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 S = ♣ /기인이사(奇人異士

38 이광사와 송시열과 우리 산하

浮萍草 2016. 1. 23. 20:14
    김정희와 초의선사, 그리고 우암 송시열
    인이사 32편 ‘김정희와 초의선사와 대흥사’편에 서예의 대가 추사 김정희와 원교 이광사 선생의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대흥사에 걸린 원교의 글씨를 보고 추사는“그는 우리 글씨를 망친 인물”이라고 화내며 초의선사에게 현판을 떼라고 했습니다.
    유배가 끝나고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원교의 글씨를 다시 달라”고 했습니다. 
    사가(史家)들은 이 일화를 “자기 필체를 최고로 여겼던 추사가 귀양살이 후 겸손해졌다”고 평가하는데 당시 그 글에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단어가 등장했습니다.
    여러분이 짐작하듯 ‘동국’은 우리나라,즉 당시의 조선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진체’는 무엇일까요?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왕희지체니 뭐니 하는 중국의 서법(書法)을 모방했습니다. 
    17세기 후반들어 조선에도 ‘우리 식의 독자적 서체’가 나옵니다. 
    그 역사를 살펴보면 옥동(玉洞) 이서(李緖·1662~1723) 선생을 선구자로 꼽습니다. 
    이서는 실학자로 유명한 ‘성호사설’의 저자 성호 이익(李瀷·1681~1763) 선생의 형이었습니다. 
    그는 벼슬이 낮았지만 서예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서 선생의 글씨가 보고 싶다면 전남 해남의 녹우당(綠雨堂)에 가볼 것을 권합니다. 
    윤선도 선생의 집안인 녹우당은 뒤 덕음산에 빼곡한 비자나무가 바람이 불 때 비오는 것같은 소리를 낸다고 해 붙은 이름인데‘녹우당’이라는 글씨가 이서의 것
    입니다.
    전남 해남 녹우당을 옆에서 본 모습이다. 원래 서울 명동에 있던 것을 통째로 실어날라 세운 것이라고 한다. 여기 동국진체의 창시자인 이서의 글씨가 걸려있다.

    그가 남긴 ‘필결(筆訣)’이라는 책은 최초의 글씨 비평서이자 이론서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서 선생의 서맥(書脈)은 이후 공재 윤두서(1668~1715),백하(白下) 윤순(尹淳·1680~1741),원교(円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에게 이어졌습니다. 더 정확히 계보를 따지는 이들은 동국진체의 전수를 공재 윤두서와 그의 아들 낙서 윤덕희,외증손 다산 정약용,방산 윤정기,춘계 윤홍혁의 줄기와 윤두서 윤순 이광사로 내려오는 줄기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첫째 줄기는 해남 윤씨 계열이지요. 역사가들은 대체로 동국진체의 완성자로 원교 이광사를 꼽습니다. 원교 이광사는 명문집안 자손이었습니다. 그의 선조가 조선의 두번째 임금 정종의 왕자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지낸 이진검(李眞儉)이었으며 원교는 넷째 아들이었지요. 호는 원교, 혹은 수북(壽北)을 썼습니다.
    전남 해남 녹우당에 걸린 '예업'이라는 글씨가 이서의 것이다. 예술의 본향이라는 뜻이다

    원교의 일생은 파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가 열일곱되던 해 아버지 이진검은 노론(老論) 4대신을 탄핵하다 임금의 미움을 받아 경남 밀양으로 유배됐습니다. 이진검은 거기서 삶을 마감했습니다. 여기서 ‘노론 4대신’이 누구인지를 살펴봅니다. 노론 4대신은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를 말합니다. 그들은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이 아들없이 병치레를 자주하자 국본(國本),즉 세자를 빨리 정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세자로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밀었다는데 있지요. 그러자 노론과 반대편인 소론측은 반대 상소를 올리는 한편“노론 4대신이 경종을 시해하려했다”며 무고를 하기에 이릅니다.
    전남 해남 녹우당에 걸린 '정관'이라는 글씨도 이서의 것이다. 선비는 홀로 있을 때 스스로의 내면을 돌아본다는 뜻이다

