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M T = ♣ /한국불교 비구니 리더

5 봉녕사승가대학장 도혜 스님

浮萍草 2016. 3. 8. 10:59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은 오롯한 한 길, 그 단단한 출가자의 향기
    봉녕사승가대학장 도혜 스님은 묘엄 스님으로
    부터 이어지고 있는‘출가정신 확립’의 학풍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낭랑한 목소리가 저녁노을 드리운 도량에 울렸다. 독경도 아니고 창도 아니지만 예불문에 이어 ‘천수경’ 구절구절까지, 한 자도 틀림이 없다. 열 살, 상고머리 계집아이의 놀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위의를 갖춘 소리에 툇마루 위 스님은 눈을 떼지 못했다. 그 길로 방에 들어간 스님은 저녁 내내 펜촉에 잉크를 찍어 누런 갱지에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옮겨 적었다. “이걸 하루에 한 쪽씩 외워라.” 상고머리 소녀는 ‘삼촌스님’이 매일 건네주는 갱지 위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따박따박 외워나갔다. 절에 온 지 고작 두 해, 그것이 인천(人天)의 스승 되는 첫 걸음인 줄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 상고머리 아이는 그로부터 몇 년 후 삭발득도했다. 단 한 번도 ‘다른 길’에 눈 돌려보지 않은,오직 하나. 봉녕사승가대학장 영묘도혜(靈苗峹慧) 스님에게 출가수행은 한생을 가득 채우며 걸어온 단 하나의 길이다. 그리고 지금 스님은 그 길 위 첫 발을 내딛는 수많은 후학들의 손을 이끌어 주고 있다. ‘삼촌스님’ 엄격한 지도로 행자생활 ‘서릿발 수행’ 석남사서 첫 강원 행 첫 스승 묘엄 스님에게 공부 기초 명성 스님 부임 후 시험서 1등 운문사 가장 나이어린 중강돼 초등중퇴 학력에 소통 어려움 부전살이 전전하며 서울서 독학 세주묘엄(1931~2011) 스님의 향훈이 깊게 배어있는 수원 봉녕사와 봉녕사승가대학은 우리나라 불교사에 깊은 족적을 남겨왔다. 한국불교역사 최초로 전강을 받고 강단에 선 비구니 묘엄 스님이 이곳에 강원을 연 이후 수많은 비구니 스님들이 이곳 봉녕사에서 출가자의 단단한 심지를 키웠기 때문이다. 묘엄 스님 열반5년,스님이 남긴 비구니교육의 대원력을 이어 봉녕사승가대학 강단을 지키는 도혜 스님은 “태산과도 같으셨던 스님”이 세운 봉녕사 학풍을 단단히 떠받치는 기둥이다. 작고 단정한 체구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올까. ‘부처님의 가르침이 향기같이,노을같이 온 우주법계 가득하길’ 염원하는 향하당 차실에서 듣는 스님의 이야기는 60여년 전, 노을빛 퍼져나가던 도량에서부터 시작됐다. 삼촌스님은 가사편수장이었다. 법명은 성안, 후일 법장으로 법명을 바꾸었지만 지금도 ‘가사편수 성안 스님’을 기억하는 노스님들이 많다.
