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M T = ♣ /한국불교 비구니 리더

4 동학사 화엄승가대학원장 일초 스님

浮萍草 2016. 2. 23. 10:12
    “공부에 변칙 없다” 바위 같은 원력으로 ‘동학사 학풍’ 일궈
    “어떤 강사로 기억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제자를 사랑했던 강사로 기억되기보다는 제자들이 살아가는 동안 의미를 주는 강사가 되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주 동학사서 바라보는 문필봉(文筆峰)은 하얀 바위 불쑥 솟아오른 것이 참말로 가지런히 다듬어진 뾰족한 붓끝 같다. 원래 이름은 시왕봉이지만 동학사 대중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이 바위를 문필봉이라 부른다. 그 모양새 때문만은 아니다. 풍수지리에서는 문필봉 아래서 큰 문장,즉 대학자가 배출된다고 했다. 이 때문에 동학사에서 비구니 대강백이 많이 출연한 것인지,아니면 대강백이 워낙 많다 보니 바위 이름도 슬금슬금 문필로 바뀐 것인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그 봉우리 아래 비구니스님들의 경 읽는 소리가 계곡 물처럼 흐르는 곳에 자리한 동학사는 그 자체로 비구니 교육의 역사다. 하지만 역사를 쓰는 붓은 바위가 아닌 사람, 동학사가 절로 비구니 교육 산실 됐을 리 없다. 그 주인공 경월일초(鏡月一超) 스님이다. ‘화엄경’ 한 구절에 발심 출가 “일대시교 접하리” 동학사행 강원 2년차에 빚더미 재무 소임 강주·주지 모시고 강원 지켜내 학인신분에 쌀 빌리러 다니기도 1977년 호경 스님에 전강 받아 ‘진속일여’ 화두로 선방 정진도 “학인엔 강사 필요” 다시 강단
    승가대학도 3월이면 개강을 한다. 올해 세수 74세에도 여전히 강단에 서는 일초 스님도 바빠질 터다. 때마침 방학이라 긴 시간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차라리 행운이다. “세납 50을 바라보도록 지척에 있는 수덕사를 한 번도 못 가봤다”는 스님의 회상이“하루도 강의 빼고 쉬어본 날이 없는 까닭에”라는 부연을 듣고서야 이해됐으니 말이다. 그 시절 이야기는 이뿐만이 아니다. 일초 스님 속가는 고향 담양에서도 내로라하는 부농이었다. 부친은 공직자였다. 광주서 학교 다니며 책 읽기 좋아하던 여학생은 서울서 대학을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완고한 유교 집안, 부친은 서울행을 단호히 반대했다. 문학과 철학을 좋아하던, 특히 서양철학에 매료돼 있던 갓 스물의 여학생은 포기하지 않고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한 권의 책이 손에 들어왔다. ㆍ출가인연이 궁금하다.
    “어려서부터 책을 무척 좋아했다. 동양철학보다는 서양철학에 더 매력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화엄경’을 보게 됐다. 우리말로 번역된 조그만 책자였는데 ‘모든 우주는 내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눈에 쑥 들어왔다. 단숨에 그 책을 다 봤다. 서양철학은 이에 비하면 이야깃거리도 안 되는 것이었다. 경전을 배우고 싶었다. 광주서 가까운 곳에 백양사,내장사가 있었는데 전부 대처승이 살고 있어 갈만한 형편이 못됐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광주 시내서 비구니스님을 만났다. 무작정 따라갔다. 광주 시내에 있는 신광사라는 절이었다. ‘여기가 비구니스님들 사는 곳이구나’ 싶어 무턱대고 여기서 살겠다고 했다. 수행이 뭔지, 비구니가 어떤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스님들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당연했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속가는 철저한 유교 집안이었다. 부친은 ‘네가 무슨 재주로 절에 가서 살겠냐. 너무 힘들고 어려워 못살 것이다’고 했다. 서울 가서 공부 더 하고 싶었는데 딸이라는 이유로 서울행을 반대하셨다. 그러니 은근한 반감도 있었을 것이다. ‘진짜 하겠습니다’ 대꾸를 했다. 부친께서도 ‘해볼 테면 해봐라’ 하셨다. 그렇게 집을 나와 절로 갔다. 막상 가서 3일이 지나니 정말 못하겠더라. 얼마나 일을 시키는지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부친에게 큰소리치고 왔으니 집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견디고 산 것이 지금까지 온 것이다. 불교가 뭔지, 출가가 뭔지도 모르고 출가했다. 그저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는 그 문구 하나가 잡아끈 것이다.”