    녹우당은 비자나무 숲에 바람이 불 때 비오는 소리
    처럼 들린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노론 4대신은 역모죄로 처형됩니다. 훗날 노론 4대신 무고사건은 당시 승지였던 김일경(金一鏡)이 목호룡이라는 사람에게 사주했음이 드러 납니다. 영조가 즉위한 후 김일경 부자(父子)와 훈련대장 윤취상 등 수백명이 노론의 반격을 받고 제거됩니다. 이때 훈련대장 윤취상의 아들이었던 윤지가 제주도로 유배됐다가 전남 나주로 옮겨 귀양살이를 계속 했습니다. 윤지는 부친의 죽음을 복수하기위해 동지들을 규합하던 중 1755년 나주괘서사건,나주벽서사건,‘윤지의 난’이라 불리는‘을해옥사’를 일으킵니다. 나라를 비방하는 격문을 벽에 붙인 일이 발각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소론은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습니다. 이때 50살이던 이광사는 큰아버지 이진유(李眞儒)가 나주 괘서사건으로 처벌을 받게되면서 연좌돼 이듬해 함경북도 부령(富寧)으로 유배됩니다. 원교는 그때 죽임을 당할 뻔 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의금부에 끌려가자 하늘에 대고 통곡하며 “내게 뛰어난 글씨 재주가 있으니 내 목숨을 버리지 말아 주십시요”라고 애원했다는 것입니다. 영조는 그 이야길 듣고 그를 살려줬습니다. 이광사의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문인들에게 글과 글씨를 가르치던 것이 ‘선동죄’로 몰려 이번에는 전남 완도군 신지도(薪智島)라는 곳으로 다시 귀양을 간 것입니다. 이때 이광사의 나이는 58세,그는 거기서 15년을 살다 죽었습니다. 이광사가 죽은 다음해 2월 원교의 아들 형제가 유해를 경기도 장단 송남(松南)으로 옮겨 어머니 류씨와 합장하지요. 원교의 무덤은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어 사람들이 갈 수 없습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유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지요. 이렇게 불운하게 살았으면서도 그는 평생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백하 윤순에게 글씨를 배운 그는 진서(眞書),초서,전서,예서에 통달했고 마침내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완성했습니다. 글씨뿐 아니라 산수화, 인물화 등에도 능했습니다. 이광사가 신지도에서 유배할 때 길러낸 제자가 많습니다. 이가운데 해남 대흥사에 그의 필법이 전해지게된 것은 즉원(卽園·1738~1794)스님,아암(兒庵)스님같은 제자 때문이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아암스님이 다산과 교우하는 훗날의 혜장스님이며 그 제자가 추사와 친교를 맺은 초의 선사였습니다. <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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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교가 수체(水體)로 현판을 쓰자, 절에 화재가 멈춰
    리산에는 유서깊은 3대 사찰이 있지요. 
    구례쪽 화엄사, 하동쪽 쌍계사와 어깨를 나란히하는 구례 천은사(泉隱寺)는 신라 덕흥왕 3년(828년) 인도 승려 덕운조사가 창건했습니다. 
    ‘샘을 숨기고 있다’는 이름처럼 처음에 이 절의 이름은 감로사(甘露寺)였습니다. 
    절에 ‘샘’이란 말이 붙은 것은 전설 때문입니다.
    지리산 천은사 극락보전에 걸린 현판이다. 이광사의 작품이다.

    천은사는 조선 숙종 5년때인 1679년 단유선사에 의해 중건됐는데 샘 주변에 구렁이가 자주 나타났습니다. 한 스님이 무심코 그 뱀을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절에서 살생을 한 여파는 컸습니다. 그후 샘이 말라버려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샘이 마르자 이유를 알 수 없는 화재도 자주 발생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원교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智異山泉隱寺)’라는 글씨를 써주었습니다. 원교는 글씨를 물흐르는 것 같은 수체(水體)로 썼다고 합니다. 그후 이 절에는 불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천은사에는 절의 입구격인 일주문에 붙은 ‘지리산 천은사’부터 극락보전(極樂寶殿), 명부전(冥府殿) 등 세곳에 원교의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극락보전에 모두 13마리의 용(龍) 장식이 있으며 좌우에 황룡과 청룡의 머리가 조각돼 있는데, 이것은 풍수지리와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극락보전 앞에 있는 보제루(普濟樓)는 원교의 제자인 창암 이상만이 썼는데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재주가 뛰어난 창암은 하루에 1000자 쓰기를 꼭 채웠는데 그로 인해 벼루가 세개나 구멍이 났고 붓은 1000자루가 닳아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지리산 천은사를 둘러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지리산 천은사로 가는 길에 있는 수홍루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정평이 나있다.

    원교의 글씨는 전남 해남 대흥사에도 있습니다. 대웅보전과 대웅보전에 들어서기 전에 있는 침계루(枕溪樓),천불전(千佛殿), 해탈문(解脫門)입니다. 대웅보전의 원교 글씨 옆 불당엔 앞서 말한 것처럼 추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이 걸려있지요.
    전남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의 현판이다. 이광사의 글씨를 본 추사 김정희가 떼어내라고 했다가 다시 붙였다는 일화가 있다.

