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M T = ♣ /한국불교 비구니 리더

3.삼선불학승가대학원장 묘순 스님

浮萍草 2016. 2. 2. 12:13
    배움 목마른 학인 곁 40여년…도심 강원 꽃 피운 어머니 같은 스승
    삼선승가대학 폐교에 대한 아쉬움을 내색하지 않던 묘순 스님은 학인들의 활동 모습이 담긴 사진집을 보여주며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번엔 꼭 방부 들이리라 결심했다. 용인 화운사 강원을 나서며 해인사 약수암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강단에 선 지 벌써 10여년, 전강도 받았지만 건강이 썩 좋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아니 이제라도 화두 들고 참선하리라 결심했다. 다행히 그해 여름 첫 하안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제 수좌로 살리라, 그렇게 새로운 길이 열릴 줄 알았다. 그런데 또 다시 강단에 서라니. 그것도 난생 처음 들어보는 ‘통학강원’이다.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었다. ‘통학강원을 희망하는 이들이 있다’는 설득이 발목을 잡았다. 배움이 필요하다는 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조계종 유일이자 전무후무했던 통학강원 삼선승가대학은 1978년 그렇게 탄생했다. 삼선승가대학의 첫 강사이자 강주,그리고 후일 학장이 된 연담 묘순 스님이 덤덤히 전해주는 통학강원 삼선승가대학 탄생의 인연을 듣고 있자니 고개가 갸웃거려 진다. “스님, 그게 전부인가요?” 되묻는 질문에 한동안 웃음만 짓던 묘순 스님이 덧붙였다. “지금은 교육체계가 잘 잡혀있어 출가하고 강원 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시절엔 지금 같지 않았으니까요.” 개심사 스님들 ‘통알’에 감동 절에 가본 지 두 번 만에 출가
    강백 대은 스님 강사 권유에 “절대 안하다”며 선방으로
    평생 수좌의 길 염원했지만 새마을운동서 만난 지광 스님 “여건 열악한 비구니스님들 배움의 기회 주자” 설득에 결국 다시 강단으로 돌아와

    당시만 해도 강원 교육은 의무가 아니었다. 더구나 갓 출가한 사미니들은 은사스님과 절 일을 돕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책임이었다. 강원에 들어가 몇 년씩 공부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이래저래 공부 시기를 놓친 스님들도 많았다. 그런 이들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통학강원’을 열자는 것이었다. 이런 제안을 한 이는 지광 스님이었다. 70년대 중반 새마을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처음 만났다. 스님들을 대상으로 열린 ‘새마을운동교육’에서 두 스님은 같은 조였다. 그렇게 인연을 맺고 이후 몇 년간 연락을 주고받던 지광 스님이 화운사에서 잠시 나와 있던 묘순 스님을 찾아와 기다렸다는 듯이 통학강원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형편이 여의치 못해 강원을 가지 못한 스님들이 많은데 학교처럼 오전에 와서 공부하고 하교하는 통학강원을 개설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또 다시 묘순 스님을 강단으로 돌아오게 했다. “절대 강사 안 할 것”이라고 장담했는데, ‘인연’이라는 말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 시절을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서산 개심사로의 출가 때부터 정해진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묘순 스님의 고향은 예산군 봉산면이다. 당시 동네 인근에는 사찰이 하나도 없었다. 얼마 후 개심사 인근 마을로 이사를 갔지만 10대 시절 내내 사찰은 구경도 못해봤다. 그 대신 마을에 교회가 들어왔다. 옷도 주고 학용품도 준다는 소리에 동무들과 어울려 교회를 다녀왔다. 