    도혜 스님 속가 부친의 동생이었던 성안 스님은 촌수로는 삼촌,그래서 도혜 스님은 어린 시절 성안 스님을 ‘삼촌스님’이라 불렀다. 성안 스님은 병환을 앓던 속가 형님이 세연을 접자 사십구재를 위해 절에 온 9살 조카를 절에서 키우기로 했다. 할머니가 손녀를 돌보기 위해 함께 절로 오셨다. 이런 형편을 알리 없으니 삼촌스님과 할머니의 보살핌 속 도혜 스님의 어린 시절은 큰 어려움 없이 그렇게 흘러갔다. 성안 스님께서 처음부터 출가시킬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처음에는 어린 나를 3년 정도만 키워 줄 작정이셨다. 위로 언니가 있었는데 비구 스님 절에서 크기에는 나이가 찬 상태여서 어린 내가 절에 남게 됐다. ‘절에서 한 일주일만 놀다 가라’ 하셔서 처음에는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출가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딱히 결심을 했던 것은 아니다. 마당서 염불하며 노는 나를 삼촌스님이 한참 동안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그날부터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라 시키셨다. 그길로 행자생활이 시작된 셈이었다. 틀에 찍어낸 듯 정확했던 성안 스님은 내 공부 또한 틀에 찍어낸 듯 빈틈없으셨다. 새벽예불부터 절집의 하루 일과를 다 마치고 나면 저녁예불 후에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주로 옛날 스님들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물이 들었던 것 같다. ‘ 스님 되라’ 말씀 한 마디 없으셨지만 크면 으레 스님이 되는 것으로 알았다. 그리고 왠지는 모르지만 승복이 너무 좋아보였다.” 하지만 열 살 어린 행자라고 행자살이가 녹록할리 없다. 새벽 예불은 특히 고역이었다. 가뜩이나 잠이 많을 나이,도량석 때까지는 모른 척 봐주던 할머니도 종을 치면 여지없이 일으켜 깨웠다. “종 칠 때까지 자면 소 된다”는 말씀과 함께. 그래서 그 후로도 오랫동안 종소리가 싫었다. 15살이 되자 석남사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수계까지는 1년이 더 걸렸다. 딱히 정해진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큰스님 오시는 날’이 계 받는 날이었다. 따로 스님을 모셔 축발하고 계 받을 만큼 형편이 넉넉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어느 날 ‘큰스님 오신다’ 하면 그날 바로 계를 받기가 일쑤였다. 도혜 스님도 자운 스님(1911~1992)이 석남사에 오신 날 비로소 사미니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야 그렇게 좋아하던 헌 승복을 입었다. “행자에게 새 옷 해주면 복이 줄어든다”는 절 집안 풍습대로 어른 스님들이 입던 낡은 장삼이 스님 몫이 되었다. 은사 스님은 어떤 분이셨나.
    “당시 석남사에는 인홍 노스님이 계셨다. 그 아래로 상좌스님들이 계셨지만 대부분 30대의 젊은 스님들이어서 상좌를 둘 만한 스님이 없었다. 더구나 나처럼 어린 상좌를 두면 공부도 시켜야 하고 손 갈 일이 많다. 나를 상좌 삼겠다는 스님이 없었다. 그런데 묘경 스님께서 은사를 자청해주셨다. 은사스님은 세납으로도 어머니뻘이었지만 말할 수 없이 자비로운 분이었다. 어린 나이에 속가를 떠나 낳아주신 어머니께 받지 못했던 사랑을 은사 스님께 받았다.” 당시 석남사는 서슬 퍼런 수행 기강으로 유명했다.
    “수행기강도 대단했지만 운력도 많아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석남사 인홍 노스님은 ‘가지산 호랑이’로 불리셨다. 성철 스님의 수행기강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때마침 노스님께서 한창 불사를 진행하실 때였다. 건물을 11채나 한꺼번에 짓느라 대목 100여명, 일꾼 100여명이 도량에 상주했다. 그 일꾼들 식사에 새참까지 하루 다섯 번의 공양을 대중스님들이 다 했다. 일이 많으니 선객들도 발길을 돌리고 본방 대중들만 남았다. 겨우 20여명 남짓이다 보니 다들 소임을 몇 가지씩 맡아야 했다. 나도 소임을 네 가지나 맡은 데다 제일 어렸으니 스님들 심부름도 온통 내 차지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밥 먹을 시간도 없는 모습이 딱했는지 우리 은사스님께서는 내 빨래까지 손수 해주시곤 했다. 채공 살 때는 솜씨 없는 내가 실수라도 할까봐 전날 밤에 채소를 다 다듬어 솥에 넣어주셨다. 그러면 다음날 새벽 나는 솥에 물을 부어 끓이기만 하면 됐다.” 새벽예불을 마치고 나면 해가 떨어질 때까지 숨 고를 틈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불사비용을 아끼기 위해 기술자를 써야 될 일이 아니라면 대중이 울력을 했다. 대목이 기둥을 세우면 그 사이에 흙벽을 바를 수 있도록 대나무를 쪼개 살을 엮어 끼우는 일에 스님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벽에 바를 흙을 캐다 짚과 섞어 버무리는 일, 심지어는 기와 밑에 들어갈 흙을 지붕 위까지 옮기는 일도 스님들이 도맡았다. 한 줄로 서 손에서 손으로 흙덩이를 옮길 때면 지붕으로 올라가는 사다리 위나 아예 지붕 위로 올라가 흙을 펴는 일은 가장 나이 어리고 몸이 가벼운 도혜 스님 몫이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안 해 본 일이 없다”고 손사래를 치는 도혜 스님이 애타게 강원을 바랐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992년 도혜(사진 오른쪽 끝) 스님은 묘엄(사진 가운데 앞) 스님의 첫 전강제자가 됐다.