    출가 후에도 집안 반대가 줄어들지 않았을 것 같다. “6남매 중에 맏딸이었다. 집으로 데려가려고 동생들이 매일같이 절로 찾아왔다. 있을 수가 없었다. 노스님이 6개월 만에 은사스님 계신 평택 절로 보내셨다. 그곳에 있다가 해인사로 공부하러 갔다.” ㆍ해인사에는 비구니 강원이 없었을 텐데.
    “물론 없었다. 비구 스님들이 방에서 공부할 때 비구니들은 마루에 앉아 귀동냥했다. 비구니스님들이 공부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오래 있지 못했다. 은사 스님은 선방에 다녀서 상좌에 크게 관여하지 않으셨지만 노스님 생각은 좀 달랐다. 옛날 스님들은 비구니들이 나가서 글 배우고 공부하는 것을 그리 환영하지 않으셨다. 노스님도 내가 당신 시봉하고 살길 바라셨다. 그런데 공부한다니 노스님께서는 좀 못마땅하셨을 것이다.” ㆍ동학사로 향한 이유도 노스님 때문이었나.
    “노스님이 해인사로 하루가 멀다고 편지를 써 보내셨다. 노스님 시봉하라는데 말도 안 듣고 해인사로 갔으니 쫓아내라는 내용이었다. 하는 수 없이 노스님에게 돌아가 3개월간 열심히 시봉 했다. 그리고 다시 동학사로 가려는데 돈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강원이 입학금하고 식대를 받았다. 차비도 없고 돈도 없으니 하는 수 없이 부친에게 돈을 얻어 동학사로 갔다. 65년 7월이었다. 그때는 비구니 강원으로 동학사가 가장 유명했다.” 동학사강원은 당대 대강백 경봉용국(1885~1969) 스님을 모시고 1956년 문을 열었다. 조계종 최초의 비구니 강원이었다. 종단 최초로 비구니 명사 법계를 받은 세주묘엄(1931~2011) 스님이 첫 비구니 강사로 동학사 강단에 섰고 법계명성 스님도 동학사서 사교를 마쳤다. 경을 배우고자 했으니 동학사로 향한 것은 당연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컸다. ‘이런 것을 먹고도 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궁색했다. 대중도 100여명에 달해 살림은 더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게 걸림돌이 되진 못했다. ‘화엄경’뿐 아니라 더 많은 경전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공양은 거칠어도 경을 보니 마냥 좋았다. 부처님께서 일생에 걸쳐 가르치신 내용을 다 보겠다는 결심이 더 단단해졌다. 출가라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것이구나 싶었다. 늦게 출가해 ‘늦깎이’ 소리도 들었지만 출가 전 책을 보았던 것도 경을 이해하고 공부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스님이 되지 않았다면, 부처님 법을 만나지 않았으며 이 거대한 세계 학문이라면 학문이고 철학이라면 철학,종교라면 종교인 이것을 알 수 있었을까 싶다.” 지금도 일초 스님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현실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동학사강원 2년 만에 사달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어느 날 갑자기 소임자 스님들이 절을 떠나버린 것이다. 당시 동학사에서는 요사채인 육화료 불사가 한창이었는데 불사 도중 사기를 당해 절이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소임을 맡고 있던 스님들이 뿔뿔이 떠나고 학인들만 남았다. 눈치 빠른 대교, 사교반 학인들도 곧이어 짐을 쌌다. 순식간에 동학사엔 사집반과 물정 모르는 치문반 학인들만 남게 됐다. 길이 없어 보였다.
    일초 스님은 지금도 경을 보는 것이 즐겁다. “출가하지 않았다면
    이 거대한 세계를 알 수 있었을까 싶다”는 스님은 경을 볼 때마다
    행복하다.