그러자 부친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다시는 교회 근처에 얼씬도 못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주민들 중에 절에 다니는 노보살이 딱 한 명 있었다. 그 보살이 어느 날 “설 쇠러 절에 간다”기에 물색없이 따라나섰다. 섣달 그믐날이었다. 개심사 법당이 스님들로 꽉 차있었다. 스님들은 밤새 법당에서 무언가를 외우며 기도했다. 우두커니 앉아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새벽녘이 되자 스님들이 서로 세배를 올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천수경’ 독경을 하고 새해 인사를 올리는 ‘통알’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게 뭔지 알 턱이 없었다. 그저 생전 처음 보는 모습에 왠지 마음이 끌렸다. 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절에 가고 싶다”고 말해 버렸다. 모친은 1남3녀 둘째 딸의 밑도 끝도 없는 소리에 “왜 절에 가느냐”며 말렸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마을에서 자라면 명이 짧다”는 소리를 자주 들은 탓인가. 결국 그해 봄 부처님오신날이 지난 며칠 후 모친은 조르고 조르던 딸의 손을 잡고 개심사로 향했다. 태어난 후 딱 두 번째였던 절로 가는 길이 출가의 길이었다. 1963년, 개심사 뒷산 묘련암에서 축발득도하고 ‘묘순’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삼선승가대학 학인들은 2004년 한국에서 열린 샤카디타 세계여성불자대회에서 수화공연을 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출가한 것 아닌가. “그렇다. 절이 뭐하는 곳인지, 스님이 뭐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은사를 정하라는데 은사가 뭔지도 몰랐다. 노스님이 옆에 앉아계시던 비구니스님들을 가리키며 ‘이 중에 은사를 정해서 절을 올려라’하시기에 쭉 둘러보고는 노스님께 넙죽 절했다. 우리 노스님 인상이 가장 자애로워보였다, 그 랬더니 노스님이 웃으시며 ‘나는 나이가 많아 안되니,이 스님 상좌를 해라’하며 옆에 계신 스님은 은사로 정해주셨다. 그 은사스님이 법준 스님, 노스님은 혜명 스님이셨다. 은사스님은 지난해 12월 열반하셨는데, 유달리 아이들을 좋아하셨고 내가 하는 일을 언제나 믿어 주셨다. 한 번도 공부 그만하라는 말씀 없이 묵묵히 지켜보셨다. 참 고맙다.” ▲ 학인 시절이 궁금하다. “개심사에 비구니강원이 있어 처음 공부는 개심사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개심사 주지스님이 경기도 용인 화운사 주지 소임을 맡았고 개심사에서 학인들을 지도하던 대은 스님(1899~1989)도 화운사 강주로 가게 되면서 나와 학인 몇몇이 함께 화운사로 옮겨갔다. 당시 화운사에는 대중도 30~40여명 됐다. 논밭이 많고 과수원도 있었다.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그만큼 울력도 많았다. 특히 학인이 많다보니 강당채를 짓는 일이 급했다. 학인들이 며칠씩 냇가에 가서 돌을 주워 모았다. 그 돌을 실어다 강당채 짓는 데 사용했다.” ▲ 비교적 일찍 강단에 섰다. “예전에는 학인이라도 대교반 쯤 되면 아랫반을 가르치는 일이 많았다. 중강이 되는 것이다. 나도 20대 초중반에 중강이 됐다. 요즘은 교수아사리라고 해서 각 분야에서 강의할 수 있는 자격을 주지만 당시에는 반드시 중강을 거쳐야 했다. 물론 강사가 부족하기도 했지만 당시 중강은 사실상 각 강원별로 강사의 자질을 점검하고 양성하는 과정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 그렇다면 중강을 거치며 강사의 길을 결심했나. “아니다. 강사가 될 생각은 없었다. 학인 때부터 강주였던 대은 스님이 ‘강사 해라’ ‘강사하면 딱 적임이다’ 하셨지만 그럴 때마다 ‘강사 안 하겠다’고 잘라 말했다. 학인 때 보니 강사는 자유롭지 못했다. 강사스님이 일이 있어 며칠만 절을 비우면 우리 학인들이 모여 투덜거렸다. ‘ 경전 배울 것이 이렇게 많은데 강사스님이 자리를 비우면 우리는 언제 경을 다 배우냐’고 그러니 중강을 맡긴 했지만 출타도 마음껏 못하는 강사가 되고 싶을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인연인지, 숙명인지 모르겠다. 