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39 무왕과 선화공주와 미륵의 꿈

浮萍草 2016. 2. 16. 13:03
    효심이 지극했던 백제의 무왕
    전북 익산 서동공원에 있는 무왕의 동상이다.동상의
    얼굴은 누구 얼굴을 기준으로 삼았는지 궁금했다.
    하게 지나치던 호남고속도로 왕궁-삼례IC에 들어선 순간 탄식을 금치 못했습니다. “귀중한 역사의 보고(寶庫)에 그간 무지했구나”하는 자탄(自嘆)이 가슴을 울렸습니다. 지금까지 무엇을 하였는가하는 반성의 발길을 거기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위대한 백제의 꿈이 서려있는 도시,지금은 부여나 공주에 비해 방치되다시피한 유적,그렇지만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자‘유네스코 세계 유산(遺産)’으로 최근 등재된 전북 익산을 독자 분들과 함께 걸어보려합니다. 익산 변두리에 마룡지라는 연못이 있습니다. 지금은 바로 옆에 왕갈비탕집이 들어서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이곳의 신비한 전설을 기록합니다.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의 연못가에 살던 여인이 어느날 연못 속의 용(龍)과 관계해 아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인은 백제 무왕(武王)의 어머니이며 ‘연못 속의 용’은 무왕의 친아버지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그런데 그 왕이 누구인지를 놓고는 설이 엇갈립니다. 삼국사기는 무왕의 친부(親父)를 29대 법왕(法王·재위 599∼600)이라 보고 있습니다. 중국 남북조시대에서 북조(北朝)의 역사를 기록한 북사(北史)는 무왕을 27대 위덕왕(威德王·재위 554~ 598)의 아들로 기록하지요. 위덕왕과 법왕 사이에는 28대 혜왕(惠王·재위 598~599)이 있었습니다만 법왕과 혜왕의 재위기간은 합쳐도 3년뿐입니다. 무왕의 친아버지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존엄의 상징인 ‘용’을 등장시킨 것은 그만큼 무왕의 업적이 남달랐기 때문일 겁니다. 무왕은 서기 600년부터 641년까지 재위했고 641년 사망했지만 태어난 연도는 역사에 정확하게 나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나자마자 왕이 됐을 리는 없고 적어도 열살 내지 스무살이 돼서야 왕으로 즉위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의 친부는 위덕왕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29대 법왕이나 28대 혜왕이라고 추정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을 듯 합니다. 이 마룡지 주변에 서동생가터라는 곳이 있는데 서동은 무왕의 어릴 적 이름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 부근에서 백제 기와가 발견됐기에 ‘서동대왕모축실처(薯童大王母築實處)’ 라고 기록하고 있지요. 무왕 어머니가 지은 집터라는 뜻일 것입니다. 여기서 1.2㎞쯤 외곽으로 가면 길가에 쭈꾸미 음식점이 보이는데 그쪽으로 들어가면 봉분 두기가 나란히 있습니다.
    무왕과 그의 아내 선화공주가 잠든 곳이라고 하는데 최근 무왕의 것으로 추정됐던 큰 봉분에서 여자의 흔적이 나왔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제가 이용하는 ‘김기사’라는 네비게이션에는 ‘익산쌍릉’ ‘서동생가터’가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에게 물어서 갈 수 밖에 없었지요. 최근 조성된 서동공원은 볼 것이 없는데도 네비게이션에 등장하니 선후가 바뀐 느낌입니다.
    전북 익산 서동공원의 무왕과 선화공주 석상을 클로즈업해봤다

    많지않은 사서와 전설에 따르면 무왕은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고 합니다. “늘 마(麻)를 캐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해 사람들이 맛동이(서동·薯童)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 구절에서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왕자인데도 가난했다는 것은 무왕의 친부와 어머니가 야합했음을 상징하지요. 사서에서 ‘용과 관계했다’는 것은 정상적인 부부가 아닐 때 사용합니다. 무왕의 아들 의자왕도 ‘해동증자’로 불린 것을 보면 효심만은 부전자전(父傳子傳)이었던 것 같습니다. 익산토성이 있는 오금산에는 서동이 어린 시절 마를 캐다 금덩이를 다섯개 얻었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실제로 오금산에서는 야생 마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란 서동이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얻은 이야기는 잘 알려져있지요. 서동은 선화공주가 미인이라는 말을 듣고 신라의 수도 서라벌(경주)로 가 어린아이들에게 마를 주며 친해진 뒤 다음과 같은 노래를 유행시키지요.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어러두고 서동방을 몰래 밤에 안고 간다.” 이 노래의 여파는 컸습니다. 장안에 이 노래가 퍼진 것을 알게된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귀양보내는데 거기서 서동은 선화공주의 마음을 얻고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무왕의 꿈이 서린 무왕길이다.