    ㆍ텅 빈 동학사에서 소임을 맡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에는 우리도 떠날 생각이었다. 당시 호경기환(1904~1987) 스님이 남양주 흥국사서 비구스님들에게 강을 펴고 계셨다. 그 스님께 우리도 좀 가르쳐 주십사 부탁하고 허락을 받아 그쪽으로 갈 계획이었다. 짐을 싸고 있는데 아랫반인 치문반 학인들이 문제였다. ‘형님들은 갈 데 있어 가지만 우리는 어떡하느냐’ 하소연을 하며 우리를 붙들었다. 다시 모여 회의를 했다. 다 떠나고 사집반이라고 모여 봤자 8명 남짓이었다. 아랫반을 두고 갈 수도 없고 이렇게 떠나면 동학사 강맥이 끊어지는 것도 걱정이었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호경 스님을 이리로 모셔오자는 것이었다. 그때 떠나기로 했다면 아마도 동학사강원은 문을 닫았을 것이다. 하지만 호경 스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끄떡도 안하셨다. 그곳에 계신 비구 스님 한 분에게‘노스님을 모실 수 있도록 도와 달라’ 부탁을 하며 돈을 모어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한 대 사서 드렸다. ‘우리가 스님을 정말 잘 모시겠으니 동학사로 오시라’고 청하며 공주서 남양주를 50여 차례 오갔다. 결국 모셔왔다.” ㆍ강사 스님을 모시기는 했지만, 동학사 형편은 여전히 어렵지 않았나.
    “막상 호경 스님을 모시고 보니 이번에는 주지 소임을 살 스님이 없었다. 남은 학인 20여 명이 사방으로 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주지 살아 달라고 부탁했다. 주지만 살아주면 우리가 최선을 다해 모시겠다고 해도 아무도 오겠다는 분이 없었다. 그때 동학사 관음암에 옥봉(1913~2010) 스님이 계셨다. 옥봉 스님은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는데 해방 후 출가하셨다. 찾아가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할 테니 소임을 살아 달라’ 부탁했다. 그런데 스님은 ‘나는 살아주고 싶어도 나랑 같이 소임 살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앞뒤 가릴 것도 없이 ‘저희가 하겠다’ 대답하고 스님을 모셔왔다. 그런데 호경 스님이 소임자로 나를 추천하신 것이다. ‘일초가 살림을 하면 잘 살 것’이라 하신 통에 그때부터 재무 소임을 맡게 됐다.” ㆍ빚더미에 앉은 절 소임 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때는 정말 형편이 어려웠다. 불사한 사람들에게 공사비를 못 줬으니 빚이 엄청나게 많았다.
    빚이 250만 원가량이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2억 원보다도 큰돈이었다. 2만5000원을 갖고 한 달 동안 동학사 식구들이 먹고살았으니 얼마나 큰돈인가. 돈을 못 갚고 이자를 줘야하니 매일같이 돈을 받으러 왔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호경 스님 모시고 난 후 학인들이 좀 모였는데 그때는 학인들에게 식대를 받았다. 그 식대로 빚을 갚았다. 식대가 한 철(3달)에 쌀 두 말값이었다. 그 돈으로 빚 갚으면 먹을 게 없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면 공양 소임자가 방문 앞에서 ‘재무스님, 쌀 없습니다’ 한다. 예전에는 숭모전 제사를 우리가 지냈는데 숭모전 제사를 지내면 스님들 인원에 맞춰 하루 한 되씩 쌀을 주었다. 숭모전 제사를 3일간 지내고 쌀을 받으면 몇 가마 됐다. 그 관리를 도맡아 하는 이가 학봉리에 살았는데 쌀이 없으면 새벽같이 그 사람을 찾아갔다. ‘우리가 숭모전 제 지낼 때 갚을 테니 쌀 좀 꿔 달라.’ 그렇게 쌀을 얻어다 죽을 쒀 먹었다. 그렇게 살았다.” ㆍ재무 소임을 얼마간 했나.
    “한 철 살고 나니 너무 힘들고 공부도 못하겠어서 ‘나 이제 재무 못 살아요’ 하고 다른 사람에게 소임을 넘겼다. 그랬더니 그다음 철에 주지스님이 ‘나도 주지 못 살겠다’ 했다. 그러면서 ‘일초가 재무를 살면 살겠다’는 거다. 옥봉 스님이 2년간 주지를 맡았는데 그동안 내가 한 철 재무 살고 다음 철에 다른 사람이 재무 살고,그다음 철에 또 내가 살고 해서 4번을 재무 소임을 살았다. 한 철 살고는 못 살겠다고 내놓고 그러면 다음 철에 주지가 나도 주지 못 살겠다고 내놓고 이랬다. 2년이 지나고 나서야 좀 기반이 잡혔다. 그때 옥봉 스님이 갖고 있던 작품을 내다 팔아 지금 동학사의 종각 불사를 했다.” ㆍ강의는 언제부터 했나.