결국 강단을 떠나지 못하다가 1974년 서른 살이 되어서 전강을 받았다. 그 후로는 강사의 길을 후회하지 않았다.” ▲ 참선 수행의 뜻도 있던 것으로 안다. “전강을 받은 후 화운사에서 강의를 할 때가 세납 겨우 30대 초반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학인들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늘 따라다녔다. 그래서인지 건강이 자꾸 나빠졌다. 잠시 몸도 추스를 겸 화운사 강원을 나와 선방에 방부를 들였다. 그런데 그게 딱 한 철뿐이었다. 또 다시 통학강원을 열게 되었으니 인연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첫 통학강원은 의정부에 문을 열었다. 지광 스님이 있던 의정부 호원동 약수선원에 조그만 건물을 한 채 빌려 ‘주림강원’이라 이름 붙였다. 1978년 9월이었다. 공부하겠다고 찾아오는 학인들이 많았다. 대부분 서울에서 왔다. 새벽에 등교해 공부하고 사시예불 전까지 각자 절로 돌아갔다. 그야말로 숨이 찰 지경이었다. 그 모습 보기도 안쓰러웠다. “강원이 서울에 있으면 좋겠다”는 학인들 요청에 무작정 서울로 옮겼다. 신도도 없고 아는 이도 없는 동소문동 삼선교 사거리에 월세로 건물을 얻었다. 하지만 강원 운영이 막막했다. ‘이왕 건물을 얻은 김에 포교를 같이하자’ 싶어 ‘삼선포교원’이라 이름 짓고 3월1일 강원과 포교원을 함께 개원했다. 이때 강원 이름도 ‘삼선강원’으로 바뀌었다. 건물 밖에 ‘법구경’의 좋은 문구들을 크게 적어 내걸었다. ‘포교원’이라는 말도 생소한 시절이라 사람들이 ‘뭐 하는 곳인가’ 궁금해 하며 많이 찾아왔다. 삼선포교원에서는 매주 법회를 하고 법문을 했다. 사찰 법회나 법문은 주로 초하루나 보름에만 열리는 게 보편적이었던 때라 매우 파격적인 운영이었다. 덕분에 신도가 급속히 늘어났다. “얼마나 신도들이 많이 왔는지 사람 무게에 눌려 법당 마루가 기울었다. 마루가 내려앉아 법당 중간에 서있던 나무기둥 밑동이 공중에 붕 떠버렸을 지경이었다.” 묘순 스님은 지금도 그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신도 대부분이 주부임을 감안해 화요일에 법회를 열었다. 가족들이 집에 있는 일요일을 피해 주중에 열었던 화요법회가 지금까지도 삼선포교원의 전통이 되었다. 그렇게 운영하다 지금의 터를 마련해 1983년 이전했다. ▲ 강원 운영에서도 파격적인 부분이 많이 보인다. “외전을 많이 가르쳤다. 시대가 그런 것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도심에 위치하고 있어 외래 교수들을 섭외하기가 비교적 수월했다. 안암동에 있던 중앙승가대가 소쩍새마을을 인수한 후에는 그곳에 찾아가 자원봉사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원봉사론이나 포교학개론, 수화 등 다양한 교과목의 필요성을 느꼈다. 학인들의 반응도 좋았다. 삼선승가대학에서 수학한 스님들이 사회 곳곳에서 활동하며 역할을 하게 된 데에는 이런 교육 분위기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 외전 강의 때문에 벌어진 에피소드도 많았을 것 같다. “삼선승가대학의 행보가 파격적이었는지 주목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KBS에 삼선승가대학의 비구니스님 합창단이 소개되기도 했고 2004년 샤카디타 세계 여성 불자대회가 한국에서 열렸을 때에는 우리 학인스님들이 수화 공연을 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합창뿐만이 아니었다. 연극도 하고 공연도 했다. 물론 지적도 없진 않았다. 열반하신 묘엄 스님께서 비구니강사교우회에서 한 번은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탈춤은 좀 안하면 안 되겠나’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좀 우습기는 하다.” 1978년 ‘주림강원’ 개설하며 교계 유일 통학강원 시대 열어
    포교·복지·봉사 등 과목 개설 다양한 교과목으로 시야 넓혀 졸업생들 현장서 빠르게 뿌리
    “비구와 같아지려고 하지 말고 비구니의 장점 개발 노력해야 세속화 경계하고 현대화 앞장서면 한국불교 이끌 비구니 역량 충분”

