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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초상 ‘어진’

浮萍草 2015. 12. 29. 20:16
    말을 맞이해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예술의전당 등에서는 주목할 만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이 중 필자의 눈길을 끄는 것은 8일부터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기획전시를 하고 있는‘조선 왕실의 어진과 진전’이다. 
    이번 전시에는 왕의 어진(御眞)을 모두 모았고 윤증, 채제공,흥선대원군 등 쟁쟁한 역사인물 초상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전통을 계승해 왕의 초상인 어진을 제작하고,어진만을 특별히 보관하는 진전을 설치했다. 
    태조의 어진만을 받드는 진전은 여러 곳에 마련됐고,후대 왕의 어진은 궁궐 내에 선원전을 설치해 보관했다. 
    조선은 27명의 왕을 배출했지만 당대의 실물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어진은 태조,영조,철종,고종,순종 5명뿐이다. 
    시대별로 역대왕의 어진을 제작해 창덕궁의 선원전 등에 보관했지만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부산으로 옮겨 보관한 어진 대부분이 화재로 소실됐기 때문
    이다. 
    현재의 철종 어진은 좌측면 절반가량이 불에 타 훼손된 모습이며,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문조로 추존) 어진에도 화재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만원권 지폐의 세종대왕은 후대 기록을 바탕으로 그린 상상의 초상이다.
    왕의 초상을 ‘어진’이라 한 것은 터럭 한 올도 놓치지 않고 왕의 참 모습을 그대로 남기려는 의지에서다. 
    어진은 인물의 외형적인 모습뿐 아니라 내면의 성격까지 정확히 파악해 화면에 담아야 했기에 ‘정신을 옮긴다’는 의미에서 ‘전신(傳神)’이라는 표현을 썼다. 
    ‘전신’에서는 안면 근육,광대뼈,뺨,수염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살아있는 왕을 직접 그리는 것을 도사(圖寫)라 했고 기존의 어진을 참고해 다시 그리는 것을 모사(模寫)라 했다. 
    어진 제작 때에는 임시기구인 도감이 구성됐으며, 당대 최고의 화원이 동원됐다. 
    주관화사라 불리는 최고 화원이 왕의 얼굴과 전체 윤곽을 그렸으며,주관화사를 돕는 동참화사와 그림에 필요한 각종 잡일을 하는 수종화원으로 팀을 구성했다. 
    왕의 얼굴만을 보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영광이자 두려움이었을 것인데 그 외모,성격,정신까지 그림으로 옮겨야 했으니 어진 제작의 과정은 그만큼 공력이 들어
    가고 긴장감이 감도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현존하는 어진에는 왕의 특징이 나타난다. 
    1396년 청룡포를 입은 태조를 그린 어진(1872년에 다시 모사함)에서는 무인다운 강인함이 엿보이며 어진 속 영조의 모습은 치밀하고 깐깐했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영조는 왕이 되기 전 왕세제 시절의 어진까지 남아 있는데,젊은 시절 체형이 노년기에도 유지됨을 볼 수 있다. 
    영조는 83세로 조선 왕 중 최장수 기록을 세웠다. 
    채식위주 식단과 철저한 건강관리가 장수의 요인이었는데 어진에서도 이러한 면모가 확인되는 것이다. 
    강화도령으로 있다가 세도정치 시기 정치적 입김 속에 왕이 된 철종의 얼굴과 눈매에는 독자적으로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던 불안한 모습이 나타나 있다. 
    어진을 통해 역사책에 등장하는 상상 속 왕의 모습이나 드라마 속 연기자가 연기한 왕이 아닌 왕의 실제 모습을 접해 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왕들이 만들어갔던 역사와 그 숨결도 느껴보았으면 한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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