    서기 600년 제29대 법왕의 뒤를 이어 서동이 무왕으로 취임했을 때 백제의 사정은 풍전등화같았습니다. 위로는 강성한 고구려가 버티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신라가 들불 일어나듯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던 겁니다. 무왕은 난관을 타개하려 수도를 익산으로 천도하려합니다. 그 별궁(別宮)이 익산 왕궁리 유적이지요. 이 유적을 두고는 한동안 설이 엇갈렸습니다. 무왕이 세운 것이다, 보덕국의 안승이 세운 것이다, 후백제의 견훤이 세운 것이다라는 설이 난무했는데 발굴조사를 통해 무왕 대에 조성된 사실을 알게됐지요. 왕궁리 유적은 남북 492m,동서 234m로 해발이 40여m에 불과한 평지에 세워졌습니다.
    무왕이 백제 부흥의 꿈을 안고 건설한 별궁인 왕궁리 유적 한복판에 우뚝 서있는 왕궁리 오층석탑이다.

    왕궁리 오층석탑은 간소하면서도 절제된 백제미의
    절정을 보여준다.
    발굴조사 결과 전각(殿閣)으로 추정되는 대형건물지, 정원시설 등이 드러났고 유리-금제품-토기-수부 (首府)라는 글씨가 적힌 기와 등 1만여점의 유물도 출토됐습니다. 익산과 전주를 잇는 자동차 전용도로에서보면 왕궁리 전체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허허벌판 왕궁리에서 눈길을 끄는 구조물이 있습니다. 국보 289호 왕궁리 오층석탑입니다. 유적 한복판에 우뚝한 오층석탑은 건축연대가 불확실하지만 주변에서 대관관사(大官官寺),관궁사 (官宮寺),왕궁사(王宮寺)라고 적힌 기와가 발견됐습니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기에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이 기와가 뜻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지요. “(백제가 망하기 전) 9월 대관사의 우물물이 변하여 피가 되고 금마군(金馬郡)에서는 땅에서 피가 흘러 나와 그 너비가 5보나 되더니 왕이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백제가 의자왕 대에 멸망하기 전 기이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머리 잘린 닭이 한참을 걸어다니는가하면 우물에서 귀신이 나와 ‘백제는 망했다’고 울부짖었다는 등의 해괴한 사건들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로 미뤄 무왕 대에 별궁으로 쓰이던 왕궁리는 의자왕 때 사비성(부여)을 수도로 고수하면서 사찰로 변했고 왕궁리 오층석탑의 명칭 역시 대관관사 혹은 대관사,왕궁사로 변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요. 앞서 금마리란 익산의 옛 지명입니다. 왕궁리 오층석탑은 제가 지금까지 본 여러 석탑 중에서도 손꼽을만한 명품입니다. 완벽한 자태에 군더더기없는 형상이 백제 미의 정화(精華)라 할만하지요. 새벽녘이나 황혼 무렵 벌판에 홀로 선 오층석탑을 보면 사라진 왕국의 정서가 살아납니다.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草 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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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가 미륵 불교의 중심지로 거듭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왕은 익산으로 도읍을 옮기며 무슨 꿈을 꾼 것일까요? 
    그 목적을 잘 나타내는 곳이 왕궁리 유적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는 미륵사지입니다. 
    미륵사지는 무왕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삼국유사 무왕 조에 남아있습니다.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를 가던 중 용화산 밑의 큰 연못에서 미륵 삼존이 출현하자 사찰을 짓고 싶다는 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연못을 메운 후 법당과 탑,회랑 
    등을 각각 세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하였다”는 창건설화와 관련된 기록입니다. 
    여기서 용화산은 지금의 미륵산을 말합니다. 
    그런데 용화(龍華)나 미륵은 사실상 같은 뜻입니다. 
    불교에서 용화는 미륵불이 사는 정토(淨土)를 말합니다.
    현재 해체복원 작업중인 미륵사지 석탑의 기단부다

