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M T = ♣ /한국불교 비구니 리더

6. 청암사승가대학장 지형 스님

浮萍草 2016. 3. 22. 23:15
    쇠락한 천년고찰 다시 일으켜 배움의 당간지주를 세우다
    1987년 김천 청암사에 승가대학을 개설한 스님은 천년고찰의 역사가 퇴색돼 가던 청암사를 비구니교육도량으로 일으켜 세웠다.
    허물어진 천년고찰에 비까지 오면 궁색함은 극에 달했다. “천장 서까래 사이사이에서 비가 새는데 빗물 받을 그릇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옛 일을 떠올리는 스님은 애써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그윽한 눈빛 속엔 그 시절의 고단함이 스치듯 지나갔다. 아무리 사찰이 퇴락했어도 이럴 수는 없는 법이다. 신라시대 고승 도선국사(827∼898)가 터를 잡아 창건한 청암사다. 그 뿐인가. 조선시대 벽암각성(1575~1660) 스님의 강맥을 이은 대화엄 종장 모운진언(1622~1703) 스님이 청암사에 강원을 개설한 이래 허정혜원 스님이 강교 (講敎)와 설선(設禪)의 꽃을 피웠다. 1711년경엔 화엄학의 대강백 회암정혜(1685~1741) 스님이 강원을 더욱 융창 발전시켰다. 청암사는 조선을 대표하는 불교 강원의 하나로 명성을 드날렸다. 당시 운집한 학인만도 300명이 넘었다. 그 후로도 강원의 역사는 면면히 이어져 근대 고봉(1901∼1967) 스님을 거쳐 우룡 스님,고산 스님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불과 20여년 후인 1987년,김천 청암사에 도착한 의정지형(義淨志炯) 스님은 쇠락한 도량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만약 그때 돌아섰다면 오늘날 청암사의 모습은 어떻게 됐을까. 한가득 질문을 짊어지고 들어서는 청암사 계곡에서 옅은 물소리가 길을 따른다. 강원졸업 후 동국대 재학하며 지관 스님 지도로 경전 재강 1987년 청암사에 강원 열고 도량 일신시키며 비구니교육
    1994년 종단개혁 앞장서 동참 “대중 뜻이지만 책임은 내 몫” 개혁회의 상임위원으로 활동 “제도 개선이 능사는 아니다”

    봄빛이 찾아들기 시작한 청암사 그 어디에도 옛날의 곤궁한 모습은 없다. 낮게 드리운 옛스런 담장, 화려한 단청 대신 결 고운 나무속살로 소박하게 단장한 전각들은 이곳이 천년고찰임을 대변한다. 그 사이로 삼삼오오 발길을 옮기는 학인스님들의 모습은 유서 깊은 경학도량의 위상이 이곳에 우뚝 서 있음을 말해준다. 그 당간지주를 다시 세우기까지 청암사승가대학장 지형 스님의 지난 30여년 세월이 어떠했을지 묻지 않아도 짐작이 된다. 작고 여리게 보이는 체구 어디서 그런 원력이 나왔을까. “출가 전 속가의 일을 무슨 자랑이라고….” 스님은 말을 아끼지만 세상이 먼저 알아보았다. 지난 2013년 3월 지형 스님은 뜻하지 않은 훈장을 받았다. 속가 고모인 박채희 여사의 독립운동 공적이 밝혀지면서 유일한 후손이었던 지형 스님이 건국포장을 수훈하게 된 것이다. 박채희 여사는 1928년 조선독립과 여성해방을 목표로 광주 지역에 결성된 비밀결사단 ‘광주 소녀회’의 회원이었다. 결국 이 일로 박채희 여사는 광주여고보 2학년 때 옥고를 치렀다. 집안 내력은 이뿐이 아니다. 증조부는 가선대부 호조참판이었는데 양반가의 안방마님이던 증조모(법명 반야장)는 신심은 예사롭지 않았나보다. 돌아가신 후 48과의 사리가 나와 광주 흥룡사에 사리탑을 세워 봉안했다. 증조모의 신심과 공덕이 인연이 되어 지형 스님은 어린 시절을 흥룡사에서 보냈다. 출가인연은 그렇게 오래전부터 무르익어 마침내 맺은 결실이었다.
