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땅의 歷史

原州 神林과 中國에서 온 옻칠장이 김성권

浮萍草 2016. 3. 16. 21:43
    神이 사는 숲에 봄이 움튼다
    '옻칠' 찾아 중국에서 젊은 장인 정착한 원주 땅 신림면에서는 예로부터 신성시한 당숲이 봄을 맞아 골짜기마다 신념과 믿음 지키며 사는 사람들 자연이 좋아 귀농한 부부의 소박한 삶도
    원주 여행수첩
    중국에서 온 칠장(漆匠) 김성권
    젊은 옻칠 장인 김성권
    해 스물여덟 살인 김성권은 옻칠장이다. 칠예(漆藝) 장인이라고도 한다. 김성권은 중국에서 왔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和龍市) 팔가자진(八家子鎭)이 고향이다. 조선족보다 한족이 더 많이 살았다. 전주가 본관에 조상이 경상도에서 왔다는 사실만 알 뿐,나머지 가족사는 알지 못한다. 그가 말했다. “낳아주신 분도 부모지만 키워주신 분도 부모라고 생각한다.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나의 마음엔 항상 두 개의 조국이 있다고.” 아버지 김동철(金東哲‧54)는 기관사였다. 어머니 김화(金花‧52)는 공장 근로자였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있어서 김성권은 가구 만드는 대패며 끌이며 각종 목재가 그득한 집안에서 자랐다. 김성권이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는 아이를 친척에게 맡기고 러시아로 가 돈을 벌었다. 2년 뒤 돌아온 아버지는 한국으로 갔고 또 2년 뒤 어머니도 한국으로 갔다. 러시아行도 한국行도 목적은 하나였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위해 두 사람은 인생을 바쳤다. 용정(龍井)에서 고등학교를 마쳤을 때도 김성권은 그저 대학 진학만 꿈꿨다. 그런데 “중국에서 대학 나왔댔자 장래에 뭐 하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9년 3월 김성권은 한국 부산에 있는 영산대학교 실내환경디자인학과로 유학을 왔다. 4학년 1학기 옻칠 거장 전용복(全龍福)이 이 학과 석좌교수로 부임했다. 그때 난생 처음 접한 옻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졸업식을 남기고서 김성권이 전용복에게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 제자 시켜 주시라.” 세월이 3년 흘러 전용복이 말했다. “성권이는 1등이다.” 거장(巨匠)이 인정하는 젊은 칠장이가 있는 곳은 대한민국 강원도 원주 상지영서대학교 칠예연구소다. ㆍ귀신이 사는 성남리 神林
    강원도 원주 남쪽에 신림면이 있다.