    “그렇게 살다 보니 71년 대교를 마쳤다. 대교 마치기 전부터 아랫반은 가르쳤다. 대교 때부터 1~3학년은 내가 가르치고 대교반만 호경 스님이 가르쳤다. 77년 4월 10일에 호경 스님이 나를 포함해 4명에게 전강을 하셨다. 그 전에는 부교수였는데 전강 받은 후로는 대교반도 가르쳤다.” ㆍ공부하려고 동학사 갔는데 공부하며 재무 소임 살고, 쌀 꾸러 다니며 중강 맡아 학인들도 가르쳐야 했다. 하루를 어떻게 살았는가.
    “(웃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면 당장 동학사강원이 없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갈 생각도 못 해봤다. ‘내가 동학사에 빚을 많이 지었나’ 생각도 들었다. 사실 운문사로 가려고 사교 배우다 도망간 적도 있다. 그런데 운문사 가서 하룻밤을 자보니 못 있겠더라. 당시만 해도 운문사는 황량한 들판이었다. 전각도 몇 개 없는 도량에 바람이 ‘휘’ 부니 동학사가 걱정됐다. 밤새 잠을 못 자고 다음날 그냥 왔다. 청암사도 가봤는데, 내가 간 날 폐강했다. 그래서 못 있고 다시 돌아왔다. 그때부터는 열심히 살았다. 전강 받고 정식 강사가 되고부터는 더 열심히 살았다.” 아침 글공부를 마치면 동학사 입구 박정자삼거리로 나가 16인승 미니버스 첫차를 탔다. 유성으로 부식을 사러 가기 위해서다. 유성까지 가서 시장을 보고 동학사로 오려면 그 버스를 다시 타야 했다. 하지만 옛날 버스는 출발 시각과 상관없이 버스에 승객이 다 차야 움직였다. 어떤 날은 밤이 되어서야 동학사 입구로 돌아왔다. 그런 날은 하릴없이 종일 굶었다. “그때는 스님이 식당 가서 음식 사 먹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새벽 장 보러 다니며 온종일 굶기가 다반사였다. 그때 얻은 위장병이 지금까지도 스님을 괴롭힌다. 결국, 폐까지 문제가 생기는 지경에 이르자 옥봉 스님이 먼저 나섰다. “이러다 내가 너를 죽이겠다”며 주지 소임을 내놓았다. 덕분에 일초 스님도 재무 소임을 벗었다. 그렇게 대교를 졸업하고 강의에 진력했다. 스님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는지도 모른다. 종일 강의를 해도 힘든 줄 몰랐다. 그런 스님도 딱 한 번 발길 돌린 적 있다. ‘진속일여’라는 ‘기신론’ 한 대목에 잡혔다. ‘진속일여’를 체험하지 않고는 더 이상 강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내원사 선방으로 향했다. ‘ 화엄경’ 한 구절 잡고 출가의 일대사인연 맺었듯 2년을 ‘진속일여’와 씨름했다. 마침내 빗장을 풀었을 때 다시 동학사로 돌아왔다. 동학사엔 아직도 할 일이 태산이었다. ㆍ선방에 남지 않고 왜 다시 강단으로 돌아왔나
    . “당시만 해도 강을 펼 비구니 스님들이 많지 않았다. 참선은 혼자 해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학인들에게 강을 해야 했다.”
    주지 소임을 맡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이렇게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84년부터 동학사 학장을 맡았다. 동학사의 가장 큰 숙제는 불사였다. 동학사가 우리나라서 제일 역사 깊은 비구니강원인데 요사채 하나에 법당,종각,산신각밖에 없었다. 86년에 주지였던 봉민 스님에게 ‘주지시켜 달라’ 부탁했다. 그때는 전임 주지가 후임 주지를 추천했기 때문이다. 내가 동학사 학장이 된 후 주지가 6명이나 바뀌었는데 아무도 학인들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학인들이 먹고 자고 강의하기를 방 한 칸서 했다. 치문반 배우고 나면 그다음 반이 들어와 배웠다. 주지스님들이 학인들 위해 강당 하나 안 지어주는데 이렇게 해서 어떻게 살겠나 싶었다. 그때 벌써 운문사는 명성 스님이 가람을 넓히며 대단히 변화하고 있었다. 동학사강원만 답보 상태였다. 그래서 주지 한번 시켜 달라 자청한 것이다. 봉민 스님이 주지로 추천해 줘 소임 맡은 날부터 일을 시작했다.” ㆍ불사하는 과정에 에피소드도 많았을 것 같다.