    광주 흥륜사에 있는 지형 스님 증조모 반야장 보살의
    사리탑.
    ▲ 출가 후 바로 강원에 입학하는 일이 흔치 않은 시절이었다. “삭발본사가 동학사였다. 18살에 광주 흥룡사에서 수계했는데 노스님이신 안광호 스님께서 당시 동학사 주지여서 바로 동학사 강원에 입학했다. 은사이신 법인 스님이 무척 엄하셨다면 노스님은 더 없이 자비로우셨다.” ▲ 동학사 살림이 무척 어렵지 않았나. “그 시절엔 다 그랬다. 동학사 화엄승가대학원장인 일초 스님과 동학사강원시절 한 반이었는데 일초 스님은 재무, 나는 교무 소임을 살았다. 학인이 소임 살면서 중강까지 맡는다는 게 요즘 생각에야 고생이지 그때는 공부할 욕심에 힘든 줄도 몰랐다.” 강원을 졸업하고 얼마 후 오대산 지장암 선방에 방부를 들였다. 한철 정진하고 나니 더 박차를 가하고 싶었다. 은사스님에게 “2년만 더 선방에서 정진하겠다” 말씀 드렸지만 “한 철(3개월)만 더 하고 내려오라”는 말씀이 돌아왔다. 하는 수 없었다. 한 철 더 정진한 후 은사 스님과 노스님이 계시던 부산 보덕사로 발길을 돌렸다. ‘고작 두 철 공부로 도를 깨치겠는가.’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은사스님 시봉도 소홀할 수 없는 일.고민 끝에 묘수가 떠올랐다. ‘동국대학교’였다. ▲ 선방 대신 동국대 입학을 택한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학교는 방학이 있기 때문이다. 학기 중에 공부하고 방학 기간 동안 은사스님을 시봉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마침 노스님께서도 입학을 허락하셨다. 하지만 은사스님에게는 말씀도 못 드리고 입학시험을 봤다.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데 은근히 떨어지길 바랐다. 합격하면 은사스님께 말씀드려야하는데 허락 안 하실까 지레 걱정이 됐다. 그런데 덜컥 합격했다는 소식이 왔다. 하는 수 없이 말씀드렸더니 의외로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 대학을 다니며 경국사법보강원을 재강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가산지관 스님께서 동대에 교수로 계시며 청룡암에 강원을 여셨다. 워낙 책보기를 좋아하는 데다 경전을 더 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강원을 졸업했다는 이유로 입학이 안됐는데 다행히 2학년 마칠 때 즈음 자리가 나서 ‘능엄경’부터 재강할 수 있었다. 오전에는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청룡암에서 경을 배웠다. 이후 지관 스님께서 경국사로 가시면서 법보강원도 경국사로 자리를 옮겨 경국사법보강원 1회 졸업생이 됐다. 경전을 접하는 환희를 배운 시기였다.” ▲ 동학사 강원에서는 중강도 맡지 않았는가. “그때는 경을 새기는 데 급급했다. 어떻게 하면 한문을 더 잘 새길까에 연연했다. 하지만 재강하니 비로소 그 경의 말씀이 와 닿았다. 특히 ‘능엄경’을 배울 때는 아난존자의 질문이 마치 내가 하는 질문 같고 부처님께서 내게 직접 말씀해주시는 것 같았다. 환희심이 일었다. 