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M T = ♣ /♣ 歷史의窓

1896년 2월을 기억하나요

浮萍草 2016. 2. 16. 22:30
    일제에 연금당했던 고종, 몰래 아관파천
    우리 위상 높아졌지만 외세의 파고 여전
    
    1896년 병신년 2월 11일 고종은 궁녀가 타는 가마에 황급히 몸을 싣고 경복궁을 빠져 나왔다. 
    최종 목적지는 러시아 공사관.우리 역사에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불리는 사건이 일어난 지도 꼭 120년이 지났다. 
    아관이라 한 것은 러시아를 아라사국(俄羅斯國)이라 칭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했으며, 그날의 사건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아관파천의 배경이 된 결정적인 사건은 한 해 전인 1895년 10월 8일에 일어난 을미사변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제가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강화하자 명성황후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주목했다. 
    이제 종이호랑이가 된 청나라보다는 러시아가 조선의 국익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명성황후가 친일파를 축출하고 친러파를 양성하는 외교적 성향을 보이자 일제는 왕비 살해라는 최악의 만행을 저질렀으니, 이것이 바로 을미사변이다.
    을미사변은 경복궁의 건청궁에서 일어났고, 고종은 사건 당일 이곳에 있었다. 
    왕비가 피살된 후 고종은 사실상 일제에 의해 연금되었다. 
    이 무렵 조선에 영향력을 미치고자 했던 러시아는 공사 카를 베베르로 하여금 이범진,이완용,이윤용 등 친러세력과 함께 고종을 자신의 공사관으로 모셔오게 
    했다. 
    고종 역시 일제와 친일내각에 둘러싸인 경복궁이나 창덕궁,창경궁보다 미국,영국,독일 공사관 등이 밀집된 정동(貞洞) 일대가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고종은 2월 11일 새벽 태자와 함께 궁녀가 타는 두 개의 교자를 타고 경복궁 동문 건춘문을 나와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
    했다. 
    체면은 구겼지만 궁녀의 가마는 검문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활용한 전략이었다. 
    ‘고종실록’에는“왕과 왕태자는 대정동(大貞洞)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주필(駐?)을 옮겼고,왕태후와 왕태자비는 경운궁에 옮겼다”고 그날을 기록하고 있다.
    현재의 정동에 러시아 공사관 건물 전체는 사라졌지만,공사관 전망탑은 현재까지도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을 택한 다른 이유는 근처에 경운궁이 있어서 새로운 왕궁으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돌아올 때까지 1년간의 파천 기간에 자주독립을 회복하고 ‘민국(民國)’을 건설한다는 새로운 구상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1897년 10월 12일 환구단(현재 웨스턴조선호텔 자리)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조선은 왕의 나라가 아닌 황제의 나라가 됐고,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국호가 바뀌었다. 
    그리고 고종은 황제가 주체가 된 광무개혁을 추진하면서 근대의 격랑을 헤쳐 나가려고 했다.
    아관파천이 일어난 당시 세계 열강의 침략에 휘둘렸던 한국의 위상은 이제 놀라울 만큼 성장했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여전히 안갯속 상황이다. 
    북한의 핵개발, 일본의 우경화, 늘 힘자랑을 하고 싶어하는 러시아,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경제대결까지.왕이 다른 나라 공사관에 피신할 수밖에 없었던 120년 전 
    아픈 역사가 여전히 유효한 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치,경제 야욕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草 浮
    印 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