    “4년간 계곡 주변으로 담쌓고, 옛 건물 넓히고, 조실채 짓고 등등해서 전각 11채를 지었다. 그 4년간 남에게 10원도 시주받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지었는지 모르겠다. 대신 전부 다 직접 공사를 했다. 총무 살던 성택 스님이 불사에 경험이 있었다. 인천까지 가서 나무 사 오고 목수 불러다 하루씩 일당 주고 일을 시켰다. 한 곳에 하청을 주면 쉽지만 돈이 없으니 하는 수 없었다. 설이나 추석이 되면 나는 도망갔다. 인부들 돈을 줘야 하는데 조금씩은 줄 수 있어도 한꺼번에 목돈 줄 형편은 안 되니 며칠씩 숨어있다 오곤 했다. 그래도 목수를 잘 만나 성의를 다해주었다. 그렇게 불사해 놓고는 주지를 내놨다. 주지는 살 일이 아니더라. 처음 주지 맡고 3년간은 누가 ‘주지스님’하면 젊은 나이에 ‘주지’ 소리 듣기 민망해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데 한 4년쯤 되니까 내 마음속에서 부자가 오면 더 반기더라.중노릇 망치는구나 싶었다. 어떻게 출가를 했는데 내가 왜 출가를 했는데…. 안 되겠다 싶어 주지 소임 내놓았다. 그 자리는 나와 맞지 않았다.” 호경 스님을 강주로 청할 때만 해도 여기까지 오리라 상상못 했을 터다. 일본으로 유학하고 유식학에도 정통했던 당대 대강백을 모시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형편 어려운 것은 걱정도 안 해봤다.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주지 소임 맡을 때도 두려움이 없었다. 학인들에게 좀 더 좋은 여건 만들어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는 한걸음에 강단으로 돌아왔다. 출가의 걸음 그랬듯 흔들림 없는 그 굳건함이 문필봉 단단한 바위를 닮았다. 주지 한 만기에 동학사강원 일신 강당 등 11채 불사로 위상 높여 ‘부자 반기는 마음’에 주지 놓아 원전 지도 4년 과정 빈틈없지만 “돌아보면 학인들이 나의 스승” “시주 받은 무게 중히 여기고 나로 인해 세상에 기쁨 되는 출가자 되길” 제자들에 당부 ㆍ늘 강사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학인들이 너무 말을 안 들으면 농담처럼 ‘너도 이다음에 꼭 강사 되라’ 한다. 강원 강사는 학인들과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생활하며 가르친다. 먹고 자고 공부하는 중에 하나만 흐트러져도 학인들 눈에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면 대번에 강사도 별것 아닌 게 된다. 하지만 이런 엄격함이 오히려 나를 ‘승(僧)’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ㆍ그런 자리가 버거울 때도 있지 않나.