저녁을 굶고 청룡암으로 올라가도 발걸음이 가뿐가뿐했다. 경을 보는 기쁨, 부처님 말씀을 접하는 환희를 그때서야 제대로 느끼기 시작했다.” 전계·전강교수이자 지형 스님을 화운사 강주로 추천해 강사의 길로 이끌어준 지관 스님이 지형 스님에게는 태산 같은 스승이었다. 제자들에게는 더 없이 엄격하고 정담 한 마디 없으셨지만 찾아온 학인들에게 커피를 내주실 때면 꼭 잣을 한 움큼씩 넣어주셨다. 조금이라도 영양가 있는 것을 먹이려고 커피에 잣을 넣어준 지관 스님의 마음을 헤아린 것은 한참이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잔뜩 어려워 앉아 있다가 엉거주춤 일어서려는 제자들에게 “요구르트 하나 먹자”며 손수 꺼내준 것도 제자들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스승의 무뚝뚝한 표현이었다. ▲ 청암사로 오게 된 계기는. “지관 스님이 화운사 강주로 추천하셔서 4년간 학인들을 가르쳤는데 화운사 강원이 문을 닫게 되면서 학인들 10여명과 함께 다시 보덕사로 내려왔다. 한 1년을 살았는데 학인들을 졸업시키려면 제대로 된 강원이 필요했다. 대학시절 인연이 있던 광우 스님의 주선으로 직지사 조실 녹원 스님이 청암사에 강원을 열 수 있도록 해주셨다. 나를 포함해 지금 청암사승가대학 교수인 상덕 스님과 학인 등 18명 가량이 1987년 함께 청암사에 왔다.” ▲ 당시 청암사는 어떤 모습이었나. “우리가 왔을 때는 20여년 전에 이미 폐강된 상태였다. 전각마다 비가 새지 않는 곳이 없었다. 육화료와 대웅전만 비가 새지 않아 몇몇 스님들이 기거했고 진영각이나 극락전 등은 다 비어있었다. 그나마 육화료도 서까래가 다 썩어 부서져서 오자마자 손을 봐야 했다. 그렇게 시작한 불사가 꼬박 20년간 이어졌다. 어찌나 일이 많고 힘이 들던지 ‘우리가 전생에 이곳 스님이었거나 아니면 청암사에 빚이 많았나 보다’라는 소리도 했다.” 옛것에 뿌리 두고 변화엔 능동 학인에게도 배우길 주저 안 해 활발·자재한 학풍의 원동력
    “계율 안에서 자유롭고 겸손하면 비구니 위상은 스스로 높아질 것”

    강원을 열어 학인들을 교육시키고자 청암사로 왔지만 당장 학인들이 들어갈 방사도 없었다. 공부도, 불사도 어느 것 하나 미룰 수가 없었다. 육화료와 진영각을 보수하고 중현당, 선열당을 신축했다. 폐허같이 방치돼 있던 극락전을 중수하고 범종각도 신축했다. 그 틈에도 강원에서는 경 읽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덕분에 청암사승가대학은 문을 연 첫 해부터 졸업생을 배출했다. “숨 가쁘게 살았다”는 말로 지형 스님은 그 시절 이야기를 대신했다. 봄에 새싹이 돋고 여름에 계곡물이 달음질치는 것도 몰랐다. 7년여가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가을에 단풍지는 것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경학도량 복원의 원력이 꽃을 피우는 줄 알았다. 하지만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처럼 또 한 번 위기가 닥쳤다. 1994년 아직 봄이 다 도착하지 않은 3월이었다.
    지형 스님은 학인들에게 청규와 위계 못지 않게 수행자로서의 자긍심과 활발자재한 마음을 강조한다.