    1982년 첫 졸업생 7명이 배출됐다. 그리고 매년 10여명 안팎이 졸업했다. 봉녕사, 운문사, 동학사, 청암사 등 비구니강원들이 자리를 잡은 이후에도 삼선승가대학을 찾는 발길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그 이유의 하나로 묘순 스님은 당시까지도 미완이었던 승가교육 체계를 손꼽았다. 1994년 출범한 개혁종단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승가교육 개혁이었다. 이후 대대적인 제도정비를 거쳐 지금과 같은 4년제의 승가교육 제도가 틀을 잡았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 승가교육은 교육기간, 이력, 학제 등이 통일돼 있지 못했다. 이처럼 제각각이었던 승가교육의 체계화를 선도한 곳이 바로 비구니강원이었다.
    삼선불학승가대학원장 묘순 스님.

    친목 모임을 이어오던 비구니 강사들이 1982년 ‘대한불교조계종 비구니교우회’라는 이름으로 정식 모임을 만들었다. 강원에 관한 제반 사안들을 통일하자는 데 뜻이 모아졌다. 비구니강원의 방학, 개학 날짜와 입학금 등을 통일했다. 하지만 여전히 학인들의 이동이 많았다. ‘어느 스님이 기신론을 잘 가르친다’고 하면 기신론 배울 때가 돼서 잘 가르친다는 스님을 찾아 강원을 옮기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80년대 초반까지 교육연한도 통일돼 있지 않았다. 강원을 졸업하기까지 5~6년에서 10년이 보통이었다. 대부분 한문 경전을 배우니 진도가 늦었다. 또 한 과목이 완전히 끝나야 진학과 졸업이 가능했다. 그러니 강원을 마치지 못하는 스님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스님들에게 통학강원은 끝마치지 못한 강원교육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는 단비와도 같았다. 무엇보다 은사스님 시봉하고 절일을 도우면서도 공부를 포기할 수 없었던 열악한 상황의 비구니스님들에게 고단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즐거운 배움의 기회였다. 동국대와 중앙승가대 등에 진학하거나 졸업한 후에 한문 경전을 더 배우고자 다시 삼선승가대학을 찾아오는 스님들도 많았다. 그렇게 삼선승가대학은 아스팔트로 덮여있는 도심 한가운데 피어난 전통강원의 꽃이었다. ▲ 2014년 졸업생을 끝으로 삼선승가대학은 결국 문을 닫았다. “습의문제 때문이다. 대중생활을 하지 못하다보니 위의를 익힐 기회가 부족하다는 지적이었다. 그래서 진천 보탑사를 습의도량으로 정하고 1년에 한 두 차례씩 수일간 습의 산림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보완했다. 하지만 94년 개혁종단 출범 이후 승가교육 제도가 차차 틀을 갖추고 종단 교육 방침이 대중생활을 통한 일상습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정착되면서 2014년 문을 닫게 됐다. 출가자 감소로 학인 수가 줄어든 것도 이유다.” ▲ 아쉬움이 클 것 같다. “36년이다. 전혀 아쉬움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처음 통학강원을 시작할 때 이렇게 오랜 세월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회가 새롭다. 다만 통학강원 형태의 교육 시스템이 오늘날에도 필요하지 않을까 간간히 고민해 본다. 방송통신대학도 정착됐고 사이버교육이나 온라인교육 등이 활성화되면서 교육의 형식이 다양화되고 있다. 삼선승가대학은 문을 닫았지만 발상의 전환을 통해 더 많은 이들에게 다양한 교육의 혜택을 주기 위한 고민은 계속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아쉽다는 생각보다 조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다.” ▲ 그런데 다시 불학승가대학원을 개설했다. “삼선승가대학 폐교가 결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졸업 동문들이 찾아왔다. 대학원을 개설하자며 두 시간을 졸랐다. 이제 나이도 있고 쉬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었다. 그런데 스님들이 물러서지 않기에 ‘그럼 1년만 쉬었다가 개설하자’고 했지만 그도 안 된다며 버텼다. 대중이 원하는 것을 따르는 것도 출가자의 도리다. 