    “글 가르치고 공부할 때는 신나서 모른다. 하나라도 더 연구해서 가르쳐야겠다는 생각뿐이다. 강의 듣고 눈이 반짝거리면 그게 최고의 기쁨이었다. 다만 학인들 생각이 교칙과 부딪힐 때는 고민이 된다. 퇴학을 시켜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반성하고 돌아오는 이를 어떻게 내치겠는가. 어떻게 해서든 거둬야 한다. 대중 공사를 할 때도 퇴학만은 막고자 노력한다. 벌칙을 줄 때도 있다. 그래놓고는 뒤로 가서 묻는다. ‘네가 나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럴 때 깨닫고 순응하면 그나마 좋다. 그러지 못하면, 그때는 참아야 한다. 그렇게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순응하고 찾아와서 죄송하다고 한다. 이런 과정이 어렵다. 큰방에서 입으로는 내쫓는다고 하지만 뒤로 와서는 어떻게 안 내쫓고 공부시킬까 궁리한다. 가난한 것, 공부 가르치는 것 그런 것은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이 다 나의 스승이었구나 싶다. 그들이 없었으면 내가 오늘날 승으로서 어떤 모습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내 스승이다.” 동학사 공부는 팍팍하기로 유명하다. 일초 스님 고집 덕이다. 모든 경전 원전으로 배우니 그 자체도 버겁지만, 진도도 느리다. 4년 교육과정에 바늘 꽂을 틈이 없다. 학기가 끝나도 과목이 끝나지 않으면 졸업은 물 건너간다. ‘ 이만큼 공부해 와라’ 했는데 머뭇거리면 그날 진도는 끝이다. 정해진 학제도 서슬 퍼런 일초 스님 원칙 앞에서 예외가 없다. 다른 것 몰라도 공부에는 변칙이 용납 안 된다. 오죽하면 ‘신통방통 발기통’이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전날 공부한 것 다음날 점검하는데 학인들 번호 적힌 ‘발기통’이라는 산통에서 무작위로 뽑아 발표시킨다. 그런데 그 발기통 어찌나 용한지 꼭 복습 안한 학인 번호 뽑아낸다. ‘신통방통 발기통’이라는 찬탄 속에는 공부 않고서는 빠져나갈 구멍 없는 학인들의 절박함이 담겨있다. 요즘 시대에 왜 굳이 한문을 고집하는가 볼멘소리도 있다. 하지만 일초 스님 생각은 다르다. 뜻글자인 한문 경전은 보는 견해에 따라 무한히 캐낼 수 있는 보석 같기 때문이다. 소리글자인 우리말 경전에 하나의 단어로만 설명한 구절도 한문 경전으로 보면 샘물 보듯 뜻이 나오고 또 나올 수 있다. 학인 때 원전 보며 더 깊게 고민할 기회를 만나게 해주고 싶은 스님의 제자 사랑 방식이다.
    더 없이 엄격한 스승이지만 제자들은 ‘소녀 같은 순수한 면을 지닌 스님’으로도 기억한다.
    ㆍ제자가 1000여 명은 된다. 졸업생들에게 잊지 말도록 당부하는 말은 무엇인가.
    “역대 많은 조사가 있지만 오직 석가모니부처님 한 분만을 부처님이라 하는 이유는 석가모니부처님만이 깨달음을 얻고 맨발로 인도를 일곱 바퀴 반 돌며 45년 이라는 세월, 중생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분이 부처다. 이 세상에 어느 중생이 어떤 생명이 나 아닌 타를 위해 그 많은 세월을 보냈는가. 그 세월 부처님은 걸음 사이사이 법을 펴며 사람들을 돌보았다. 그렇기에 부처님은 오직 한 분이다. 누군가가 또 그렇게 한다면 그분도 부처일 것이다. 우리 심성이 다 부처이지만 실제 삶에서는 중생을 그만큼 사랑할 수 없으니 부처 되기가 어렵다. 제자들 또한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출가자가 되길 바란다. 나 하나 세상에 있음으로써 많은 사람이 기뻐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ㆍ강사는 어떤 사람인가.
    “나보다 제자를 더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강사다. 나는 한 번도 강의를 빼먹어 본적이 없다.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그 시간에 강의한다. 내가 강의를 안 하면 20명 30명이 하루를 그냥 보내버린다. 90년대까지 수덕사를 가본 적이 없다. 예전 강원은 보름에 하루씩만 쉬었다. 한 달에 두 번만 쉬는데 그 이틀 쉬는 날에는 꼭 다른 데서 강의 의뢰가 들어온다. 그래서 돌아다녀 본 적이 없다. 지금도 어디 잘 못 돌아다닌다.” ㆍ종단 교육사에서 비구니 강원의 역할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예전에는 비구니들이 전부 비구, 대처 스님들에게서 경을 배웠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비구니강원은 일찍 학제를 정비하고 통일했다. ‘비구니교우회’에서 회칙을 정하고 학칙과 과제를 정했다. 그중 동학사 학제나 이력 등 상당수가 여러 비구니강원의 기준이 됐다. 묘엄 스님과 명성 스님 등 비구니 대강백들이 일찍부터 동학사를 거치셨기 때문이다. 비구 강원이 정립되기 이전부터 비구니강원은 체계적인 교육을 했다. 종단 교육 체계의 기준이 됐다고도 할 수 있다.” ㆍ선방 수좌에 비해 교학스님들을 낮춰 보는 분위기가 아직도 없지 않다.