    한자로는 귀신 神에 수풀 林을 쓰니 귀신이 사는, 신령한 숲이라는 뜻이다. 지명만 신림이 아니라 실제로 숲이 있었다. 조선 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에도 신림이 나와 있고 고려사에도 신림이 나와 있으니,숲이 여기 있은 지 근 천년이다. 숲에는 서낭당이 있어서 주민이든 보부상이든 지나는 사람은 꼬박꼬박 절을 하고 다녔다. 숲에서 똥‧오줌 해결할라치면 마을 어른들에게 경을 치렀고 풀 한 포기 꺾어도 난리가 났다. 신림이라는 지명도 그대로 유전됐고 숲도 그대로 이어졌다. 신림이 있는 곳은 원주시 신림면이 되었고 숲은 신림면 성남리에 여전히 울창하다. 신림면은 치악산 국립공원 어귀에 있다. 공식 명칭은 성남리 성황림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892년 세상을 바꾸겠다고 작심한 궁예는 북원성 호족 양길에게서 군사 삼백을 얻어 치악산 기슭 석남사(石南寺)를 중심으로 주천,영월, 울진을 정복했다. 신림 사람들은 이 석남사가 신림에 있다고 믿는다. 석남사가 있던 골짜기 절골에는 기와 파편과 주춧돌이 흩어져 있다. 이름도 ‘석남’에서 ‘성남’으로 무뎌져 지금 마을 이름이 성남리가 되었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성남리 귀신 숲,신림은 해마다 4월 초파일과 음력 9월9일 밤 열두 시에 제사를 지냈다. 돌계단 위에 세운 당집 오른편, 전나무에 제를 올리고 왼편 엄나무에 소원을 적은 종이를 태워 올렸다. 신목(神木)인 전나무와 엄나무는 하늘이요 땅이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무리 삼천을 끌고 강림한 태백산 신단수,원형 신화에서 흔히 발견되는 ‘우주 나무’와 동일한 나무다. 제사를 마치면 마을에는 잔치가 벌어졌다. 하늘에 올린 소 한 마리를 동네방네 나눠 먹고 술을 마셨다. 밭 태워 입에 풀칠하던 화전민(火田民)들도 당제 올리는 밤에는 제사에 끼어들어 덕을 나눴다. 성남리 주민들은 “소 대신 돼지를 올린 해에 송아지들이 울타리를 넘다가 죄다 다리가 부러져 제사를 다시 지냈다”고 했다. 조선 말기부터 해방 때까지 성남리 사람들은 당번을 정해 원주 장으로 갈 때면 콩이랑 팥이랑 옥수수 짊어지고 당집에 절을 한 뒤 새벽길을 떠났고 해질녘이면 마중나간 젊은이들이 산에서 함성을 질러 맹수들을 쫓곤 했다. ㆍ들꽃을 닮은 김명진·곽은숙 부부
    신성한 성황림 옆 양지바른 산기슭에서 김명진(54)과 곽은숙(45) 부부는 차를 팔고 파전을 팔고 들꽃을 심는다. 부부가 사는 집 이름은 ‘들꽃 이야기’다. “남의 집 놀러와 설거지를 하니 여자가 돼 보여서”,“무한 긍정과 무한 지식에 홀려서”서로에게 푹 빠진 애니메이션 제작자와 국어교사는 1998년 4월 24일 서울 에서 살다가 성남리로 내려왔다. 낡은 막국수집 사서 청주공항 건설 때 철거된 집들 목재를 날라다 황토집을 지었다. “자연 속에서 아이들 키우고 싶어서”라고 했다.
    들꽃 부부 김명진-곽은숙.

    정민이와 정현이 두 딸 먹여 살리느라 찻집을 열었다. 하루 매상은 많아야 2만 원이었다. 가게 문 열어두고 산과 들 다니며 들꽃을 모아 뜰에 심었다. 2005년 외지인에게 마음 열린 마을 사람들은 젊은 김명진을 이장으로 뽑았다. “글 몰라서 농협도 못가고 전화도 못 한다”는 마을 할머니들 모아서 한글도 가르치고,“평생 못 가봤다”는 극장도 모셔갔다. 후배들 불러서 음악회도 열었다. 사는 곳,사는 모습이 워낙에 예쁜지라 어느덧 들꽃이야기는 원주는 물론 전국 명소가 되었다. 부부에게서 한글을 배운 송수분 할머니는“한글 배워 여한 없다”며 웃으며 한글학교 졸업하고 석 달 뒤 하늘로 갔다. 여든여섯 살이었다. 