    내친 김에 미륵불은 어떤 부처님인지 알고 넘어가겠습니다. 미륵은 원래 석가모니의 제자였다고 합니다. 범어로 ‘마이트레야(Maitreya)’라고 하는 미륵은 성(姓)이며, 이름은 ‘아지타(Ajita·阿逸多)’라고 하지요. 흔히 우리가 자씨(慈氏)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미륵불입니다. 미륵은 인도 바라나시국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석가모니의 지도를 받으며 수도하였고 미래에 성불(成佛)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갔는데 지금은 천인(天人)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도솔천’은 지나친 욕심이나 번뇌·망상으로 인한 방황이 없는 세계입니다.
    왕궁리 유적의 전경이다. 사라진 무왕의 꿈은 저 석탑에만 남아있는 듯 하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께서 입멸한 뒤 56억 7000만년이 되는 때에 다시 미륵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화림원(華林園)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3회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교화한다고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라고 하는데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기 이전까지는 미륵보살이라 하고 성불한 이후는 미륵불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기독교에서 예수가 세상이 멸망할 때 재림한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구조이지요. 그래서 미륵불은 구세주와 같습니다. 그때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지상낙원인 ‘용화회상(龍華會上)’이라고 부르는데 사시사철 기후가 화창해 사람들은 병을 앓지않으며 모두가 평등하고 사이좋게 사는 유토피아 같은 세상이 된다고 합니다.
    무왕 생가터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차의 왕래가 많은 곳이어서 접근하기 불편하다.

    사람들의 얼굴은 복숭아꽃처럼 곱고 금은보석이 땅에 지천으로 널렸어도 욕심내는 사람이 없으니 수명은 극히 길어지지요. 미륵은 6만살을 살고 미륵의 법 역시 6만년이 지속되니 그야말로 모두가 꿈꾸는 지상낙원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 미륵불에 대한 사람들의 희망이 미륵신앙으로 이어져 미륵보살이 계시는 도솔천에서 태어나기를 바라는 신앙이며,말세를 구제하기위해 미륵이 내려오기를 바라는 신앙으로 발전했습니다. 이것은 특히 힘없는 민중들의 바램이었지요. 우리나라에 미륵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백제 성왕 4년(526)에 사문 겸익(謙益)이 인도에 유학하고 돌아와 미륵불광사(彌勒佛光寺)를 지었을 때를 기점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왕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위덕왕 때 미륵석상(彌勒石像)을 일본에 전했다는‘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을 보면 무왕 때 건설한 익산 미륵사와 미륵탑은 백제가 미륵불교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미륵사지에는 지금은 사라진 탑을 재현해놓은 탑이 있다.

    무왕이 집권했을 때 백제는 꺼져가는 촛불과 비슷한 신세였습니다. 갑자기 군사력을 키울 수도,고구려나 신라의 힘을 빌릴 수도 없는 고립무원상태였지요. 그랬기에 백제의 권력자와 백성들이 기댈 수 있는 존재는 미륵의 출현을 바라는 것 뿐이었을겁니다. 미륵은 신라에서도 널리 퍼졌습니다. 신라 법흥왕 14년(527) 흥륜사(興輪寺)에 미륵존상을 모셨고 혜공왕(惠恭王) 2년에는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금산사(金山寺)를 중건하면서 미륵장육상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미륵불 사상의 대표적 유물로 꼽힙니다. 심지어 통일신라말기 후삼국시대가 시작됐을 때 궁예(弓裔)와 견훤(甄萱) 역시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자칭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증산(甑山) 강일순 (姜一淳)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상제(上帝)임과 동시에 미륵불이라 칭하기도 했습니다.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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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륵의 세계를 꿈꾼 무왕과 선화공주
    
    1980년대 본격적으로 발굴된 미륵사지에서는 2만여점의 유물이 출투됐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사가(史家)들은 미륵사지를 동양 최대이자 최고의 국가사찰이며 왕권강화와 국력신장을 목적으로 한 절이었다고 봅니다.
    이 미륵사는 17세기 무렵 폐사됐습니다. 
    미륵사지에는 볼만한 유물들이 많은 데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게 미륵사지 당간지주입니다. 
    당간지주란 사찰에서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幢),즉 불화(佛畵)를 그린 깃발을 걸어놓은 장대를 말합니다. 
    미륵사지엔 두기의 당간지주가 있지요.
    미륵사지에 남아있는 당간지주다.