    운문사 강원에 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당시 석남사는 강원 공부를 시키는 일이 없었다. 사미니들을 강원에 보내지 않고 바로 선방에 앉혔다. 강원 간 사미니는 내가 처음이었다. 다각 소임을 살았는데 오가며 들은 어른스님들 말씀이 ‘도혜는 너무 어려서 바로 (선방에) 앉히기 이르니 강원에 보내야 되지 않겠나’ 하시며 ‘묘엄 스님이 운문사로 오시면 그리로 보내자’ 하셨다. 그때까지는 묘엄 스님이 누군지도 몰랐는데 그 말씀을 듣고, 보도 듣도 못한 묘엄 스님이 강사로 오시기를 부처님 전에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꼬박 1년을 기도하고서 봄에 묘엄 스님이 운문사에 오셨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해 가을 바로 운문사로 갔다. 1966년이다.” 그렇게 기다리던 묘엄 스님의 첫 인상은 어땠나
    . “그때는 어른스님 얼굴을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얼굴도 모르는 묘엄 스님이 무작정 좋긴 했어도 어른스님을 바라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원래 숫기 없는 성격이라 학인 때는 스님에게 가깝게 다가가질 못했다. 어린 내 눈에 묘엄 스님은 너무 큰스님이었다.” 이제 막 경을 편 도혜 스님에게 묘엄 스님은 ‘태산과도 같은 스승’이었다. 묘엄 스님의 교육은 엄격했다. 하지만 도혜 스님의 기억 속에는 더없이 자상했던 묘엄 스님의 단면이 선명하다. 강원 입학 첫 해 겨울, 도혜 스님은 큰방부전 소임을 맡았다. 큰방부전이 뭔지도 몰랐지만 ‘왜 아무도 안하나’싶어 자원한 것이다. 날이 점점 추워지자 대웅전에서 올리던 새벽예불을 큰방서 하게 됐다. 목탁이 자연스레 큰방부전에게 맡겨졌다. 석남사에서는 예불 후 능엄주만 독경했다. ‘천수경’ 목탁은 처음이었다. 실수는 당연했다. 아니나 다를까. 예불 후 묘엄 스님 부름에 잔뜩 겁을 먹고 서있는 도혜 스님 앞에 묘엄 스님이 목탁을 내밀었다. “석남사에서는 능엄주만 하니 천수 목탁이 처음이지?” 묘엄 스님은 목탁을 쥔 어린 학인 손 위로 당신 손을 겹쳐 쥐고는 천수 목탁 치는 법을 알려주셨다. 도혜 스님은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며 “엄격함 속에도 자상한 스님이셨다”고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묘엄 스님 슬하에서의 학인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970년 묘엄 스님이 운문사를 떠나셨다. 당시 상황은 어땠나.
    “가을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강사스님이 리어카를 방문 앞에 대시더니 짐을 실었다. 학인대중들에게는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가 3학년 사교반 마지막으로 원각경을 배울 때였다. 그리고는 며칠 만에 강사스님을 비롯해서 주지,소임자에 권속까지 30여명의 스님들이 한꺼번에 운문사를 떠났다. 하루아침에 학인들만 남았다. 학인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제일 윗반이었던 우리가 모여 어른스님들을 찾아뵙기로 했다. 그날 밤 횃불을 들고 산을 넘어 석남사로 갔다. 사정을 말씀드리고는 강사 스님을 모셔달라고 했다. 그러자 인홍 노스님께서 며칠 후 대구 서봉사에서 비구니 중진회의를 소집하셨다. 나중에 듣게 된 얘기로는 ‘비구니 강원에 비구강사를 다시 들일 수는 절대 없다’며 비구니 강사를 추천 받았는데 적임자로 뽑힌 분이 바로 명성 스님이셨다. 서울 청룡사에 계시던 명성 스님이 추천됐다는 말씀을 듣고 우리반 학인들이 서울로 스님을 모시러 갔다. 그때가 내 생전 첫 상경이었다. 그 후로 몇 차례 서울을 오갔고 좀 시간이 흐른 후 명성 스님께서 운문사로 오셨다.” 주지나 강사도 없는 상황에서 학인들 사이에 혼란이 있지 않았나.