결국 그해 3월 신입생을 받아 오는 2월24일 첫 졸업생이 배출된다. 처음엔 망설였지만 졸업하는 학인들을 보니 또 뿌듯하다.” ▲ 선방 수행에 대한 아쉬움은 아직도 있나.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라 했다. 마음과 말씀이 다르지 않고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이고 경전이다. 어느 것이 더 수승한지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예전에는 화두 들고 참선 수행하는 것을 최고로 쳤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선방 스님들을 ‘이판’이라 하고 교학하는 스님들을 ‘사판’이라 했다. 그 정도로 참선 수행이 최고라고 했으니 나도 선방 생각이 컸던 게 아닐까. 지금은 젊은 수좌들 정진하는데 나이 많은 내가 가서 방해될까 걱정된다.” 결국 또 대중이다. 삼선불학승가대학원을 개설한 것도 수좌의 길을 접은 것도 오직 대중의 뜻을 따른 선택이었다. 묘순 스님의 걸음걸음은 내 안의 욕심과 집착을 덜어낸 자리에 대중의 뜻을 채우고 그들에게 필요한 거름이 되기 위해 끝없이 자신을 내려놓는 과정이었다. 대중이 원한다면 누군가 나의 가르침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마음과 욕심을 내려놓고 돌아온 곳.그곳이 묘순 스님에게는 평생 떠나지 못했던 강단이자 강사라는 이름, 스승이라는 자리였다. 삼선승가대학 졸업생들이 어느 강원 졸업생들 못지않게 끈끈한 동문애를 공유하는 것도 ‘나’보다는 ‘남’을 먼저 살피고 대중을 따르던 스승의 말없는 가르침이 스며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오늘날 비구니교육이 추구해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마음만 먹으면 교육기회는 얼마든지 열려있는 시대다. 대학을 다녀도 장학금 혜택이 많다. 물론 지금 세속에서는 남자들의 영역이라고 여겨져 왔던 분야에 도전하는 여자들이 많아졌다. 여성들이 사관학교 지원하는 등 그야말로 남녀의 구분이 없다. 불교계에서도 비구 비구니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교육자들은 비구니들이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 교육하고 진로를 개척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비구니들도 그 속에서 실력을 갖춰야 한다. 종단에서 비구니들에게 역할을 맡겼을 때 능히 그것을 거침없이 해낼 수 있다면 비구니스님들의 역할은 더욱 커질 수 있을 것이다.” ▲ 비구니스님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권신장이 많이 됐고 여성이 대통령도 하는 시대지만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여성의 위치는 많은 여성들이 치열하게 노력해서 이룬 성과다. 비구니스님들도 각고의 노력으로 지금의 위상을 일궜다. 각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스님들이 많아졌다. 능력 있는 비구니들도 많다. 고무적인 현상이다. 비구스님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면 비구니들이 그만큼 실력을 갖춰야 한다. 떳떳할 수 있으려면 실력을 갖추는 것이 첫째다. 그러면서도 비구니가 갖춰야할 소양을 갖춰야 한다. 현대화와 세속화는 엄연히 다르다. 열심히 공부하고 능력을 개발해 비구니로서 비구와 다를 바 없는 역량을 갖추면서도 비구니로서의 주관 정체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여성이 남성같이 행동하는 것이 여권 신장이 아니듯 비구니는 비구니만의 위의를 갖춰야 한다. 비구니들은 한국불교를 짊어질 수 있는 역량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세속화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 정체성을 지키며 실력을 갖춰나간다면 진정한 불교의 현대화를 이끌어 갈 것이다.” 