    ▲ 1994년 종단개혁에 청암사승가대학이 앞장서 참여하게 된 계기는.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가 꾸려지기도 전이었을 것이다. 도법 스님을 비롯해 7~8명의 비구스님들이 청암사로 찾아와 종단개혁 계획을 설명했다. 동참해달라는 뜻이었다.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학인스님들에게 직접 설명하도록 했다. 대방에 학인스님들을 전부 모아 놓고 도법 스님이 설명을 했다. 스님들이 돌아간 후 학인들의 뜻을 물었다. 거의 대부분의 학인들이 참여하겠다고 했다. 대중의 뜻을 따랐다.” ▲ 주지로서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옳은 길이라는 생각은 나도 학인들과 마찬가지였다. 또한 대중의 뜻이 그렇다면 따라야 했다. 만약 이로 인해 청암사를 내놓게 되거나 청암사승가대학이 문을 닫게 되면 그것은 주지이자 학장인 내가 책임질 일이었다. 소임자로서 책임지겠다는 각오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뜻이 모이자 실천에 옮기는 데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곧바로 차를 대절해 40여명의 학인들이 상경했다. 가장 먼저 조계사 일주문에 들어서 구종법회에 동참했다. 하지만 3월28일 열린 2차 구종법회는 결국 공권력이 동원된 조계사 침탈로 이어졌다. 다음날 아침, 학인들이 경찰서로 연행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 뒤로도 청암사학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지형 스님에게 그 시절은 지금도 다시 떠올리기 힘든 아픔이다. ▲ 초기에는 개혁이 성공한다는 확신을 갖기 힘들지 않았나. “오히려 패색이 짙어보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학인들이 다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만약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 은사스님들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학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벽돌이 떨어지는데 피하지 않는 학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 ▲ 개혁종단이 출범했지만 비구니스님들의 위상은 기대했던 것만큼 개선되지 않은 것 같다. “개혁을 하면 종단이 새롭게 변화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다. 종단 개혁으로 변한 것도 많지만 또 어떻게 보면 크게 변한 게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제도를 바꾸는 데 급급했다. 하지만 제도를 바꾼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위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 아쉬움은 없나. “물론 크다. 그렇다고 실망할 일도 아니다. 멈추지 않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바뀔 것이다. 멈추거나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연구하고 배우고 노력하면서 실력을 쌓다보면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서 비구가 비구니를 위해 제도를 바꿔주기만 바라는 것은 옳지 않다.” 시간이 지난 후 지선(고불총림 방장) 스님은“푸른 바위가 와서 큰 바위를 무너뜨렸다”는 말로 청암사승가대학의 공로를 평가했다. 개혁종단 개혁회의가 꾸려지고 지형 스님은 육문(전국비구니회장) 스님과 함께 비구니 상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거센 개혁의 바람이 불었고 기대감이 높았던 만큼 실망과 아쉬움도 컸던 시절이 그렇게 지나갔다. 청암사승가대학도 많은 것이 변했고, 또 많은 것이 변하지 않았다. 학인스님들은 ‘반야심경’을 힙합음악으로 만들었고 남한산성의 역사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변화를 넘어 파격적이기까지 한 청암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의 활발한 활동이 심심찮게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육화료, 극락전, 진영각처럼 세월의 무게를 이고 있는 전각들은 단청조차 마다한 옛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지형 스님은 그것을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 청암사승가대학은 변화와 자율성을 강조하는 분위기다. “청암사 불사를 하면서 옛 전각들의 낡은 목재를 전부 버리지 않고 새것과 섞어 같이 사용했다. 원래 있던 목재를 잘 살려 새것과 어울리도록 불사를 해야 전각이 옛 멋을 유지하고 더 오래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다. 담장 또한 옛 것을 그대로 보존해 놓았다. 반대로 새로운 아이디어가 많은 학인들에게서 배울 점도 많다. 