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잊혀진 유라시아 이야기

19 노트르담 사원이 100년만에 지어졌는데 6년만에 완성한 소피아 사원 결국은…

浮萍草 2015. 11. 24. 18:22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위키피디아
    10월말까지 해외로 떠난 한국인 관광객 수가 무려 1600만 명이다. 이젠 세계 명소에 한국인 발길이 닫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덕분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에게 생소했던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Hagia Sophia) 사원은 국내 여행객들이 꼭 봐야 하는 세계적 명승지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하지만 성 소피아 사원은 명승지 이상의 커다란 의미를 담고 있는 세계 역사의 중요한 아이콘 이다. ‘Hagia Sophia’는 그리스어로 발음하면 ‘아이야 소피아’로 ‘성현(聖賢)’이란 뜻이고 터키어로는 ‘아야 소피야’로 발음된다. 성 소피아는 단초는 기독교를 최초로 공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360년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 세워졌다가 서기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 의해 현재 사원이 다시 세워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에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고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비잔티움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했다. 그 후 비잔티움은 헬레니즘 문화 산실로 천 년 동안 정교 세계의 문화, 예술,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472~565)는 섭정 초기에 세금을 과도하게 부과한 탓에 시민에게 그다지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보수파인 청색당과 진보파인 녹색당 시민은 전차경기장에 모여 승리의 여신(Nika)을 연호하며 황제를 타도하려 시도했다. 황제와 신하들은 시민의 기세에 눌려 대피할 준비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황후 테오도라는 불같이 역정을 내며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폭도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할 것을 독려했다. 황제는 아내의 꾸지람에 자극을 받아 잔인하게 반란을 진압했다. 그 결과 반란에 가담한 3만 명의 시민이 학살됐다. 기독교 상징이었던 성 소피아 사원이 폭도에 의해 불에 타버린 것을 개탄하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 자리에다 오늘날의 성 소피아 사원을 다시 짓도록 명령했다. 532년에 시작해서 매년 1만 명의 일꾼이 동원돼 537년에 경이로운 규모의 성 소피아 사원이 완공됐다. 당대 최고 시인이었던 파울루스 실렌티아리우스는“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승리 (Nika)”였다. 유스티아누스는 성 소피아 사원의 건축을 그리스의 물리학자인 안테미우스와 수학자인 이시도르에게 맡겼다.
    이들은 6년이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성당을 완공했다. 비슷한 규모의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 600년 후에 1세기 넘는 기간 건축된 것을 고려한다면 거의 기적이었다. 성 소피아 사원의 원형 천장(cupola)은 금과 은을 비롯해 50가지 보석으로 장식하여 축복에 찬 하늘나라를 상징하도록 꾸며졌다. 그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천국에 온 것으로 착각하게 할 정도로 장관이었다. 하지만 급히 짓는 바람에 20년 후 지상 50미터 높이의 원형 천장이 붕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 지붕은 이 사원을 지은 이시도르의 아들에게 떨어졌다. 마침 이시도르의 아들은 원형 천장을 새로이 지으려는 명을 받고 사원 안에 있었던 참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오늘날까지 아무런 사고 없이 1400년간 동안 지탱해올 수 있는 50미터 높이에 지름이 30미터나 되는 원형 천장을 완성했다. 원형 천장 아래로는 40개의 아치와 창이 나있다. 이 창들에서 나오는 햇빛은 원형 천장을 감싸며 사원 실내로 흘러들어와 황금모자이크 벽을 비춰주며 신비로운 기운을 발산시켜주게끔 설계되어 있다.
           오은경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euphra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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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인을 충격에 빠트린 성 소피아 성당
    원 내부는 지상층과 상층부에 있는 발코니로 나뉘어 있다. 
    그것은 남녀,계급에 의해 자리 배치가 되어 예배볼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발코니 층에는 황제 내외가 예배를 볼 수 있는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세기가 거듭함에 따라 사원 장식은 더욱 화려해졌다.
    황제의 초상화, 그리스도와 성인의 아이콘이 가미되었다. 
    한때 우상파괴 운동에 따라 그러한 이미지가 훼손당했던 적도 있었다. 
    원형 천정은 어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대형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사원에 발을 딛고 들어오는 사람은 그 누구든 인간이 아닌 신의 손에 의해 지어진 듯한 사원의 웅장함과 찬란함에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이러한 장관을 보면 신앙심이 저절로 생겨난다고 했다. 
    그것은 미래 러시아의 운명을 바꿔 놓았을 정도였다.
    원래 다수의 우상을 숭배했던 고대 러시아에서는 대대로 이어지는 혈족 간 유혈 복수가 그치지 않고 살아 있는 인간을 제물로 바치고 남편이 죽으면 살아있는 
    아내를 불로 태워버리고 노예를 부리는 악습이 횡행했다.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고 다수 우상으로 인한 국가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 러시아 수장이었던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대공은 하나의 공인된 신으로 국가를 통합
    하려 했다.
    그는 동쪽의 이슬람교 하자르족이 믿는 유대교,로마의 가톨릭교,비잔티움의 정교를 염두에 두고 어느 종교가 러시아인에게 가장 적합한지 알아보기 위해 해당 지역
    으로 사신들을 보냈다. 
    사신들 보고를 들은 블라디미르 대공은 할례를 해야 하고 술을 금지하는 이슬람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쾌활하고 술을 즐기는 러시아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종교라고 생각했다.
    326년 기독교성당으로 건립됐지만 1453년 오스만투르크 점령이후에도 파괴되지 않고 지금까지 이슬람 사원으로 계속 사용되고 있는 성 소피아 성당. /조선일보 DB

