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 맛 세상

크리스마스의 충격적 미각 경험

浮萍草 2015. 12. 10. 09:56
    음식 맛, 미뢰로만 느끼지 않아… 
    살아온 문화와 환경에 따라 뇌가 음식 맛을 다르게 느껴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식사와 어머니의 손맛 그리운 것도
    음식에서 추억을 떠올리기 때문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년 전 크리스마스날 매우 충격적인 미각(味覺) 경험을 했다. 소개받아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과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였다. 당시 새로 오픈한 가장 '핫'하다는 프랑스 레스토랑에 어렵게 테이블을 예약했다.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설 때였다.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음식을 맛보고 그 맛을 글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일이라서만은 아니다. 워낙 음식을 즐기는 집안에서 태어난지라 어릴 때부터 가족끼리 집에서 밥 먹으면서도 음식 품평을 했다. 어머니가 저녁에 끓여주신 새우젓 찌개 앞에서"오늘은 좀 짜네요? 평소 엄마 솜씨가 아니네." 이런 식이다. 친구들도 유유상종. 워낙 잘 먹는 이들과 어울리다 보니 점심을 먹으면서 저녁에 뭘 먹을지,어제 다녀온 식당은 어땠고 내일 갈 식당은 어디인지 따위를 떠들면서 먹었다.
    그러니 방금 뭘 먹었는지, 맛은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건 이전까지 겪어보지 못한 놀라움이었다. 쉽게 말해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던 것이다. 그럴 정도로 상대방에 몰입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현재의 아내다. 음식을 먹고 식사를 경험하는 과정에는 많은 요소가 개입하고 영향을 준다. 음식을 맛보는 기관은 물론 입과 혀다. 혀와 입 안쪽 벽,인두,후두개에는 맛을 감지하는 미뢰(taste bud)가 1만여개 존재한다. 작은 돌기 모양인 미뢰에는 미각 세포 50~150개가 모여 있다. 음식을 입에 넣고 씹으면 음식과 침이 섞이면서 즙이 나와 음식에 든 화학물질이 미뢰에 감지되기 쉬운 상태가 된다. 미뢰는 맛을 감지할 뿐이다. 맛을 인지하는 기관은 뇌다. 미뢰에서 맛을 감지해 뉴런으로 화학 신호를 보내면 신경 반응이 일어나 두뇌가 정보를 받아들여 맛을 인지한다. 인간은 입이 아니라 뇌로 음식을 먹는 셈이다. 두뇌가 음식을 '먹을' 때는 단순히 미뢰가 보내준 정보에만 의지해 판단하지 않는다. 음식 사학자인 마시모 몬타나리 이탈리아 볼로냐대학 교수는 "뇌는 대를 이어 전수된 가치 기준을 따르는 문화적으로 결정된 기관"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특정 음식을 맛있다 또는 맛없다고 느끼는 건 음식의 맛 그 자체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환경과 문화와 경험에 영향받는다는 것이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음식의 맛을 결정짓는 요인으로는 분위기와 서비스도 있다. 프랑스의 권위 있는 레스토랑 가이드 미슐랭(Michelin) 최고 등급인 별 3(★★★)을 받으려면 음식이 완벽한 건 물론이고 음식을 내는 종업원의 서비스도 탁월해야 한다. 영국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요리사 미셸 루(Roux)는 "형편없는 음식 맛에 너그러운 손님도 형편없는 서비스는 용서 못 한다"고 말했다. 식당에서의 한 끼라는 총체적 경험에 미치는 영향은 어쩌면 서비스가 음식 맛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 어떤 분위기 즉 상황에서 음식을 먹느냐도 맛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조선시대 선조 임금이 생각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안도 의주로 몽진(피란)했다. 전쟁 중에도 한 백성이 생선을 임금에게 올렸다. 배고팠던 선조는 그 생선이 매우 맛있었나 보다. 왕이 "이 생선이 무엇이냐" 묻자 백성은 "묵"이라고 답했다. "이렇게 맛있는 생선을 고작 묵이라 부르다니, 당치 않다. 앞으로 은어(銀魚)라 부르라." 전쟁이 끝나고 한양에 돌아온 선조는 피란 중 맛본 은어가 자꾸 생각났다. 은어를 진상케 해 먹었다. 맛이 없었다. 선조는 "은어라는 이름을 취소하고 예전대로 도로 묵이라고 하라"고 명령했다. 도루묵이란 생선 이름의 유래로 알려진 일화다. 무엇보다 맛을 판단하는 가장 큰 잣대는 추억이 아닐까. 외식업자들은 한식이 제일 어렵다고 한다. 한식은 전 국민 5000만명이 모두 전문가다. 이 '전문가'들의 평가 기준은 추억이다. "우리 엄마가 만들어주던 음식은 이런 맛이 아니다"란 거다. 문제는 엄마마다 손맛이 다르고, 솔직히 요리 솜씨가 영 별로인 엄마도 있다. 하지만 자식은 어머니가 해주던 음식에 길들여진다. 엄마 손맛을 기준으로 불평하면 요리사는 난감하다. 외국 음식에는 이런 추억이 없다. 그래서 웬만큼 만들어도 손님들이 맛있게 먹는단다. 올 크리스마스에 그때 그 프랑스 음식점에 다시 찾아가면 어떤 맛일까. 아내와의 첫 크리스마스 추억이 떠올라 뭘 먹어도 맛있을까. 아니면 천방지축 날뛰는 어린 두 아들이 사고 치지 못하게 뒤쫓아 다니느라 혼이 빠져 또다시 뭘 먹었는지도 모른 채 식당을 나오게 될까. 아쉽게도 그 식당은 얼마 전 폐업했다. 많은 이들의 소중한 추억을 위해서라도 식당들이 문 닫지 말고 오래 유지됐으면 한다. 물론 유쾌하지 않은 추억을 남기는 맛없고 서비스 나쁜 식당은 제외다.
           김성윤 조선일보 문화부 음식전문 기자 gourmet@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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