김구와 공주 마곡사’에서 다룬 바가 있습니다. 또한 변산 일대는 예로부터 도인들이 도를 닦는 터라는 명성이 자자했던 곳으로 조용헌씨가 아주 기가 세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장소입니다.
    충남 예산 마곡사 일대의 안내판이다. 골이 깊은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러고보니 십승지가운데 제가 가보지않은 곳은 강원도 영월 상류, 전북 남원 운봉, 경남 합천 가야산 만수동 정도입니다. 물론 영월과 남원과 합천 가야산을 지나치기는 했지만 정감록이나 남사고 선생이 꼭 집어 말한 곳을 취재해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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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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