    그리고 조국에서 추방되어 후손이 여러 나라에서 수천 년간 떠돌이 생활하는 유대인의 종교 또한 국교로 받아들이기가 께름칙했다. 가톨릭교는 지나친 금욕과 계율을 요구했기에 받아들이기가 불편했다. 그러나 동로마제국의 기독교를 알아보러 콘스탄티노플에 갔다 왔던 사신들은 황홀감에 넘쳐 있었다. 성 소피아 사원의 장엄함과 휘황찬란함 그곳의 사제들이 입고 있는 화려한 성의 모든 신하를 대동하고 사원에 나타난 황제 앞에서 벌어지는 호사한 의식,수많은 사제를 거느린 대주교의 위엄,숨을 멎게 할 것 같은 성가,이 모든 것이 러시아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사신은 성 소피아 사원에 발을 디딘 순간 분위기에 취해서 자신이 천국에 와 있는지 지상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대공은 주저하지 않고 동방의 그리스 정교를 받아들였다. 서기 988년 러시아의 종교로 기독교가 선포되었다. 선포 다음날부터 모든 국민은 강가로 나가 강제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마을 주변에 세워진 모든 우상은 파괴되었다. 블라디미르는 러시아를 세례 시킨 국왕으로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聖人)이 되었다. 이후 러시아는 1917년 혁명 전까지 유럽에서 가장 신앙심이 강한 나라가 되었다. 성 소피아 사원이 그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다. 성 소피아 사원이 운명의 소용돌이를 맞이한 것은 1453년이었다. 그해에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투르크인들에게 완전히 함락되었다. 이후 그리스라는 나라는 400년 가까이 이 지상에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투르크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파괴하고 약탈했다.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소피아는 이교도들에게 겁탈을 당했다. 그러나 아주 아름다운 나머지 오토만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소피아의 아름다움에 반해 소피아의 겁탈을 중지시켰다.
           오은경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euphra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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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피아 사원은 기독교 상징인가 이슬람교 상징인가?
    
    소피아를 아예 이슬람으로 개종시켜 영원히 자기 것으로 만들려 했다. 
    아홉 개 하늘을 형상화한 성 소피아 사원 원형지붕들은 이슬람교도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였다. 
    소피아의 새로운 주인이 된 이슬람교도들은 사원 주위에다 이슬람식 뾰족탑들을 설치했다. 
    내부에도 변화를 주었다.
    이들은 모자이크 위에다 노란 페인트를 두껍게 칠을 해버렸다. 
    기독교의 상징들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글자 그대로 호도 행위가 벌어진 것이다. 
    단지 반원형 천정에 새겨진 아이를 안고 있는 성모의 모자이크만 남겨두었다. 
    그리고 기둥 모서리에다 이슬람 성인 이름을 딴 문자 문양들을 걸어놓았다. 
    그렇게 해서 이슬람 최고의 사원이 되어버린 성 소피아 사원은 이스탄불의 푸른 회교사원의 모범적 건축양식이 되었다.
    오스만 투르크제국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었고 새로운 터키의 지도자 아타튀르크는 발전한 유럽을 지향하며 터키를 종교 국가가 아닌 세속국가로 선
    포했다. 
    그 상징이 성 소피아 사원이었다. 
    소피아를 이슬람에서 해방했다. 
    500년 가까이 이슬람 사원 중추 역할을 해왔던 성 소피아 사원을 박물관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것은 터키가 지역주의에서 벗어나 세계주의로 나가겠다는 신호였다.
    성 소피아는 또 한 번 개종을 겪으며 어느 특정 종교에 얽매이지 않은 채 이제 이스탄불이 아닌 세계의 유적지로 자리 매김을 했다. 
    그 안에는 고대 정통 기독교와 중세 이슬람교 고대 서양 문명의 결정체와 동방 이슬람의 고유문화 동쪽 세계와 서쪽 세계,고대와 중세와 현대가 어우러져 있다. 
    이와 같은 인류의 애환이 서려 있는 성 소피아 사원은 비로소 진정한 코스모폴리타니즘을 획득한 것이다.
    터키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대성당의 전경. /조선일보 DB

    하지만 최근 소피아에 이상 징후가 생겼다. 1915년 150만 명의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들이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터키인들에 의해 대량 학살당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난 다음부터이다. 물론 터키는 이 사실을 극구 부인하고 있다. 학살당한 자들은 어디까지나 1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들이지 터키인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가톨릭 세계의 영적 지도자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4월의 미사에서 “20세기 최초의 대량학살이 터키인에 의해 자행되었다”며“이 사실을 외면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터키의 이슬람 지도자들은 교황의 그러한 발언은 성 소피아 사원을 다시 회교 사원으로 개종시키는 명분을 줄 뿐이라고 과격하게 반응했다. 이미 2013년 터키의 부총리가 성 소피아를 이슬람교도들에게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도 있다. 그들은 현재 성 소피아가 슬픈 얼굴을 하고 있고 다시 소피아에 미소를 돌려줄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교황의 미사가 있던 날 성 소피아 사원에서는 85년 만에 최초로 앙카라에서 온 이맘 알리 텔에 의해 코란이 암송되었으며‘무함마드의 사랑’이라는 전시회가 시작되었다. 이 행사에 정부의 고위관리들이 참석했다. 성 소피아 사원을 다시 기독교 사원으로 복구시키자는 운동을 지난 수십 년 동안 펼쳐왔던 미국과 유럽의 운동가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었다. 마치 새로운 십자군 전쟁이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성 소피아(지혜)의 성스런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오은경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euphra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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