    오랜 유배를 끝내고 풀려난 추사는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제주도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네.유배되지 않았으면 내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갖지 못했을거야.사물과 치열하게 대결하며 현상을 좇다보면 자신이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쫓기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법일세. 제주도가 그걸 가르쳐줬네.” 이 말에 초의선사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습니다. “추사께서 성불(成佛)하려나보오.” 그러자 추사는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여보게 초의.내가 지난번 제주도로 가기 전에 떼어내라고 한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이 혹시 지금도 있나?” 초의선사는 “그거 어딘가 헛간 구석에 있겠지. 나는 잘 버리지않는 성미니까”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추사는“그 현판을 다시 달고 내 글씨를 떼어내게. 그땐 내가 잘못보았네”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헛간에 있던 원교의 글씨가 살아난 과정입니다.
    전남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의 글씨도 이광사의 것이다. 지금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가 여기 머물고있다.

    원교의 글씨는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명부전,만경루(萬景樓) 현판에도 남아있습니다. 그러고보면 전남의 유서깊은 두 사찰인 대흥사와 백련사가 모두 원교의 글씨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고창 선운사의 천왕문(天王門), 선운사 성보(聖寶)박물관에 보관 중인 ‘정와(靜窩)’라는 글씨도 원교의 것입니다. 정와는 ‘조용한 작은 집’이라는 뜻입니다. 변산반도 부안 내소사의 대웅보전과 설선당(說禪堂)도 원교의 작품이지요. 그런데 기인이사 시리즈를 취재하며 전국을 다니다보니 원교못지않게 글을 남긴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 선생이었습니다. 지금 이 부분을 쓰면서 저는 경이롭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원교가 살아 생전 고초를 겪은 것이 노론과의 불화한 집안 내역 때문인데 그 노론의 영수가 송시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당쟁사가 복잡하기 짝이 없어 며칠을 공부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여기서 잠시 사색당파의 분화과정을 요약해봅니다.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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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 깊은 한국의 사색당파 계보
    소쇄원 부근에 있는 환벽당은 우리 정자 미의 극치를
    보여준다.글씨가 우암 송시열의 것이다.
    인,서인은 조선 초 분화됐지만 연원은 고려 말기로 넘어갑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하자 선비들은 고려에 절의를 지킨 사림파(士林派)와 새 나라 건국에 협조한 훈구파(勳舊派)로 나뉩니다. 당연히 조선 초는 요직을 장악한 훈구파의 것이었지요. 정몽주를 흠모해온 사림파는 지방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인재를 축적합니다. 그러다 선조 대에 들어 훈구파를 제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 사림파가 갈라진 것은 이조전랑이라는 관직 때문인데 선조 초기에 이 벼슬을 놓고 갈등이 벌어집니다. 김효원이 이조전랑에 추천되자 심의겸이“김효원은 훈구파였던 윤원형의 식객이었다”며 반대하지요. 이때 김효원의 집이 한양 동쪽인 동대문,심효원의 집이 한양 서쪽인 서대문쪽이어서 양쪽을 동인-서인 으로 불렀습니다. 동인은 선조 22년,즉 1598년 일어난 정여립의 난으로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립니다. 동인에 속했던 이발이 정여립과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정여립의 난 후 처형됐는데 당시 그를 구해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유성룡이 외면했다는 이유지요. 이발의 죽음에 동정적인 인물들은 북인,유성룡을 따른 인물들은 남인으로 분파되는데 이는 이발의 집이 한양 북악(北岳)에,유성룡의 집이 경북 안동에 있었기에 남인으로 불려진 겁니다. 이후 북인은 인조반정으로, 남인은 갑술환국으로 몰락합니다. 갑술환국은 1694년의 사건을 말합니다. 중앙 정계에서 수세에 몰려있는 남인은 1689년이 기사환국(장희빈을 둘러싼 서인과 숙종의 갈등)으로 기사회생했는데 불과 5년이 안돼 다시 치명상을 입습니다. 이유는 역시 장희빈의 자식 때문이었습니다. 남인들은 서인들이 숙종으로부터 폐출된 인현왕후 민씨를 복위시키려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장희빈이 낳은 아들(훗날의 경종)에게 의존하던 남인은 서인들의 민씨 복위를 자신들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고 뿌리부터 끊어놓으려 시도하지만 실패합니다. 권력의 정점이던 숙종이 이미 장희빈에 대해 염증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남인의 영수 민암이 사사되고 중심 인물들은 유배를 떠납니다. 여기서 요약하자면 동인에서 나뉘어진 북인은 남명학파(조식),남인은 퇴계학파(이황)로 불립니다.
    소쇄원 제월당의 글씨도 우암의 작품이다. 우암은 조광조를 존경했으며 학포 양팽손을 통해 양산보 일가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서인은 숙종 때의 경신환국(1680년) 때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는데 경신환국은 남인의 영수 허적이 자신의 할아버지 잔치에 왕만이 쓸 수 있는 용봉차일,즉 기름을 먹여 비가 새지않는 천막을 임금의 허락없이 냉큼 가져다 쓴데서 비롯되지요. 비가 오는 것을 알고 허적의 집에 용봉차일을 보내려던 숙종은 허적이 벌써 가져간 것을 알고 남인을 실각시키고 서인을 중용합니다. 몰락한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강경파(노론-송시열),온건파(소론-윤증, 윤휴)로 갈리며 서인도 분화한거지요. 소론은 이인좌의 난으로 몰락하고 노론은 훗날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동정적인 시파와 비판적인 벽파로 나뉘었으니 한국사회는 서인의 나라,그중에서도 노론의 나라였던 셈입니다. 그러고보면 우리 보수의 맥도 상당히 그 뿌리가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암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당파싸움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인물입니다. 본디 서인이었으며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뉠 때 노론의 영수(領袖)격인 인물이 그이기 때문입니다. 우암은 효종, 현종 두 임금이 세자시절에 스승이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대로(大老), 송자(宋子),송부자(宋夫子)같은 명칭으로 격상됐지요. 그는 1633년 경릉참봉으로 벼슬길에 나서 대군사부,진선,장령,찬선,세자사부,이조판서,좌의정,우의정,영중추부사,행판중추부사 등의 요직을 지냈습니다.
    낙화암이라고 쓰여진 붉은 글씨가 우암 송시열의 작품이다.