이런 당부, 걱정은 어쩌면 기우일지 모른다. 36년간 삼선승가대학이 배출한 30기 266명의 졸업생들은 각계에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포교, 불사, 복지, 문화, 종무행정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제몫을 당당히 해내고 있다. 포교당, 병원법당, 군법당, 복지관 등 구석구석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자들의 법명을 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무엇보다 설레는 것은 앞으로 또 어떤 졸업생이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 나갈지 미처 가늠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 소식을 기다리는 것이 어쩌면 묘순 스님의 즐거움인지도 모른다.
    1983년 10월15일 삼선포교원, 삼선강원 상량식.

    새벽 6시부터 밀물처럼 밀어닥치고 수업이 끝나면 썰물처럼 빠져나가던 학인들의 뒷모습을 36년간 바라보았다. 승가대학은 이제 삼선불학승가대학원으로 다시 한 번 변모했지만 오가는 학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스승의 자리는 언제나 변함없이 그곳이다. 어머니의 자리다. “낯설고 두려웠던 시작,그리고 설레었던 새로운 출발. 36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켜봐주시고 이끌어주신 스승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어버이십니다.” 스승에게 바친 어느 제자의 글 한 대목이 꽃처럼 향기롭다. **************************************************************************************** 어려움 짊어지고 묵묵히 앞장선 개척자 [내가 본 묘순 스님] 전강제자 수경 스님(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늘 세상의 흐름을 파악하고 계신다. 유행을 따르지 않지만 변화에 유연 하게 대처하시는 지혜가 있으시다. 통학강원이라는 새로운 교육방식도 그런 열린 사고에서 출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가까이서 느끼는 가장 궁금한 점은 어떻게 한 번도 학인들을 야단치지 않을 수 있는가이다. 잘못한 일이 생겨도 “아휴, 어떻게 해요”하며 걱정부터 하신다. 가장 큰 어른이면서도 아랫사람에 대해 배려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면 존경심이 솟아나지 않을 수 없다. 세수 일흔을 넘기신 나이에도 강단에서 들려주시는 변함없이 맑은 음성은 그 한결같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존경하고 감사한 스승이다. 4기 졸업생 해성 스님(연화복지원 이사장) : 재학 시절 삼선포교원 불사가 한창 진행되던 시기라 마치 은사처럼 모셨다. 한국불교 포교의 새 장을 여신 분이기도 하다. 학장으로서 제자들에게 교학의 길을 열어 주신 측면도 크지만 삼선포교원 불사를 곁에서 지켜보며 현대 도심포교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러한 경험이 졸업 후 전법과 불사의 현장에서 활동할 때 큰 힘이 되었다. 늘 비구니로서 갖춰야할 위의를 강조하셨고 생활 속 모습으로 솔선수범을 보이신 스승이다. 5기 졸업생 혜조 스님(자성과쇄신 결사추진본부 사무총장) : 삼선승가대학을 이끌어오면서 수많은 고비를 넘겼지만 끝까지 학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학인들 가르치는 것을 평생의 소임으로 여기시며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강단에 서셨다. 삼선승가대학이 습의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분명 당사자로서 많은 힘들었을 것임에도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주었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린다.
    Vol 1330
          남수연 법보신문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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