    “큰 혼란은 없었다. 처음 묘엄 스님이 떠나신 후에는 좀 당황했지만 어른들이 강사스님을 모셔주겠다고 하셨으므로 믿고 기다렸다. 크게 우왕좌왕하지는 않았다. 다들 어렵게 강원에 온 스님들이었다. 강원 보내는 것을 탐탁치않게 여기시는 어른스님들도 많았고 작은 사찰이나 암자에서는 일손도 부족했기 때문에 강원 보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어려운 문’을 뚫고 강원에 왔는데 상황이 좀 힘들어졌다고 해서 다시 절로 돌아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저 강사스님 오실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묘엄 스님과 명성 스님, 두 분은 어떻게 달랐나
    . “묘엄 스님이 태산 같은 분이어서 엄격하고 감히 다가가기 힘들었다면,명성 스님은 매우 활기 발랄한 느낌이었다. 신여성 같다고 할까. 기존의 학인들과도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셨다. 학인들에게 찬불가도 가르쳐 주셨는데, 묘엄 스님에게 배우던 학인들은 처음에 무척 당혹스럽기도 했다. 우리는 감히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는 것을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타를 치면서 찬불가 부르는 모습은 그야말로 깜짝 놀랄 일이었다. 명성 스님께서는 스님들에게도 신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다. 묘엄 스님은 성철, 청담 스님의 사상 그대로를 강조하셨던 것이고 나 또한 석남사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런 학풍에 대해서는 이질감이 없었다. 그러니 갑작스런 변화가 좀 힘들기는 했다. 하지만 명성 스님은 굉장히 조직적이고 빈틈 없으셨던 분이다. 그렇게 세밀하고 섬세하게 강원을 이끄셨다.” 명성 스님이 몰고 온 ‘새로운 바람’은 도혜 스님에게도 놀라운 변화를 불러왔다. 강사가 부족했던 명성 스님이 ‘공개 시험’을 통해 중강을 뽑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상반 학인들을 대상으로 빽빽하게 문제가 적힌 시험지가 나눠졌다. 명성 스님은 그 시험에서 1등 한 학인을 중강으로 삼겠다고 공표했다. 그 결과 가장 어린 학인 도혜 스님이 당당히 1등을 했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도혜 스님은 생애 처음으로 강단에 서게 됐다. 중강보다 나이 많은 학인들이 수두룩했다. 그 가운데는 고등학교,대학교를 나온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어린 중강에게 이의를 달지 않았다. 시험성적이 증명해주는 실력, 그것이면 족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중강을 겸하는 사이 1972년 도혜 스님은 운문사강원 5회 졸업생이 됐다. 다시 석남사로 돌아왔지만 한 번 불붙은 학구열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강원 졸업 후에도 계속 공부를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아홉 살에 절에 갔으니 초등학교 2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였다. 그때는 교통이 나쁘고 차도 없어서 산중 절에서 학교를 다니는 것이 불가능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명성 스님 오신 후에 중강도 맡았지만 그저 한문을 새기는 정도였다. 뭘 알았겠는가.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무엇인가 가로막히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지금도 이렇게 답답한데 세월이 지나면 더 힘들겠구나 싶었다. 최소 고등학교까지는 졸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홍 스님께서는 허락을 하셨나.