그 때 할머니가 쓴 글을 읽으면 지금도 부부는 가슴이 먹먹하다. ‘먼저 간 영감에게.호호영감아 당신과 나하고 만날 적에 당신은 말을 타고 나는 가마을 타고 이별 업시 살자더니 임자 당신 먼저 가서 북두칠성 되였스면 나는 밤중 셋별이 되어 이별없이 만낮시다-송수분’ 김명진이 말했다. “우리 어머니가 늘 말했다. 남 인심 얻으려면 내 인심 먼저 쓰라고.사람들이 아끼고 배려하니 당숲도 저리 아름다운 게 아닌가.신림은 그런 곳이다. 무연고지에 새로 뿌리 내린 것,후회하지 않는다.” 그 사이 자연이 키워준 두 딸은 학원 한 번 안 가고도 영어면 영어 역사면 역사, 체육이면 체육에 그림이면 그림에 큰 눈을 뜬 대학생과 고교생이 되었다. ㆍ1000년 세월 견뎌낸 원시림
    어느덧 성남리 당숲은 온대림에 살고 있음직한 나무와 풀이 다 살고 있는 원시림이 되었다. 연전에 영화 ‘신기전(神機箭)’ 첫 장면을 이 숲에서 찍은 영화 스태프들은“비무장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원시림”이라며 놀라워했다. 1933년 총독부는 이 숲을 조선보물고적명승 93호로 지정했다. 1962년에는 그 번호 그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이름은 ‘윗성남 당숲’에서 ‘성남리 성황림’으로 변경됐는데,주민이자 사학자요 식물학자인 고주환에 따르면“그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원주 신림면 성남리에 있는 당숲 성황림에 봄이 내려왔다. 하늘로 통하는 신목(神木) 전나무가 푸르게 빛나고 당집은 신의 강림을 기다린다. /박종인 기자

    문화적으로 신성하기에 숯 만들어 파는 사람들도 범접하지 않았고, 주민들이 가진 신심(信心) 덕분에 숲은 생태학적으로 귀한 존재로 살아남았다. 신심이 영원을 만든 것이다. 해마다 실개울 얼음장 아래 물소리가 들리고 나무마다 새싹이 움틀 무렵이면 땅에는 샛노란 복수초가 ‘나 밟지 말아요’하고 방긋방긋 속삭인다. ㆍ용소막성당과 명주사
    세상만사가 땅 이름 따라가라는 법은 없지만,신림에 사는 모습은 묘하게 이름과 닮았다. 면사무소에 따르면 인구 3863명인 이 작은 면에 종교시설이 서른세 군데다. 성당이 하나,교회가 열네 곳, 절이 열여덟 곳이나 있다. 6‧25전쟁 전에는 1개 리(里)에 서낭당이 10군데가 넘었다. 그 많은 종교시설 가운데 용소막성당과 태고종 명주사는 꼭 가봐야 한다. 용소막성당은 용암2리에 있다.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수원에서 숨어든 천주교도 공동체가 이곳에 있었다. 성당 앞 마을이름은 당뒤마을이고 그 앞 들판은 종림마을이다. 종림에는 또 다른 신림인 시무숲이 있었다. 숲에는 ‘명주실 한 타래가 들어가고도 끝이 닿지 않는’ 늪이 있었다. 성남리 사학자 고주환이 말했다. “시무숲은 신림 전체를 지키는 당숲으로 보인다. 내 고향 성남리 당숲보다 더 오래 되었다.” 시무숲은 들판으로 변했고, 용소막 성당이 그 신성한 역할을 대신한다. 일제 강점기에도 용소막마을은 외국인 신부들이 총독부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줬다. 신자들이 즐겨 찾는 순례지요, 사진 애호가들이 잦게 출몰하는 여행지다.
