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광복 70년… 물건의 추억

30 60년대 히트 상품 '푸른 비닐우산'… 날림의 상징 돼 20년 만에 퇴출

浮萍草 2015. 12. 3. 10:58
    "우리는 비닐 우산이 되지 맙시다!"
    1971년 대선·총선을 치른 지 몇 달 뒤인 8월 18일 여당인 공화당 중앙위원회의 김성곤 의장이 운영위원들 모임에서 외친 말이다. 
    '(선거 때만) 한 번 쓰이고 마는' 신세가 돼선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 정도로 당시 비닐 우산이란 '한 번 이상 못 쓰는' 불량품의 대명사였다. 
    요즘의 투명 비닐 우산과는 다른 물건이다. 
    엉성한 대나무 가지들이 푸르뎅뎅한 비닐을 받치고 있던 싸구려 우산이다.
    처음 등장한 건 1960년 경이다. 조선시대 지(紙)우산 모양을 본뜨면서 기름 먹인 한지 대신 비닐을 입혀 원가를 낮췄다. 
    값싸고 가벼워 나오자마자 히트 상품이 됐다. 
    스위스,스웨덴,일본 등으로부터 수입하고 싶다는 요청도 잇따랐다. 
    일기예보 실력이 떨어지던 시절이라 거리에서 무방비로 비를 만나는 일은 다반사였다. 
    소나기만 쏟아지면 우산 팔이 소년들은 귀신처럼 알고 나타나 "우산이오, 우산!"을 외쳤다. 
    한 해 몇백만 개씩 팔렸던 호시절도 있었다. 
    어느 신문은 "길을 가던 여성이 갑자기 내리는 비를 맞으면 낯 모르는 남자가 기사도를 발휘해 자기 우산을 받쳐 주면서 사랑이 맺어지기도 했는데, 비닐 우산 
    등장으로 비 오는 날의 로맨스가 끝나 버리게 됐다"는 별난 전망까지 했다.
    1962년 서울에서 비닐 우산을 파는 소년. 오른쪽은 1970년대 후반의 비닐 우산. 초기엔 30개나 됐던 우산살이 9개로 줄었다.

    하지만 비닐 우산의 황금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업자들의 과당경쟁과 '대강대강·빨리빨리'문화 속에 품질은 점점 더 조잡해져 갔다. 초기엔 우산살이 30개나 됐으나, 야금야금 줄어들더니 1970년대 후반엔 9개가 됐다. 게다가 시판품의 60~70%는 폐품 우산을 고쳐서 만든 재생품이었다. 이런 날림 우산들은 새로 사 들고 100m도 못 가서 살이 부러지고 비닐이 찢어져 못 쓰게 되기 일쑤였다. 1966년 7월, 서울에서 열린 세계 교육자대회 때 기습 폭우가 내린 거리에서 각국 대표들에게 나눠준 비닐 우산이 바로 망가져 망신을 당한 일은 신문에도 보도 됐다(조선일보 1966년 8월 3일자).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을 엉터리 우산, 차라리 만들지 말라"는 언론의 탄식까지 나왔다. 결국 등장 20년 만인 1980년쯤부터 대나무 비닐 우산의 인기는 곤두박질쳤다. ' 불량 상품은 단명한다는 경제 원리를 일깨운 대표적 사례'로 언급되기도 했다. 하나 사서 펼쳐 들면 후드득후드득 유난히도 크게 들렸던 빗소리로 기억되는 푸른 비닐 우산은 이제 박물관 전시실로 들어가고 있다. 남아 있는 극소량의 재고는 인터넷에서 한 개 3만원 이상 호가하는 희귀품이 됐다.
           김명환 조선일보 사료연구실장 wine813@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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