    “요지부동이셨다. 운문사서 중강을 살았으니 석남사에서 학인들에게 ‘치문’을 가르치라하셨다. 나는 말도 못하고 끙끙 앓았다. 가뜩이나 강원에서 공부하느라 몸이 축난 상태였는데 애가 닳아 생병이 난 것이다. 노스님께서 그런 나를 보고 ‘성철 스님에게 허락을 받아오면 공부를 허락해주겠다’고 했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은사스님이 나를 빼돌리셨다. 석남사 아랫마을에 사형님 속가가 있었는데 그리로 미리 짐 보따리를 내려 보낸 후 몰래 차비를 만들어 나를 내보내셨다. 부산 계시던 삼촌스님 절에까지 갈 차비를 받아 부산으로 간 후 그곳에서 다시 서울 갈 차비를 받아 상경했다.” 그렇게 바라던 공부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였으니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초등학교 검정고시부터 시작해야 했다. 혈혈단신, 서울에서 도혜 스님은 부전살이로 숙식을 해결하며 학교를 다녔다. 그나마 그 자리도 못 구할 때는 며칠씩 지낼 곳을 찾아 돌아다녀야 했다. 조석 예불 다 올리고 절집 일을 도맡아 해도 먹고 자는 것 외에 보시라고는 기대할 수도 없는 시절이었다. 도혜 스님은“평생 선객으로 사셨던 은사스님은 그런 상좌를 도와줄 형편이 안 돼 더 애를 태우셨다”며“내가 복이 없어 은사스님이 일찍 열반하셨다”는 스님의 말끝에는 진득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강원 보낸 후에도 방학 때만 되면 “도혜가 언제 오려나”하며 몇 번씩 석남사 담장을 넘겨보시던 은사스님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아끼던 상좌가 대학가는 모습을 끝내 못 보고 세연을 접었다. 우여곡절 끝에 동국대를 졸업하고 국역연수원 2년을 마치자 인연은 자연스럽게 봉녕사강원으로 이어졌다. 당시 봉녕사강원 중강이었던 본각 스님이 일본 유학을 떠나게 돼 새로 중강을 구해야 했다. 강주였던 묘엄 스님이 도혜 스님을 불렀다. 강사가 돼 다시 뵌 묘엄 스님은 더욱 큰 스승이었다. 묘엄 스님은 당신의 모습 그대로를 통해 ‘강사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보여주었다.
    도혜 스님의 강의 모습
    강사가 된 후에는 묘엄 스님과 좀 더 가까워졌나.
    “학인시절 기억처럼 엄하고 어렵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강주스님 또한 나를 어렸을 때부터 보셨기 때문에 잘 알고 믿어주셨다. 제자들에게도 작은 정을 주지 않았지만 넓게 감싸 안아 주는 분이었다. 묵묵히 바라봐 주니 제자들이 더욱 조심하고 화합했다. 마치 거대한 원의 중심 같았다. 중심을 잡아 줌으로써 주변으로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생기고 간혹옆으로 튀어 나간 이라도 중심을 찾아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강주스님께서 보여 주신 모습 그 자체로써 강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었다.” 봉녕사강원의 학풍은 어땠는가.
    “출가자들에게 철저한 승려 정신을 확립하는 데 있다. 지금도 변함이 없다. 묘엄 스님이 세운 원훈이 발심,구도,보은이다. 출가수행자는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발심을 해야 하고 그런 발심을 하면 도를 구해 생사윤회를 벗어나야 하며 그 후에는 구도의 공덕을 부처님과 모든 중생에게 회향을 해야 한다. 그것이 보은이다. 이런 자세를 명확히 확립하는 것이 봉녕사의 학풍이다.” 묘엄 스님의 전강이 비교적 늦게 이뤄진 이유는 무엇인가
    “묘엄 스님의 철저한 성격 때문일 것이다. 제자를 완벽하게 가르쳐 세상에 내놓으시려 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옛날에는 스승 밑에 10년을 공부해야 인정한다는 풍토가 있었다. 묘엄 스님도 당신 밑에서 5년 이상 강을 해야 전강을 해주신다는 원칙이 있었다. 묘엄 스님은 1992년이 돼서야 처음으로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의 제자들에게 전강을 하셨다. 공부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했다.” ‘생사해탈 출가정신’ 확립이 봉녕사승가대학 굳건한 학풍 “행자·학인 때 철저히 익혀야 출가수행 평생 흔들림 없어”
    강사가 된 도혜 스님은 행자와 사미니 교육에 더욱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86년 조계종 7~9회 단일 구족계단 습의사를 시작으로 거의 매년 단일계단 습의사,인례사, 갈마위원, 행자교육원 사감 등으로 행자와 사미니교육의 일선에 섰다. 봉녕사승가대학의 학장이 된 지금도 스님은 1학년 치문반의 수업을 직접 맡는다. 출가자에게는 초발심 시기,즉 행자시절과 첫 교육시기인 강원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한 평생 출가수행의 길에 방향을 제시해주는 승가대학을 도혜 스님은 ‘네비게이션’이라 비유했다. 행자교육, 승가대학교육을 특히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일이 그렇지만 출가자에게는 초보 시절이 가장 중요하다. 이 시기에 승려로서 사상이 명확히 정립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승복만 입고 머리만 깎았을 뿐이지 재가자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출가의 근본 이유는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얻으신 깨달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생사해탈이다. 