학장이라도 ‘그것이 좋다’싶으면 학인들에게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승가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조언하고 위의를 갖출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어른들의 할 일이다.” ▲ 자율성도 중요하지만 학인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하지 않나. “학인이기 전에 불성을 지닌 한 사람으로서 각자의 똑똑함을 스스로 갖고 있는 법이다. 스님으로서의 경험치는 부족할 수 있지만 주장과 생각을 갖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각자의 인격과 판단을 믿어주고 존중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있는 개인의 자존과 지혜, 그것을 믿는다.” ▲ 강사로서 학인들의 행동에 균형을 잡아주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행자나 신입생은 마땅히 예의를 지키고 청규에 의한 위계를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도 수행자로서 존엄과 위엄을 존중받아야 한다. 또한 수행자는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과 자부심이 활발해야 한다. 대중 속에서 화합해야하니 규칙을 지켜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까지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출가자로서 자신의 기개를 발휘하고 중심이 되어 공부할 수 있어야 된다. 그렇지 않다면 스님이 될 자격이 없다. 청규와 규칙을 지키면서도 스스로 주인이 되어 열려있고 깨어있고, 자유로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것이 청암사승가대학의 교육 목표이기도 하다. 그것이 수행자다.” ▲ 그 균형의 기준은 무엇인가. “계율(戒律)이다. 계는 자발적으로 스스로 지키는 것이고,율은 대중 전체의 규율이다. 그러므로 계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율 안에서 예를 지킬 수 있다. 규칙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다면 마땅히 야단을 치지만 출가자가 스스로의 의견을 내지 못하고 그 마음을 옭아맨다면 그것은 더욱 질책 받을 일이다.” 학인이기 이전에 불성을 지닌 인간에 대한 믿음이다. 그 믿음이 오늘날 청암사승가대학을 일군 원동력이기도 하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출가한 것이 아니듯 강원은 쌀 있고 된장 있고, 땔감 있다면 족하다. 출가 수행자로서 우리가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지형 스님의 원칙은 짧은 역사 속에서도 청암사승가대학을 푸른 바위처럼 빛나는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 오늘날 비구니스님들에게 가장 큰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스스로의 자존을 잘 지켜야 한다. 늘 비구니다움을 잃지 말아야 한다. 위상은 남이 높여주는 것이 아니다. 내 스스로 비구니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바르게 설 때 위상이 높아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강의를 하는 사람은 강의에 최선을 다해야 하듯 복지든 불사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잘해내야 한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겨야 남도 나를 아껴준다. 남이 우리의 위상을 높여주거나 제도가 우리의 위상을 높여준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잘하지 못하면 위상은 높아지지 않는다.” 오대산 지장암에서 안거를 마친 후, 은사스님이 선방정진을 허락했다면 어땠을까. 지형 스님은 “아마 지금쯤 선방 수좌로 살고 있을 것”이라며 “그저 주어지는 데로 살다보니 이렇게 세월이 흘렀다”고 말한다. 하지만 스님에게 그냥 흘러간 시간이란 없다. 힘들게 강원을 졸업하고 아쉽게 선방에서 돌아섰다. 시간을 쪼개가며 배움을 이어가야 했고 계절도 잊은 채 도량을 일궈야 했다. 주어지는 데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속에 온전히 나를 던져 넣어야 되는 삶이다. ▲ 선방에 다시 방부들이지 못한 것이 아쉽지 않나. “화운사 강주가 되었을 때만 해도 평생 강사의 길을 가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쉬움이 없다. 아쉬움은 선과 교를 둘로 나누어 볼 때 생긴다. 경을 보고 있는 내가 여기에 있는데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어떻게 나를 찾겠는가. 내가 누구인가를 찾는 것도 여기서 해야 한다. 경을 떠나서 깨달음을 찾는 공부를 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강의를 할 수도 없다. 지금 있는 곳에서 부처님 경전을 보면서 내 자신을 돌아보고 챙기는 것이다. 경 보는 마음 따로 있고 참선하는 마음 따로 있을 수 없다. 경을 보는 나와 내 마음이 하나이므로 그것이 선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니 후회할 일도, 아쉬울 일도 없다.” ▲ 경을 보는 환희심은 여전한가. “나이를 먹을수록 부처님 말씀이 우리의 삶과 일치되는 것을 느낀다. 