    “부처님의 마음은 선이요, 말씀은 교라고 하지만 나는 교를 보지 않고 참선하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 현재 가진 소견에서 좀 더 높은 경계를 체험하려면 시야가 달라져야 한다. 높은 경계에 올라갔을 때 달라지는 시야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경전이 아니면 찾을 수가 없다. 지금 보는 그것, 그 견해가 맞는지 틀리는지도 경전이 아니면 확인할 수 없다. 자기가 체험한 것만 갖고는 알 수 없다. 경전을 보면 이렇게 공부했을 때 이런 경지가 오고 어떤 것이 마장이고 어느 것이 진짜다가 명확히 나온다. 그래서 예전에는 참선하던 스님들도 경계에 막히면 강원에 왔다. 참선하는 스님 중에 글 못 읽는 분들도 있었지만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물었다. 그러면 강사들이 경전을 설명해 주었다. 그런 일이 당연했다. 예전에는 여자를 가르치는 일이 적었고 절에서도 은사스님들이 공부하라고 내보내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러니 비구니스님들 사이에서도 무조건 앉아서 참선하라고 하곤 했다. 하지만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했다. 교를 배우고 참선을 해야 한다. 배우고 버리는 것이다. 무조건 앉아서 참선하는 것이 아니다. 선이 수승하고 교가 낮다는 것은 후대의 말이다. 지금도 대흥사 조사전에 가면 한쪽 벽에는 강사, 한쪽 벽에는 선사 진영이 마주 보고 봉안돼 있다. ‘금강경오가해’를 쓴 분들이 전부 선사인데 이들이 전부 유명한 강사이기도 했다. 즉 교를 완전히 습득한 후에 참선했다는 것이다. 교를 습득하지 않고는 참선이 쉽지 않다.” ㆍ종단 안에서 비구니스님들의 역할, 역량은 여전히 아쉬움이 크다.
    “부처님 당시 정해진 율을 갖고 비구니스님들의 역할을 제약하고 있는데 그것은 율을 잘못 해석한 것으로 생각한다. 출가자가 율을 버릴 수는 없다. 하지만 ‘서장’ 같은 것을 보아도 깨달은 여인들이 많이 나온다. 부처님 당시에도 깨달은 여성이 많았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것은 인도와 중국,우리나라의 여인에 대한 비하 풍토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밝히고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이제 우리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가르칠 수 있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남이 뭐라 하던 자긍심을 지닐 수 있다. 예전에는 비록 비구스님들에게 배웠지만,그때에도 우리는 스스로 배우고자 했고 배워서 후학에 전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도 많은 인재가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비록 종단 안에서 비구니스님들의 자리는 낮지만, 비구니가 폄하 받을 이유는 전혀 없다.” ㆍ이제 막 출가한 스님들에게 당부할 말은.
    “처음 출가했을 때 노스님이 말씀하셨다. ‘쌀 한 톨 시궁창에 들어가면 그 죄를 사해주기 위해 제석천왕이 일주일을 서서 기도 한다. 쌀 한 톨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농부의 땀이 들어갔고 옷 한 벌 입는데 얼마나 많은 직녀의 노력이 들어갔는지 잊지 말라’ 하시며 ‘공부 안 하면 이 빚을 짊어지고 가 다음 생에 소가 돼서 그 집 가 일 해줘야 한다’고도 하셨다. 그래서 얼마나 물자를 아꼈는지 모른다. 시줏물 무섭고 어렵다는 것을 우선 말해주고 싶다. 또 하나 ‘밥 먹는 중은 되지 말라’고 한다. 얼마 전 한 제자가 사찰을 창건하고 나서‘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 모르겠다’ 묻기에 ‘절대 시주자에게 마음을 낮추지 말라’고 했다. 시주를 바라는 마음으로 비굴해지지 말라는 뜻이다. 먹으면 얼마나 먹고 입으면 얼마나 입겠는가. 비굴해지는 마음은 내가 저 사람으로 인해 이익을 얻거나 편리를 얻겠다는 마음에서 나온다. 나는 다만 저들에게 법을 전해주겠다는 생각을 하면 옳게 사는 것이다. 나 자신의 원칙이기도 하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며 대중에게 당부하시길 ‘출가자가 출가자의 삶을 열심히 살지 못하면 속인의 복락도 버리고 출가자의 복락도 버리는 것’이라고 하셨다. 둘을 함께 버리면 안 되지 않겠나.” ㆍ어떨 때 보람을 느끼는가
    . “수없이 많지만 어느 분야에서든 내가 가르치는 제자가 두드러지고 무엇인가 하는 모습을 볼 때다. 어떤 스님에게 ‘어떻게 이렇게 좋은 삶을 살게 되었는가?’ 물었을 때 ‘우리 스승은 일초 스님이었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면 더 없는 보람이다.” ㆍ어떤 강사로 기억되고 싶은가.