그러므로 승가의 발심은 생사발심이어야 한다. 생사발심을 해서 해탈하는 것이 수행자로서 가장 큰 목표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것을 목표해 출가했더라도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정신이 흐려질 수 있다. 행자교육 기간 동안 그 정신이 철저히 몸에 스며들면 죽을 때까지 승려로서의 삶에 토대가 된다. 또한 그 궤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 출가 목표에 대한 정신이 굳건하지 않으면 속인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고 그대로 흘러가면 속인보다 더 추해질 수 있다. 속인들은 자식을 낳고 부딪치며 살다보면 속이 상할 때고 있고 그 속에서 마음이 넓어지기도 한다. 자식을 키우는 일도 봉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넓어지는데 출가수행자는 오로지 자신의 수행과 문제만을 생각하며 살다보니 사상이 확립되지 않으면 나중에는 이기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출가의 근본 목표를 놓아버리지 않으려면 처음이 중요하다.” 어린 사미니를 운문사강원으로 보냈던 어른스님들의 뜻도 이 때문이라고 도혜 스님은 확신한다. 강원의 형편이 좋고 나쁜가를 따지기보다는 그곳의 강사가 얼마나 철저한 발심과 출가 정신을 지녔는가를 보고 학인을 보냈기 때문이다. ‘묘엄 스님이 오면 그리로 보내자’는 어른스님들의 말씀은 그런 옛 스님들의 가르침이었다. 논밭이 많고, 불사가 많아 울력이 끊이지 않았던 봉녕사강원에 학인들이 그리 많이 몰렸던 이유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음이다. 그렇기에 지금 봉녕사승가대학장의 중책을 맡은 도혜 스님은 ‘생사해탈의 출가정신’을 거듭 강조한다. 출가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봉녕사승가대학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교육방식이 있나.
    “그것은 부처님 경전 속에 내재돼 있다. 강사는 학인들이 그것을 찾아서 각인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을 업그레이드 하는 시기가 학인이다. 생사발심해서 생사해탈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인데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한 번 깨달아서 바로 여래의 경지에 이른다는 옛 조사스님들처럼은 못하더라도 퇴보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특히 생각을 잘 살펴야 한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한 생각이 먼 미래까지 연결돼 있다. 그러니 자기 생각을 잘 살피고 생각을 잘 단속해야 한다.” 언제부터 경을 보는 것이 좋았나.
    “강의를 하기 위해 경을 깊이 보면서 더욱 좋아졌다. 원래 공부하는 것을 좋아해서 그런지 강의하는 어려움은 느끼지 못했다. 피곤하다가도 기분 좋게 강의를 마치고 나면 피로가 확 풀린다. 내가 스스로 즐거운 것 같다.” 강사로서 유념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요즘은 승가대학 교육이 너무 지식 쪽으로 흐르는 것 같다. 학문에만 치중한다. 우리는 수행자다. 수행을 하려고 출가했고, 모든 것이 수행의 토대가 돼야 한다. 요즘 학인들 중에도 무엇 때문에 출가했는지 목표가 뚜렷하지 않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출가자는 수행으로 얻은 힘으로 중생을 편안하게 해주어야 한다. 중생의 고통을 줄이고 고통스럽지 않은 쪽으로 인도해주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목표와 방향은 명확하다. 그 목표로 가는 길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곳이 승가대학이고 강사의 역할이다. 스스로의 삶을 돌아 볼 수 있도록 일깨워 주어야 한다. 남이 장에 간다고 거름지고 장에 따라가는 출가자를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평생 강단에 서야 하는 강사로서의 삶에 아쉬움은 없는가.
    “불교에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단어가 있다. 상구보리를 하려면 하화중생을 해야 한다. 이는 둘이 아니다. 강사의 삶이 오직 학인을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결국은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다. 경전을 깊이 공부해 보면 그 속에 수행의 내용이 담겨있다. 학인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경전 공부를 깊이 해야 하고 깊이 공부해보면 그 속에서 결국은 깨달음의 경지를 만날 수 있다. 그러니 나 역시 학인들을 가르치고자 경을 보면서 내가 갈 길이 선명해지고, 부처님의 가르침도 깊이 들어오게 된 다. 학인들 위하는 것이 결국 나 자신을 위하는 길이다. 다만 몸이 매이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후학이나 출가자에게 당부할 말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출가한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잘 수행을 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계율을 잘 지키고 십선업을 닦아 올곧은 수행자의 길을 걸어주길 바란다.”