그러니 시간만 되면 더 경을 읽고 싶은 마음이다. 2007년 율학승가대학원을 개원했을 때만 해도 율장이 조금은 소심하고 답답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율장을 깊이 보면 볼수록 부처님이 참 인간적이셨음을 느낀다. 내게 여러 스승님이 많이 계시고 모두 감사한 분들이지만 무엇보다도 부처님이 진짜 나의 스승이시구나라는 생각이 점점 더 확고해진다. 경을 보면 부처님과 대화하는 느낌이다. 부처님이 대답하시고 일러주신다.” ▲ 제자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은. “어디에서든 객이 아닌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주인의식을 갖고 살았으면 좋겠다. 수처작주의 정신을 잊지 않는다면 언제 어느 곳이라도 자신의 위상을 바르게 갖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지형 스님은 처음 청암사에 오던 날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김천역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오던 그 가을날, 유독 단풍이 아름다웠다. 깊은 계곡, 낯선 도량으로 들어오는 길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의아하다. 하지만 집을 찾아가는 주인에게 낯설음이 있을 리 없다. 지금 서 있는 곳, 그곳이 어디든 주인이 되라는 오직 그 한마음 후학들에게 전하는 지형 스님의 걸음은 오늘도 처음 청암사를 향해오던 그날과 다르지 않다. 그 부지런한 마음이 스러지던 청암사승가대학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옛것에 깊이 뿌리를 두고 큰 가지를 드리워 꽃을 피운 나무 같이 스님의 넉넉한 품 안에서 오늘도 청암사승가대학 학인들은 푸른 바위처럼 더욱 단단히 영글어 간다. *********************************************************************************************************************************************** “전통 계승 발전 시켜…뿌리 깊은 나무 같아” 내가 본 지형 스님은 시인 석성일 스님=일평생 부처님 법속에서 촛불처럼 마음과 몸을 바쳐 한국 비구니 승가교육의 크고 깊고 환한 도량을 일군 스님이다.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청암사를 여법한 비구니승가 도량으로 오뚝 세운 것은 오직 부처님 법을 생명처럼 가슴에 품고 올곧은 신심으로 살아왔다는 증거다. 몇 해 전 청암사에 가보니 컨테이너만한 냉장고에 ‘학장 지형 증’이라고 쓰여있었다. 제자들이 환갑을 맞은 지형 스님에게 용돈을 모아 드렸는데 스님은 그 돈으로 냉장고를 사서 다시 대중에게 증정하신 것이다. 저런 마음이 출가사문의 정신이구나 싶었다. 비구 비구니의 거리를 떠나 존경할 만한 스님이다. 자기 공부에만 만족하는 ‘잘난 학승’의 길로 빠지지 않고 향기 나는 스승의 길을 가셨기에 존경하는 마음이 더욱 크다. 일지암 암주 법인 스님=교육자는 스스로 지행일치와 언행일치가 돼야하고 학인들을 잘 가르쳐야 하는 것이 가장 큰 덕목인데 삶을 통해 이러한 덕목을 보여주는 분이다. 조계종염불경연대회에 참가한 청암사승가대학 학인들을 통해 통제와 규제보다는 학인들의 능력을 계발하고 발휘시키는 지도력이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전통적인 것을 잘 계승하고 시대에 맞게 새롭게 창조하는 균형감각은 종단의 교육과정 개편하는 과정에도 크게 도움이 됐다. 박성룡 청암사 신도회장=부산 보덕사에서 지형 스님을 처음 본 이후 30여년 세월 넘었는데 언제나 열심히 공부하고 법답게 사는 모습이 한결같다. 공부하고 계율을 청정히 지키는 모습이 조금도 속진에 물들지 않았음이 느껴진다.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만나는 이들에게 맑고 편안한 기운을 전해준다. 처음 청암사에 가서는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공양거리가 부족해 아침에 무죽을 끓이고 도토리를 주워 묵을 쒀서 공양을 대신해야할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일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 원력으로 극복해 나가는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스님의 살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이동호 조계종 중앙신도회 고문=동학사 학인시절부터 봤다. 지금까지 변함없이 맑다. 옛날 소설 속이나 고전 속에서나 봤을 법한 출가자의 모습을 조금도 훼손되지 않게 올곧게 학인시절 모습,고요한 열정을 갖고 있다. 청암사승가대학을 보면 과거의 전통적 교육에 뿌리를 확실히 두고 신교육을 받아들여 발전시키는 모습이 놀랍다. 뿌리 깊은 나무와 같다. 승가 정신이 올곧게 있으면서 미래지향적인 교육을 한다. 고요한 모습 속에 열정을 품고 있는 스님이다.
    Vol 1336
          남수연 법보신문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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