    병인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도들이 만든 용소막성당

    명주사는 어떤가. 군승(軍僧)을 지낸 한선학 스님이 세운 태고종 사찰이며 동시에 동서양 고판화 수천 점을 소장한 고판화박물관이다. 전통이라는 굴레에 갇힌 기와집 절집이 아니라 집집마다 너와를 머리에 인 독특한 사찰이다. 박물관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목판들이 숱하다. 한선학 스님과 차 한 잔을 하면서 세상과 종교와 예술에 대해 고상하게 수다를 떨어도 좋다. ㆍ후회하지 않는 칠장이 김성권
    신성한 숲 옆 부부의 찻집에서 김성권이 차를 홀짝였다. “옻을 접한 순간 느낌이 왔다. ‘ 이건 내 운명’이라고” 옻은 무엇인가. 안료를 섞으면 무지개색을 낼 수 있는 총천연색 도료요, 1000년을 간다는 견고한 도료다. 자개에 금속, 흙, 플라스틱까지 지구상 웬만한 재료는 섞어서 쓸 수 있는 열린 도료다. 무덤에서 나온 800년 전 옻칠 관 속 연씨가 싹을 틔우는 기적의 방부제다. 그가 말했다. “세상은 옻을 고리타분하고 경쟁력 없는 분야라 하지만 틀린 생각이다. 첨단 도료와 미학적 재료로 틀림없이 각광받으리라 확신한다.” 꼼꼼한 성격도 옻칠에 딱이었다.
    천하의 대가 전용복 아래 옻을 배운지 5년이 됐지만 단 한 점도 자기 작품을 만들지 않았다. 그저 배울 뿐이다. “스승 이름 더럽히기 두렵고, 아직 수준이 안 돼서”라고 했다. 하지만“‘가기 싫다’고 생각하며 잠에서 깬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스승 전용복이 말했다. “인내심 없이는 옻 작업이 불가능한데 성권이는 유전자에 옻칠이 돼 있는 거 같다.” 제자 김성권이 말했다. “기쁘게 택한 내 운명이다. 후회하지 않는다.” 신성한 숲으로 사람들이 찾아와 신념과 믿음을 의탁한다. 젊은 칠장이도 후회가 없다고 했고 들꽃 심는 부부 또한 후회 없다고 했다. 지구상 65억 인구는 모두가 신성하다. 하지만 그 신성한 영혼에게 후회 한 번 어찌 없으랴. 그렇거들랑 당장 신림으로 가보라. 혹시 아는가,우리가 모르는 신이 나타나 자기만 알고 있는 세상 이치를 깨우쳐줄지. 볼거리 1. 성남리 당숲: 개인적인 출입은 금지. 성황림마을 체험관에 물으면 숲 생태 체험을 할 수 있다. 홈페이지는 성황림.kr (033)763-7657. 성남리 고주환 선생에게 이메일로 연락하면 전문적 숲 해설을 받을 수 있다. 식물을 통해서 본 세상 이야기 '나무가 청춘이다' '나무가 민중이다'의 저자다. 이메일은 khk8926@naver.com
    2. 용소막성당 : 강원도에서 세 번째로 세운 천주교 교회. 당시 중국 기술자가 기둥 높이를 잘못 계산해 지붕 경사가 급하고 첨탑이 건물 규모에 비해 높다. 주차장에서 올려다보는 석양 무렵 실루엣이 근사하다. 용암리 719-2 . 3. 명주사 고판화 박물관 : 태고종 사찰. 아시아 각국 고판화와 희귀 목판을 감상할 수 있다. 5월 15일까지'붉은 열정 손오공 특별전'.박물관 입장료 성인 5000원. 템플 수련관에서 템플스테이도 한다. www.gopanhwa.com 신림면 황둔2리, (033)761-7885.


    당숲에 피어난 복수초
    맛집 카페 들꽃이야기: 18년 전 성남리로 들어온 김명진·곽은숙 부부네 음식점. 들꽃 500여 종이 있는 정원,청주공항 건설 때 철거된 옛집들 기둥 가져와 만든 집과 지도 쌓고 있는 돌담이 있다. 남편 김명진씨가 서울에서 목공 수업을 듣는 월·화 휴무. 신림면 성남2리 633, (033)762-2823 칠예연구소 원주 상지영서대학교 전통산업진흥센터 안에 있다. 칠예 장인 전용복 선생 작업실 겸 사무실. 1층 전시장에 전용복 선생 작품을 전시 중이다. 미리 연락하면 전시관을 관람할 수 있다. 문의 산학협력단 (033)734-5705.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 전문기자 sen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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