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광복 70년… 물건의 추억

32 假名 난무했던 여관 '숙박계'… 함께 투숙한 사람 '관계'도 기입

浮萍草 2015. 12. 17. 09:42
    옛 여관마다 비치됐던‘숙박계’. 대개 검은 표지에
    숙박계’라고 쓰여 있었으며,기입용 볼펜이 장부에 끈
    으로 매달려 있었다. /www.gwanganri.com
    1968년 6월 26일 서울과 수도권 숙박업소에 묵고 있던 수많은 시민이 한밤중 기절초풍했다. 낯선 사내들이 쾅쾅쾅 객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북한 무장 공비가 잠입했다는 정보에 따라 전격 실시한 검문이었다. 경찰 7000여 명,예비군 4만명까지 동원해 새벽까지 여관 수천 곳 등을 이 잡듯 뒤져 1만742명을 연행했다, 이런 식의 여관 검문은 민주화 이전 우리나라에서 가끔 있는 일이었다. 1982년 2월 3일엔 경찰 2만2000명이 서울의 모든 여관방을 노크했다. 1985년엔 7월 3일엔 반정부 시위 관련 대학생들을 잡는다며 또 시내 여관들을 밤새 검문했다 (조선일보 1985년 7월 4일자). 오늘날엔 상상하기 어려운 사생활 침해였다. 옷도 제대로 못 입고 연행됐다가 무죄가 드러난 시민들은 경찰에서 "국가 시책이니 양해해 달라"는 말만 듣고 집으로 갔다. '임검(臨檢)'이라 불린 숙박업소 검문은 평소에도 툭하면 실시했다. 이럴 때마다 여관에 들이닥친 경찰이 가장 먼저 들춰 본 것이 '숙박계(宿泊屆)'다. 오늘날 호텔 투숙 때 적는 숙박부와는 차원이 다르다. 숙박계는 경찰이 수시로 들여다볼 것을 전제로 모든 투숙객 신상을 차례차례 자세히 기입하는 장부다.
    이름, 나이는 물론 주소 이전 숙박지, 행선지 등을 적게 했다. 장부의 빈칸을 채우면서, 위에 적힌 다른 투숙객들 명단을 슬쩍 훑어보다 아는 사람을 발견하기도 했다. 숙박계도 임검도 모두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다. 일제는 치안 유지를 내세웠지만 진짜 목적은 독립운동가를 색출·검거하는 것이었다. 이 제도는 광복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치안이 어지러웠던 1949년엔 심지어 가정집에 찾아와 묵는 손님의 숙박계까지 제출하게 했다. 조선일보 사설은 "무고한 백성의 피해가 얼마나 클지를 생각하라"며 질타했다. 1969년 3월엔 숙박계 기입 항목에 주민등록번호를 추가했다. 함께 투숙한 사람 관계도 적게 했다. 경찰은 "부부인 것이 증명되지 않은 남녀가 동숙할 때는 일단 윤락 행위로 보고 연행해 조사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래도 이 무렵 많은 사람은 여관 숙박계에 가명을 썼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서울 신림동 일대 여관 숙박계엔 '이 지역 대학 총장' 이름이 가명으로 많이 올랐다. 대한민국은 1998년 11월 1일 숙박계와 임검을 폐지했다. 그러나 일제 때 숙박계를 쓴 한반도의 또 다른 지역,북한엔 아직도 이 제도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3년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오늘날에도 숙박업소뿐 아니라 가정집도 한밤에 수시로 '숙박 검열'을 한다고 한다.
           김명환 조선일보 사료연구실장 wine813@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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