    전남 승주에 있는 조광조 선생 유허비문도 송시열이
    직접 쓴 것이다.글씨가 모범생의 것처럼 보인다.
    우암이 유명하게된 것은 조선시대의 각종 논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송논쟁, 즉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숨졌을 때 효종이 몇년 상을 치러야하는 지를 놓고 격론이 붙었을 때 1년동안만 상복을 입어도 된다는 ‘기년설’을 주장했지요. 우암은 숙종 때 장희빈의 아들 균을 세자로 지정하는 문제에 반대하다고 숙종의 미움과 남인의 사주로 전북 정읍에서 사사(賜死)됐습니다. 하지만 1756년(영조 32년) 영의정에 추증됐고 평소 그를 존경하던 정조는 우암을 송자(宋子)로 격상 시켰습니다. 공자-맹자-순자-묵자와 같은 반열이 된 거지요. 그가 남긴 유고(遺稿)는 역사상 가장 방대한 송자대전(宋子大全)으로 간행됐는데 조선 유학자가운데 도통(道統)을 이은 성인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인물은 우암뿐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만 이름이 3000회 이상 등장하지요. 우암의 글씨 가운데 제가 눈으로 확인한 것은 충남 부여 낙화암에 새겨진 ‘낙화암(落花巖)’,전남 담양 소쇄원에 있는 제월당(霽月堂),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 소쇄원 근처에 있는 환벽당 (環碧堂), 정암 조광조선생 유허비 등입니다. 우암은 서예도 도학(道學)의 한 갈래로 생각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글씨를 아름다움보다는 심획(心劃)이자 덕성(德性)의 표출로 보면서 마음을 수련하는 것과 동일 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의 자세는 퇴계의 글씨를 평한데서 잘 나타납니다. 우암은 퇴계의 서첩을 보고 이렇게 평했지요. “따뜻하고 도타우며 편안하면서도 화목한 뜻이 뚜렷이 필묵의 테두리 밖에 나타나 있으니 옛 사람들의 덕성이 어찌 오직 언행이나 사업에서만 볼 수 있겠는가!” 재미있는 것이 조선일보 이한우 선임기자의 평입니다. 이 기자는 “우암은 평소 길이 정해지면 옆을 쳐다보지않은 인물이었다. 글씨를 봐도 그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일체의 기교가 없는 정법(正法), 마치 모범생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은 필체다.” 저도 그의 견해에 상당부분 동감했습니다. 우암의 글씨는 충북 괴산의 화양동 계곡에 집중적으로 남아있다고 하니 그곳도 나중에 돌아볼 생각 입니다. 저는 서예에 대한 지식이 깊지는 않지만 전국의 유적을 다니다 때때로 발견하는 옛 선인들이 남긴 글씨도 훌륭한 문화재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조선일보 편집국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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