    돌이켜보면 무엇 하나 허투루 보낼 수 없는 인연이었다. 10살 조카에게서 출가의 법기를 알아보고 빈틈없이 행자 교육을 시킨 삼촌스님만이 아니다. 호랑이 같이 엄격한 인홍 스님의 가풍 아래서 뼈 속까지 스며든 수행자의 자세는 첫 스승 묘엄 스님을 만나 단단한 학문의 토대로 이어졌다. 두 번째 스승 명성 스님은 강사의 첫 길을 열어주었고 자비로운 은사 묘경 스님은 그 험난한 길에 등불이 되어주었다. 한 사람의 강백을 배출하기 위해 어쩌면 수많은 인연들이 수많은 생을 거쳐 모이고 흩어지기를 거듭해 비로소 한 곳에 이른 것은 아닐까. 도혜 스님은 여전히 강단에 서서 이제 막 먹물옷을 받은 치문반 학인들에게‘출가수행자의 첫 마음’을 거듭 강조한다. 그것이 이 모든 은혜의 인연으로부터 스님에게 이어진, 또 다른 소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고 단정한 스님의 체구에서 뿜어져 나와 향하당을 가득 채운 그윽함은 그렇게 오랜 세월을 거쳐 간 옛 스승들이 다지고 다진 수행의 향기이자, 금강석처럼 단단한 승가의 기상이다.
    “나를 위할 시간에 더욱 정진해 혜명을 밝혀라”
    [내가 본 도혜 스님]
    
    법등사 주지 설오 스님 : 석남사서 동진 출가한 도혜 스님에게서는 어른 스님들 밑에서 엄중하게 교육을 받았음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언제나 몸과 마음을 단속하는 모습은 감동적이기도 하다. 
    학문을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화시켜 수행으로 이어가는 모습에는 위엄과 지혜가 함께한다. 
    마치 정갈한 계향이 느껴지는 듯 하다. 
    무엇보다도 존경스러운 부분은 언제나 수행을 놓지 않는 점이다. 
    항상 염불 하며 산만한 생각에 마음을 뺏기지 않는 스님의 정진력은 다른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귀감이 된다.
    
    봉녕사승가대학 부교수 법성 스님  : 봉녕사승가대학에 입학해 처음 도혜 스님에게 치문을 배우며“돈을 구하는 사람도 땀 흘려 일하는데 하물며 도를 
    구하는 이들이 이보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라는 말씀을 들으며 눈물이 났다. 
    “돈은 구하고자 해도 구할 수 없는 경우가 있지만 도는 구하고자 하면 반드시 구하게 될 것”이라는 도혜 스님의 가르침은 다시 한 번 발심출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 번도 당신의 일로 남을 번거롭게 하지 않아서 무엇인가를 도와드리거나 해드리려고 해도“그럴 시간에 공부해서 혜명을 밝히는 것이 더욱 값진 일”이라며 
    마다하신다. 
    특히 스님은 매번 수업이 끝날 때마다“무엇이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을 하라”고 하신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강사는 얼마나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된다. 스님 방에 가보면 언제나 책상에 앉아 참구하시고 도량에 다니실 때는 한 번도 
    흐트러짐 없이 염불하신다. 
    공부하면서도 기도와 정진을 놓지 않는 스님의 모습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봉녕사 심우불교대학졸업생 최수진씨 : 도량을 오가실 때면 언제나 손에 단주를 쥐고 염불을 하고 계셨다. 
    눈길 한 번 옆으로 돌리지 않고 집중하시는 모습에 인사를 드리기도 죄송할 정도였다. 
    심우불교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게 됐는데 크게 웃으시는 일도 거의 없고 그저 가끔씩 약간의 미소를 머금는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신도들과 친분을 쌓는 경우도 없고 그렇다고 무엇을 부탁하는 일은 더더욱 볼 수 없다. 
    하지만 그 모습은 냉정하거나 어렵게 느껴지는 거리감과는 다르다. 
    수행자로서 당신의 몸과 마음을 살피고 단속하는 것이 온 몸에 배어있음이 느껴진다. 
    가끔씩 눈이 마주 칠 때 느껴지는 따뜻함이 있다. 
    그것이 수행자의 덕화라고 생각된다. 
    이른 아침 학인스님들에게 강의하기 위해 계단을 올라가는 스님의 모습을 한 참 동안 바라본 적이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스님의 뒷모습을 보며 승가에 대한 존경심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Vol 1334
          남수연 법보신문 기자 namsy@beopbo.com
    草 浮
    印 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