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광복 70년… 물건의 추억

28 名士들 밤 문화 담겼던 '외상 장부', 고급 술집 장부는 '공무원 살생부'

浮萍草 2015. 11. 26. 09:33
    각계 유명 인사들의 술 마신 자취를 담은 1960년대 서울 사직골 술집 ‘명월옥’의 외상장부
    1992년 여름 서울 청량리 시장에 큰불이 났을 때 잿더미로 사라진 200여 상인들의 '피해품 1호'는 물건도 현금도 아니었다. 월말에 받을 돈을 빼곡히 적어 놓은'외상 장부'들이었다(조선일보 1992년 8월 9일자). 오죽했으면 1991년 남대문시장 화재 때 어느 상인은 불이 채 꺼지지도 않은 현장에 뛰어들어가 필사적으로 뒤진 끝에 100여 거래처와의 기록이 담긴 외상 장부 2권을 찾아내기도 했다.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한국인은 외상을 좋아했다. 특히 술꾼들이 좋아했다. 글을 잘 모르는 옛 선술집 주인들이 작대기로 판매액을 표시한 데서 '외상을 긋는다'는 표현이 나왔다. 특별한 업소의 외상 장부는 미수금 기록부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도 했다. ' 대머리집'으로도 유명했던 서울 사직동의 유명 주점'명월옥'이 1950년대 말부터 1962년까지 적었던 외상 장부는 2009년 서울역사박물관에 근대 역사 자료로 전시 됐다. 장부엔 조지훈,진념,손세일,정영일,이규태,이순재 등 각계 인사들 이름과 그들이 술 마신 날짜,금액,좋아한 안주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 명사들 밤 문화의 자취를 담은 기록인 셈이다(조선일보 2009년 7월 29일자). 최불암의 어머니는 1950~1960년대 예술인들 사랑방이었던 명동의 주점'은성'을 운영하며 외상장부를 적었다. 어머니가 떠난 후 최불암이 장부를 발견하고"남은 돈 다 받으면 큰 부자 되겠구나"싶었지만 허사였다. 가난한 예술가들 자존심을 배려한 어머니가 장부에 손님 이름 대신 '키다리'니 '안경'이니 하는 별명만 적었기 때문이다.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1960년대 유명 미술 재료 상점 주인을 회고하며"그의 외상 장부에 이름이 올라 있지 않은 사람은 제대로 활약하는 미술가가 아니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고 했다. 외상 장부에 훈훈한 사연만 있는 건 아니다. 유흥 업소 외상 장부는 공직자 비리 수사 때마다 검찰의 압수 목록에 포함됐다. 1998년 공무원들에 대한 사정 바람이 불면서 술집 외상 장부가 '살생부'가 된다는 소문이 돌자 공무원들이 너도나도 자기 이름을 지우려고 외상 술값을 급히 갚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좀처럼 보기 드물던 외상 장부가 최근 정부 세종청사 주변 음식점에 속속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단골 믿고 그냥 주던 옛날의 훈훈한 외상이 부활한 것인가 했더니 그건 아니다. 식당 간 경쟁이 치열해지자 어떻게든 이겨 보려는 업주들이 공무원 손님을 더 잡아보려고 내키지는 않지만 외상을 주고 있다는 것.'울며 겨자 먹기식 외상'이다.
           김명환 조선일보 사료연구실장 wine813@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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