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광복 70년… 물건의 추억

33 2000만부까지 찍은 전화번호부… 헤어진 형제 상봉시켜 주기도

浮萍草 2015. 12. 24. 10:17
    가장 두꺼운 책’인 전화번호부는 공기총 위력
    시험 때 표적으로도 썼다.1993년 11월 촬영.
    한 권이 크게 히트하면 "낙양(洛陽)의 지가(紙價)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중국 서진(西晉) 때 시인 좌사(左思)가 쓴 '삼도부(三都賦)'가 나오자 모든 선비가 명문이라며 베껴 쓰는 바람에 종이값이 오른 데서 유래한 말이다. 1968년 한국에선 어떤 책을 워낙 많이 찍는 바람에 갱지 도매값이 2.2% 뛰었다. 그 책은 전화번호부였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전화번호부'라고 하면 휴대폰·PC에 저장하는 전화번호 목록을 떠올린다. 하지만 한 도시의 모든 연락처를 인쇄해 묶은 전화번호부가 1990년대 후반까지 우리 가정 상비품이었다. 책이라고 하기엔 엄청나게 두껍고 크고 무거웠다. 오죽하면 서류가 두툼하게 쌓여 있을 땐 '전화번호부 두께'라고 했다. 거리의 '차력사'들이 힘자랑할 땐 꼭 전화번호부를 찢었다. 1957년 미국 상원의원 스트롬 서몬드가 역사상 가장 오랜 시간의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 기록을 세울 때 연단에서 읽은 책 역시 전화번호부였다. ' 인명부(人名簿)'와 '상호부(商號簿)'로 나눠 수십만~수백만 항목을 넣다 보니 큼직한 국배판(가로 210㎜,세로 297㎜) 크기에 깨알 같은 글씨로 인쇄했어도 대개 1000쪽이 넘었다. 1989년엔 전국 발행 부수가 1000만부를 돌파했다. 4t 트럭 3000대 분량의 종이가 들어갔다. 발행사는 "전화번호부들을 (낱장으로 뜯어내) 연결하면 지구를 21바퀴나 휘감는다"고 광고에서 자랑했다. 소설 '장미의 이름' 저자 움베르토 에코는"무인도에 가야 한다면 나는 전화번호부를 갖고 가겠다"고 했다. 숱한 이름들로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만 한 정보의 바다가 없었다. 북한의 대남공작부서는 우리 전화번호부 입수에 늘 총력을 다했다. ' 영자의 전성시대'가 히트친 1970년대 서울 사람 이름 중'김영자'가 실제로 가장 많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 시켜 준 것도 전화번호부였다(조선일보 1979년 4월 26일자). 가나다순으로 수록된 이름들을 훑어 보던 사람이 수십년 전 헤어진 형제자매 이름을 발견하고 극적으로 상봉한 사건이 1964년,1968년 잇따라 일어나기도 했다. 전화번호부는 1990년대 후반부터 찬밥 신세가 돼 갔다. ' 114 안내'와 인터넷에 설 땅을 빼앗겼다. 한때 2000만부 이상 찍었지만 지금은 구경하기도 힘들다. 그럼에도, 여전히 보물 취급받는 전화번호부가 있다.
    '사생활 침해' 비판을 받다가 2008년 발행 중지된 인명부다. 모든 집 전화 가입자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이 책은 고가에 거래된다. 공공도서관에서도 옛 연도별 전화번호부는 인기 도서다. 전화번호부는 아직 죽지 않았다.
           김명환 조선일보 사료연구실장 wine813@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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