    “‘제자를 사랑했다’라고만 기억되는 강사는 싫다. 제자들이 살아가는 동안 의미를 주는 강사가 되고 싶다. 살면서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 ‘우리 스님은 이렇게 하라고 했다’고 떠올리는 강사가 되고 싶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남녀 간의 사랑,부모자식 간의 사랑,그리고 스승제자 간의 사랑 등등. 그 모든 것이 다 사랑이지만 표현 방법 모두 다르다. 소설책 몰래 읽다 들킨 학인에게 일초 스님은 겨울밤 개울물 길어 언덕에 미끄럼틀 만드는 벌을 내렸다. 그리고 다음 날 학인들 모두 불러 온종일 함께 얼음미끄럼을 타고 놀았다. 이것이 일초 스님의 사랑이다. 동학사승가대학서 지금도 서예와 사군자를 배우고 시를 짓는 것도 “공부 제일 열심히 하고 놀 때 제일 멋있게 놀자”는 일초 스님의 사랑이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묵직하지만 언제나 변함없이 든든한 중심.동학사를 굽어보는 문필봉처럼 그 묵묵한 스승 아래서 경 읽는 소리 계곡 물 따라 60년 흘렀다. 한 번도 그침 없는 물길처럼,한 번도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일초 스님 바람 또한 그 하나다.
    내가 본 일초 스님
    
    변화 두려워 않는 학자…엄격함 속 소녀 같은 면도
    
    상좌 혜종 스님 담양 영은사 주지 : 학인들 공부에 있어서는 예외가 없다. 
    언제나 학인들에게 가장 먼저 물어보는 것이 ‘공부했는가’다. 
    그 질문에 답하기가 가장 어렵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그 말씀을 더욱 떠올리게 된다. 
    공부 열심히 하는 이에게는 한 없이 자비롭다. 
    공부할 때는 더렵고 엄한 스승이지만 ‘출가의 본분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스님의 원칙을 이해하면 스님의 엄격함이 더없는 자비임을 알 수 있다.
    소녀 같은 면도 있다. 자연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시는 모습을 볼 때면 더 없이 순수한 소녀 같다. 
    
    이평래 전 한국불교학회장 : 1982년 처음으로 동학사강원에서 ‘인도불교사’ 강의를 했다.
    강원 외래강사로서는 내가 처음이었는데 일초 스님의 요청이었다. 
    출가자였지만 일초 스님은 당대의 엘리트여성이었고 실력 또한 출중했다. 
    단순히 경전을 풀이하는 것 뿐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깊은 뜻을 짚어내는 혜안이 놀라웠다. 
    한문 원전 실력도 좋지만 새로운 학문과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다. 
    학인들의 졸업 여행으로 인도순례를 허락할 정도로 앞서가는 안목을 지닌 분이다. 
    강의를 끝내고 함께 차 한 잔 마실 때면 같은 교육자의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 출재가의 거리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대화가 잘 통했다. 
    
    강자옥 전 불교약사회 총무 : 29세에 초음 불교를 접하며 스님에게 경을 배웠다. 
    그때부터 스님을 은사처럼 여기고 가르침을 받았는데 40년간 한 번도 스님의 흐트러진 모습을 본적이 없다. 
    재가자에게 경전을 지도하실 때도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 
    몸이 편찮으셔도 내색 한 번 안하신다. 
    불자들이 생각하는 스님,‘스님이란 이런 분이다’라고 할 때 그 모습 그대로인 분이다. 
    스님에게 경전을 배우는 것도 좋지만 스님의 모습을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 그 자체를 보는 것 같아 더욱 신심을 다지게 된다.

    Vol 1332
          남수연 법보신문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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