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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을 걸어보는 즐거움

浮萍草 2016. 1. 12. 21:30
    국인들이 서울을 방문하면서 가장 놀라는 것 중 하나가 세계적인 도시 서울 곳곳에 많은 산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 
    실제 강을 끼고 있는 큰 도시는 많지만 도심 한복판이 산으로 둘러쳐진 경우는 흔치 않다. 
    1394년 10월 조선의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이유도 한양에는 큰 산 네 곳 즉 동쪽 낙산,서쪽 인왕산,남쪽 목멱산(남산),북쪽 북악산이 둘러 있어서 국방에도 유리
    했고 도성 백성의 관리에도 편리했기 때문이었다. 
    1395년(태조 4) 9월 태조는 도성 축조도감(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으로 하여금 성터와 네 곳의 산을 연결하는 한양 도성을 조성케 했다. 
    1396년 1월부터 전국의 장정 11만8000명이 동원됐고 축성 구역을 97개 구역으로 나눠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등 각 지역별로 담당 구역을 정했다. 
    각 구역을 천자문의 순서대로 표시한 것도 흥미롭다. 
    북악산 동쪽에서 천자(天字)로 시작해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다시 백악산 서쪽의 조자(弔字)까지 구획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산을 이은 도성의 둘레는 9975보(步)로 1만8627m 정도가 된다.
    성곽 동서남북의 중심에는 크게 4개 문을 뒀다.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서쪽에 돈의문(敦義門),남쪽에 숭례문(崇禮門),북쪽에 숙정문(肅靖門, 靖은 智자와 통함)을 뒀는데,도성 문의 이름에 ‘인의예지
    (仁義禮智)’를 넣어 유교이념을 늘 기억하게 했다. 
    ‘경국대전’에는 밤 10시쯤 인정(人定: 성문을 닫음) 종소리가 28번 울리면 도성 문이 닫혔고 오전 4시쯤에 파루(罷漏: 성문을 염) 종소리가 33번 울리면 도성 
    문이 열렸음이 기록돼 있다. 
    세종은 1421년 10월 도성 수축도감을 설치하고 보수공사를 시작했다. 
    전국에서 32만여 명을 동원했는데, 당시 한양 인구가 10만명 정도임을 고려하면 도성 보수가 역점 사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이후 도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한 왕은 숙종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번의 큰 전쟁에서 도성은 한양의 방어에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이에 숙종은 성곽을 보수해 방어처로 활용해야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1705년(숙종 31)에 도성 보수공사를 시작했다. 
    숙종대에는 규격화된 돌을 사용해 질서정연하게 도성을 쌓았다. 
    태조대에는 다양한 크기의 깬 돌을 규칙 없이 쌓았고 세종대에는 아래쪽은 크고 위쪽은 작은 돌을 사용한 데 비해 숙종대에는 네모나게 다듬은 규격화된 돌을 
    사용했다. 
    이것은 성이 파손됐을 때 보수하기 편리한 장점을 가진다. 
    도성을 걸으면서 서로 다른 돌의 모습을 만나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한양 도성은 본래 외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어 기능과 더불어 국가의 권위를 백성에게 보여주는 통치적인 역할도 했다. 
    여기에 더해 최근에는 시민의 휴식공간이자,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장소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동서양에 많은 역사 도시가 있지만 도성의 모습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곳은 매우 드물다. 
    한양 도성은 현재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기도 하다. 
    새해에는 한양 도성을 찾아 세계적인 도시 서울의 또 다른 면모를 만나 보기를 바란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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