    국보 11호인 미륵사지 석탑은 지금 해체 복원 작업이 한창이었습니다. 지금 미륵사석탑 주변에는 공장과 같은 형태의 가설물이 세워졌고 그 안에서는 석공들이 미륵사지 석탑을 일일이 쪼며 옛 모습을 찾는데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미륵사지석탑은 높이가 무려 14m나 되며 탑신의 1층 네면에는 문을 만들어 내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부의 중앙에는 사방 99㎝의 거대한 사각형 심주를 세웠고 옥개석들은 끄트머리를 살짝 치켜올리는 기법으로 목탑에서 보는 수법을 차용했습니다.
    미륵사지에는 미륵사지 오층석탑에서 해체해놓은 돌들이 놓여있다. 탑이 어마어마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익산에는 무왕 탄생설화지(마룡지와 생가 터),쌍릉,왕궁리-미륵사지 외에도 볼 것이 많습니다. 왕궁리 유적에서 동쪽으로 2㎞ 떨어져 있는 제석사지 역시 무왕이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보물 45호)는 7세기초의 작품입니다.
    무왕 탄생설화가 전해져내려오는 익산의 마룡지다. 정면으로 보이는 부분에 무왕 생가 터가 있다

    주변에는 평지인 익산을 보호하려는 듯 익산토성(해발 125m)-미륵산성(해발 430m)-낭산산성(해발 162m)-금마도토성(해발 87m) 등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미륵산성은 고조선의 준왕이 건설했다고 해 ‘기준성’이라고도 불립니다.
    선화공주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다. 쌍릉은 명당으로 소문나 주변에 무덤들이 많았다.

    무왕과 선화공주가 꿈꾼 미륵세계가 훗날에도 이어졌음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 익산에 또 있습니다. 왕궁리 유적지 맞은편에는 들판이 펼쳐져있고 가운데 옥룡천이라는 개울이 흐르고있습니다. 바로 그곳에 200m거리를 두고 미륵불 두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익산 고도리 석불입상이라고 부르는 이 미륵불에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 둘은 각각 남자(서쪽)와 여자(동쪽)인데,평소 만나지 못하다가 섣달 그믐날 밤 자정에 옥룡천이 얼어붙으면 서로 만나 회포를 풀다 닭이 울면 제자리로 돌아 간다는 거지요.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생각났습니다. 또한 석불입상이 떨어져있는 거리가 200m인 것이 무왕과 선화공주의 쌍릉의 거리와 비슷한 것도 예삿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 그것을 계산한 뒤 세웠다는 가정이 가능해지지요.
    전북 익산 쌍릉가운데 무왕의 것으로 알려진 큰 무덤이다. 최근 이 무덤이 무왕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이 석불입상은 고려 때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조선 철종 9년(1858)에 익산 군수로 부임해 온 최종석이 쓰러져 방치된 석불입상을 지금의 위치에 일으켜 세웠다 고 합니다. 그 때 쓴 ‘석불중건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금마는 익산의 구읍자리로 동-서-북의 삼면이 다 산으로 가로막혔는데 남쪽만은 터져 물이 다 흘러나가 허허하게 생겼기에 읍 수문의 허를 막기 위해 세워진 것 이라 한다. 또 일설에는 금마의 주산인 금마산의 형상이 말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말을 끄는 마부(馬夫)로서 인석(人石)을 세웠다고 한다?.”
    고도리 석불 입상 가운데 반대쪽 200미터 지점에 있는 것이다. 이 두 석불입상은 1년에 한번 해후한다고 해 견우와 직녀의 설화를 연상케한다.

    고도리 석불입상은 기둥 같은 몸체에 네모난 얼굴, 가는 눈,짧은 코,웃음기를 담은 작은 입 등이 마치 장승과 같은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볼수록 듬직하고 소박해 눈길을 더욱 끌게 되지요. 안타까운 것은 보물 46호인 고도리 석불입상의 관리상태입니다.
    옥룡천을 건너는 다리 앞에서 본 고도리 석불입상이다.

    석불입상 주변은 온통 지저분한 비닐하우스 천지인데 먹지못해 뼈만 앙상한 개 한마리가 객(客)들을 향해 으르렁대며 사납게 짖어대 접근하는데 용기가 필요 했습니다. 석불 입상 주변에는 ‘무왕 길’이라는 산책로도 조성돼 있었는데 조금 더 정비하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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